중동·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몰락(1)

편집자주
인도 전문가 이병진 교수의 중동, 중앙아시아 정세에 대한 글을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복잡한 중동. 중앙아시아 정세를 개괄하고 인도문제까지 조명하며 미국의 패권몰락양상과 동북아정세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한다.

중동·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몰락

-차 례-

1. 시작 글
2. 초 강대국 미제국주의 단일 패권과 중동정책의 모순
(1) 미국의 ‘신질서(New Order)’
(2) 냉전시기, 반공주의 전선에서 미제국과 이슬람 전사들과 동맹
(3) 무자헤딘 전사들의 탄생과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붕괴
(4) 미 제국 독점자본의 탐욕과 이슬람 전사들의 반미주의

3.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패배와 미 제국의 몰락
(1) 미 제국의 중앙아시아 지배전략
(2) 러시아의 반격과 중앙아시아 인민의 반발
(3) 시리아 내전 그리고 이슬람국가(Islam State)
(4)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미제국의 패배와 몰락
4. 나오늘 글: 미 제국주의 세력 몰락은 필연

1. 시작 글

2021년 8월 30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2001년 10월 시작된 전쟁이 20년 만에 종식되었다.1) 매켄지 미군 중부사령부 사령관은 “이번 철수와 관련해 비통함이 크다”(황준범,2021)며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였다. 미국의 철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의 중동 및 중앙아시아 지배전략의 실패를 의미한다. 이것은 소련 붕괴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 제국의 몰락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는 사건이다.

1)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2조달러(약 2327조원)을 쏟아 부었다. 미군 사망자는 2400여명,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6만6000명, 탈레반은 5만 1000명,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은 4만700여명이 숨졌다.(황준범, 2021).

이 글은 역사적 관점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제국의 패배가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몰락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보고 이런 분석에 기초해서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미제국주의의 몰락의 원인을 서술한다. 이 글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우두머리인 미 제국주의 붕괴는 필연이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그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2. 초 강대국 미제국주의 단일 패권과 중동 정책의 모순

(1) 미국의 ‘신질서(New Order)’

1991년 소비에트연방공화국(U.S.S.R)이 해체되고 냉전에서 승리 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반·소/반공주의 이념으로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을 공격하고 봉쇄하였는데 국가독점자본주의 우두머리 국가 미국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환호하며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였다.2)

2)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이며 일본계 미국인 3세인 프랜시스 요시히로 후꾸야마는 미국 지배 계급의 입장에서 1989년 냉전이 종식되는 순간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하였다.

미국의 지배층 내부에서도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 전략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지배적 흐름으로 규정되면서 미국 패권을 군사력으로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갔다.3)

3) 냉전 직후 미국의 대전략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Barry R. Posen & Andrew L. Ross는 이 대논쟁을 1 신고립주의(neo-isolationism), 2 선택적 개입주의(selective engagement), 3 상호안보협력주의(cooperative security), 4 최강지배전략(Primacy)로 범주화하였다. B.R. Posen에 따르면 냉전 이후 미국의 대전략은 위의 네 가지 관점을 절충하여 “자유주의 헤게모니(Liberal hegemony)”,와 “억제(Restraint)”의 두 가지 전략으로 대체 되었다고 주장한다.(Posen, Barry R, 2014-06-03, “Restraint: A New Foundation for U.S. Grand Strategy” , Cornell Studies in Security Affairs.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미국의 독점자본가들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의 지배계급은 중동지역의 원유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이라크를 공격하였고 제1차 이라크 전쟁을 속전속결로 정리되었다.4) 제1차 이라크 전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중동지역의 원유뿐만 아니라 카스피해 지역의 유전을 장악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5)

4) 1991년 1차 이라크 전쟁은 이란-이라크 전쟁의 모순이 축적된 가운데 미국으로부터 전쟁 비용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쿠웨이트를 점령하면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5) 중동지역의 원유 매장량은 2,800억 배럴이고 카스피해 지역의 원유 매장량은 2,000억 배럴로 추산된다. 미국의 중요 외교정책 결정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미국 우월주의자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는 중앙아시아를 미국이 장악해야 한다는 거대한 담론을 제출하였다(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저, 김명섭 옮김, 2000, 『거대한 체스판』, 삼인).

먼저 미국은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로 와해 된 동유럽을 하나씩 접수하였다. 1989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자 차우셰스크를 처형하고 루마니아에 미군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어서 1992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해체 시켜 동유럽을 장악하였다.

