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4.27시대연구원 부원장의 옥중서신
이정훈 4.27시대연구원 부원장의 옥중서신

 

구속된 지 7개월이 넘었다. 이 서신이 서울구치소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다. 재판은 진행 중이지만 나는 12월 23일 출소한다. 무죄판결로 출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구속 재판’으로 석방된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검찰의 공소제기 6개월 안에 1심 판결을 끝내야 한다. 검찰이 나를 6월 24일에 기소했으므로 12월 23일 안에 1심 판결을 마쳐야 하는데, 재판은 아직도 초반 증거 채택을 진행 중이다.

재판이 길어지고 복잡해지는 이유는 코로나 상황(서울구치소 확진자 계속 발생, 법원의 방역지침)과 공안당국의 짜맞추기 수사논리와 조작된 증거에 기초한 무리한 공소 때문이다. 핵심증거 부재와 너저분한 다수의 정황 증거 제출이 주 원인이다.

사건 발생 때부터 지적했지만, 이 사건은 한마디로 공소장 내용과는 사건의 진실과 실체가 전혀 다른 사건이다.

이 사건은 2017년 박근혜 정부 때 국정원이 수사를 시작해서 문재인 정부로 넘긴 사건이다.

검찰이 제시한 수사기록을 보면, 박근혜 정부 국정원의 초기 수사에서 조작과 관행적 짜맞추기 수사논리가 심하다.

국정원은 현재 3년 유예기간을 두고 경찰(국가수사본부-안보수사국)로 국가보안법 사건을 넘기고 있는 중이다.

아마 이 사건과 ‘청주지역 국가보안법 사건’등이 국정원의 마지막 땡처리 국가보안법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국정원이 상당기간 수사했으나, 처음부터 기소해서는 안 될 사건을 정치적 계기로 무리하게 기소한 사건이라 생각한다.

재판은 예전보다 ‘증거주의’가 강화되어 검찰과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나 진술의 가치는 떨어지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공개 재판 원칙’은 무색할 정도이다.

코로나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법원이 사회적 관심이 높은 사건이라는 이유로 재판의 방청을 추첨을 통해 아주 소수로 제한하고 있다. 그나마 추첨으로 방청한 사람의 절반 가량이 국정원과 경찰 측 사람들이다.

2년 후면 경찰이 국가보안법 수사를 전부 넘겨받기에, 국가수사본부