세계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독점자본주의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극단적인 자유무역 질서로 재편성하려 하였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담론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다. 미제국은 ‘신자유주의’란 이념을 토대로 미국 중심의 세계시장을 만들려 했고 이런 미국의 정치적 야심을 “신질서(New Order)”로 포장하였다. 그러나 미제국의 신질서 전략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 그리고 문화를 갖고 사는 인민들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독점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치·경제적 폭력이었다.

미국 중심의 세계 단일 패권을 세우려는 미국의 야심은 20세기 제국주의 지배와 다를 바 없었으며 그런 미국의 신질서 전략은 오랜 시기 서구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아 온 이슬람 전사들의 자주적인 요구와 모순되었다. 한때 미국은 반공주의 이념을 기치로 이슬람 전사들과 반소련 전선에서 함께 싸웠던 이슬람 전사들과 미국의 목표는 달랐으며 충돌은 필연이었다.6)

6) 사냥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사자성어에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있다. 미국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관계는 그와 비슷한 관계였다.

(2) 냉전 시기, 반공주의 전선에서 미제국과 이슬람 전사들과 동맹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여러 개의 중동 국가들로 쪼개져 서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식민지로 전락한 이슬람 민중들의 삶은 고단했으며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7) 아랍 인민들의 혁명 열기는 이란 혁명으로 나타났다. 1979년 이란 혁명의 성공으로 친미 봉건 왕정인 팔라비( کشور شاھنشاھی ایران ) 왕조가 무너졌다.

7) 1958년에는 이라크 공산당이 주도하여 영국 제국주의 세력이 세운 이라크 왕을 몰아냈고 1968년에는 수단 공산당이 이끄는 혁명이 성공하면서 이슬람 사회주의 운동이 고조되었다. 이때만 하여도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아랍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막고 소련을 봉쇄하는데 맞춰졌기 때문에 미국은 공화주의자인 이집트의 나세르(Gamel Abdul Nasser)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바트(Ba’ath:Renaissance/부흥)”라는 명분으로 아랍민족주의를 고취하면서 민심을 얻었다.

친미 이란왕정의 붕괴는 이슬람 인민들을 혁명 열기로 고무시켰다. 이슬람 민중 사이에 ‘헤즈볼라(Hezbollah; 신의군대)’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사우드 가문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1980년 8월 5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찾아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전쟁 초기 매달 10억 달러를 제공하고 영공 사용도 허락할 테니 혁명에 성공한 이란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다.8) 그런 제안을 받은 후세인은 그해 9월에 영토 분쟁을 빌미로 이란을 공격하였다.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이란 혁명을 무너뜨리는 좋은 기회로 보고 이라크를 도왔다.9)

8) 이병진, 2015-03-29, “이슬람국가(Islamiic State)의 성장과 미국의 실패”, 자주시보(Http://jajusibo.com 검색일:2021년 9월).

9)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이란 혁명의 파장을 차단하기 위해서 미국의 지원 아래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상공을 초계 비행하면서 이 국가들을 압박하여 1981년 2월에 ‘걸프협력협의회(The Gulf Cooperation Council)’를 만들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 봉건왕조는 사회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의 도전을 제압하고 낡은 봉건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슬람 근본주의 종파인 ‘와하비즘(Wahhabism)’을 강화하였다.10) 사우디 봉건왕조는 와하비즘을 정치이데올로기화 시켜서 체제 유지를 이용하였고 비밀종교경찰을 조직하여 폭력적으로 와하비즘을 확대 재생산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지원하는 와하비즘은 국가폭력의 수단으로 전화되면서 폭력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온상이 되었다.11) 이슬람 전사들은 반공산주의 전선에서는 매우 용맹한 전사들이었지만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의하면 외국 군대에 의한 예속적 지배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10) 사우디아라비아 봉건 왕국은 1962년 무슬림세계연맹(The Muslim World League)을 만들고 종교경찰까지 만들었다. 1969년에는 친미 국가들인 모로코, 파키스탄을 끌어드려 ‘이슬람협력기구(The Organisation of Islamic Cooperation)’을 창설하여 와하비즘을 전파하였다. 1976년 오만의 도파르(Dhofar) 지역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나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였으며 남예멘(예멘 인민민주공화국)에서는 ‘지하드(jihad)’를 지원하였다.

11) 국가폭력에 기반한 와하비즘에 반대하는 인민들의 저항이 동시에 일어났다. 1979년 말 유전 지대인 꽈티르(Qatif)에서 이란 혁명을 지지하는 대중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 봉기에 사회주의 세력도 가세하였다. 이런 진보적인 혁명운동과 대결하여 1979년 11월에는 와하비즘 근본주의 세력이 ‘마흐디(Mahdi; 이슬람판 재림예수)’를 주장하며 메카 대사원을 점거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들 세력은 사우디 총정보국에 의해서 소탕되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와하비즘 전사들과 사우디아라비아 봉건 왕사이의 관계에 틈이 생겼다.

이것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봉건왕국에게 골치 아픈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조는 와하비즘의 강력한 후원자였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지배 세력은 예속적인 친미 정권이라는 한계 때문에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외국 군대의 철수와 미국에 대한 원유 수출 금지는 받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원유를 독점적으로 생산·수출하여 천문학적인 돈을 벌며 미국과 공생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시기쯤 1978년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이 들어서자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서 미국은 반-사회주의 무장게릴라 조직을 만드는 비밀공작을 실행하였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보부를 내세워 이슬람 전사들을 훈련 시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무자헤딘12)을 조직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조는 국내 정치에서 간섭하려는 골치 아픈 와하비즘 전사들을 아프가니스탄에 수출함으로써 와하비즘의 명분도 살리고 내부를 단속할 수 있었다.

12) 무자헤딘은(Mujihadin)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를 뜻한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에 저항하는 반군 조직인 무자헤딘에게 ‘돌풀작전(Operation Cyclone)’에 투입하였다. 이 작전에 따라서 미군은 파키스탄 정보부(Directorate for inter-Service Intelligence)를 이용하여 무자헤딘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년 6천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무슬림 형제단 소속이었던 압둘라 아잠과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마크탑 알키다맛(MAK, Maktab al-Khidamat)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 정보부에서 집중적으로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지원 받으여 무자헤딘을 훈련시켰다(나무위키, 검색어 “무자헤딘”/http://namu.wiki 검색일:2021년 9월).

(3) 탈레반 전사들의 탄생과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붕괴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19세기 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전 지구적 패권을 쥐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을 여러 차례 침공하였다. 그렇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13) 힘에 부친 영국 제국주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을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완충지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만들었다. 그 결과 1893년 ‘듀랜드 라인(Durand Line)’이 만들어졌다. 이런 영국 제국주의 세력의분할 통지 전략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쪼개졌고 아프가니스탄 남쪽이 파키스탄으로 편입되면서오늘날의 국경선이 되었다.14)

13) 제1차 아프가니스탄-영국 전쟁은 1838년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일어났다. 영국 제국주의 세력은 카불을 정복하고 영국에 복종하는 왕국을 세웠지만, 민중들의 봉기에 항복하고 1842년 철수하였다. 그 당시 철수 과정에서 1만 2,000명이 탕이 가루 협곡에 매복해 있던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의 공격을 받아 군의관 1명만 협곡을 빠져나와 잘랄라바드에 주둔하였던 영국군 진지로 돌아왔다.(출처: 김정현 지음, 『아프가니스탄 그 절망과 희망 사이』, 휴먼비전, 2007년, 91쪽). 이후 제2차 아프가니스탄-영국 전쟁(1878년), 제3차 아프가니스탄-영국 전쟁(1919년)을 통해서 영국의 보호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4) 아프가니스탄 남쪽에는 퍄슈툰(Pashtun; 약 45%)족이 주류이고 북쪽 지역을 횡단하는 형식으로 우즈벡족(Uzbek; 약 10%), 투루크만(Turkoman; 약 2%)족, 발루치(Baluch; 2%)족이 살고 있다(유달승, 2001년, 181쪽)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부족민이 연합한 봉건왕조 체제를 유지하다가 1978년 4월 30일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이 이끄는 4월혁명(SaurRevolution)을 통해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Afghanistan)이 들어섰다.15) 1980년 4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총서기인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이 헌법 초안을 제출하였고 1987년 야당의 지지를 얻어 헌법을 제정하였다.16)

15)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제국주의 지배 세력의 간섭과 지배로 저지되었던 사회개혁을 추동하였다.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은 사우르 혁명을 “노동인민의 승리”와 “노동자, 농민의 진정한 의지와 이익의 표현”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다.

16) 헌법 2조에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했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대신 자주독립, 이슬람, 자유민주주의가 강조되었다. 1990년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이슬람공화국으로 헌법을 수정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점진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 토지개혁을 실행하였고 종교의 자유와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였다. 여성의 부르카 착용도 금지하였다. 그러나 반공주의 국가인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붕괴시키는 공격적인 비밀공작을 실행하였다. 미국의 작전 목표는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전복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목표는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지지하는 소련에 고비용의 지출을 강요함으로써 소련의 붕괴를 유도하는 것이었다(김병남, 장병옥, 2013, 77쪽). 미국은 1985년 이슬람 저항 세력을 규합하여 무자헤딘(Mujahedin)을 결성하였다. 미국은 사회주의가 종교의 자유를 부정한다고 선전하면서 이슬람전사들을 반공전사로 만들었다.

이들 이슬람 전사들은 그들의 맹목적인 종교적 신념을 맹신하면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전복시키는 공작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미국 CIA 요원들로부터 테러 작전을 집행할 수 있게끔 고도의 특수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은 무자헤딘을 교육하는 장소를 제공하고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역에 무자헤딘 요원들을 투입하는 길잡이였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서 받은 막대한 자금을 파키스탄의 군부 독재 정권이었던 지아(Zia) 정권을 6년간 지원하였다.17)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1984년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하는 ‘통가스-리터 결의안(Tsongas-Ritter Resolution)’이 통과되자 더욱 노골적으로 반군을 지원하였다(김강석, 2018, 43쪽).

17) 파키스탄은 미국의 비밀공작에 협조한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재정과 군사 원조를 받았다. 파키스탄 정보부는 무자헤딘을 훈련 시키는 장소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기를 공급해 주었다. 미국 중앙정보부는 중국과 이집트에서 소련제 AK-7 소총과 SA-7 대공미사일을 구매해서 파키스탄 정보기관(ISI)을 통해서 무자헤딘에게 공급하였다(김병남, 장병옥, 2013, 83쪽).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길어지자 1992년 소련군은 철수 결정하였고 무자헤딘은 나지볼라 정권을 인수하였다.18) 그러나 북부동맹을 대표하였던 랍바니 세력은 정국 안정에 실패하였고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참전했던 무자헤딘 그룹 가운데 파슈튼족이 거주하는 파키스탄 북부 및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에 뿌리를 둔 이슬람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텔레반(학생)’이 종족간 보복 학살을 자행하면서 정국은 아비규환이 되었다.19) 이들 탈레반은 1996년 9월에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호국을 선포하였다.

18)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참전하였던 주요 반군의 주요 종족은 4개였다. 랍바니(Burhanuddin Rabbani)와 마수드(Ahmad Shah Masud)를 따르는 타지크족 세력, 헤그마티야르(Gulbuddin Hekmatyar)를 따르는 파슈튠족 세력, 시아파인 하자라족 세력, 도스탐(Abdul Rashid Dostam)을 따르는 우즈벡족 세력이었다. 소련군 철수 이후 랍바니가 총리로 내정되었지만, 파슈툰족의 헤그마티야르는 이에 불복하여 내전을 벌이면서 아프가니스탄은 혼돈에 빠져들었다. 1995년 카불에서 하자라족에 대한 마수드의 대량학살, 1997년 마자르(Mar) 지역에서 탈레반에 대한 하자라족의 보복대량학살, 그리고 1998년 하자라족과 우즈벡족에 대한 탈레반의 대량 보복 학살이 있었다. 이런 종족간의 대량 학살 과정에서 탈레반은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하면서 1996년 9월 26일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였다(유달승, 2001, 190쪽).

19)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데오반디(Deobandi) 이슬람을 추종하는 정치 군사 조직이다. 데오반디파는 영국 식민지배하의 인도에서 발생했으며, 식민지 예속에서 해방 운동을 벌인 무슬림 개혁 운동이었다. 데오반디파는 이슬람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학교(마드라사)를 세웠고 무슬림 공동체의 모든 종류의 위계질서를 반대하였으며 시아파를 거부하였고 여성의 인권을 부정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장기화 되자 전쟁 난민과 고아들이 탈레반 학교(마드라사)에 입교하면서 탈레반의 전사로 훈련받으며 데오반디파의 학교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먼 파슌툰족의 종교 규범인 파슈툰왈리를 토대로 하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테러 조직으로 왜곡되었다(유달승, 2001, 191쪽~192쪽). 탈레반의 이념은 이런 데오반디(Deobandi) 근본주의와 호전적인 이슬람에 기초한 Sharia(샤리아) 이슬람 법에 기초한다. 이것은 파슈튼 부족이 따르는 이슬람 율법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떠난 난민 출신 학생들이 무자헤딘의 도움으로 무장 조직으로 발전한 탈레반은 1994년 10월에 모하메드 오마르가이끄는 ‘탈레반’이 부르하누닌 랍바니(Burhanuddin Rabbani)정권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고 1996년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하여 나지볼라 전 대통령을 공개 처형하였다.

(4) 미 제국 독점자본의 탐욕과 이슬람 전사들의 반미주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사주를 받고 이란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려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에 대한 보상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유전지역까지 공격하였다. 미국의 독점자본가들은 그들의 유전 수급에 차질이 생길까 봐 1990년 8월 사우디아라비아에 다급히 군대를 보냈다. 이것은 이슬람 전사들의 분노를 샀다.

이슬람의 성지가 있는 메카에 외국 군대가 들어 온 일에 와하비즘 전사들은 격노하였고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을 비판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전사들을 불러들여 이라크에 보내 지하드(성전)를 벌일 것을 제안하였다(정의길, 2015, 200쪽~300쪽).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그런 오사마 빈 라덴을 수단으로 쫓아냈다.

그런 과정을 지켜본 오사마 빈 라덴은 걸프전쟁은 미국의 침략이라고 보고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폭파하였다.20)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와하비즘의 선봉에서 지하드 전사들은 오사마 빈 라덴은 알카에다(Al-qaidah)를 조직하여 2001년 미국 본토를 공격하였다. 결국 모순된 미국의 중동 정책으로 인한 무슬림의 불만과 불안, 분노가 반미주의 감정을 생산하였고 그런 누적된 모순이 폭발하였다(Kenneth M. Pollack, 우평균 번역, 2002, 49쪽).

20) 1998년 2월 23일, 런던에서 발행되는 아랍계 신문 《알쿠스 알아랍》은 오사마 빈 라덴이 서명한 「유대교도와 십자군에 대한 성전을 위한 세계 이슬람 전선의 선언」 전문을 게재했다. 이 신문에서 오사마 빈 라덴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를 근거로 “신, 신의 예언자, 그리고 이슬람교도에 대한 미국의 명확한 선전포고”라면서 지하드를 펼치는 것이 이슬람교도 각자의 개인적인 책무라고 주장하였다.

“첫째, 이미 7년 이상 미국군은 이슬람의 아주 성스러운 아라비아 땅을 계속 점령하면서 부를 약탈하고, 예속화시키고, 민중을 모욕하고, 근린 제국을 위협하고, 아라비아반도를 근린의 이슬람의 민중을 공격하기 위한 최전선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강하게 이를 비난한 사람들 덕택으로, 지금은 아라비아 반도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점령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이해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정자들이 자기들의 영토가 이라크 공격을 위해 이용되는 데 반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종을 강요하고 있는 미국은 지금도 이라크 민중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점령의 본질이다.

둘째, 십자군과 유대교도 동맹의 공격에 의해, 이라크 민중은 커다란 상처를 받고, 수백 명이 넘는 생명을 잃었으나 미국은 이 가공할 살육을 다시 되풀이하려 하고 있다. 가혹한 전쟁, 분단과 파괴, 그후의 장기에 걸친 봉쇄 조치에 의해서도 그들은 아직 만족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들은 사람들이 남겨 놓고 있는 물건을 파괴하고, 그런 이슬람 민중의 굴욕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전쟁에서 미국의 목적은 종교적, 경제적인 것이다. 이에 더해 빈약한 유대 국가를 도우는 것도 그 목적이며, 이스라엘에 의한 예루살렘의 점령, 예루살렘에서의 이슬람교도 살해라는 사실에서 사람들의 눈을 멀리하고 있다. 그 증거로, 미국은 이스라엘의 존속을 보장, 아라비아의 땅에서의 십자군에 의한 점령을 영속화하려고 근린 아랍 제국 가운데 최강의 힘을 가진 이라크를 파괴하려고 열심히 시도,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 등의 제국을 분열하여 국력을 약화시켜, 그 지역의 힘을 약화, 분단선을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버나드 루이스, 2002,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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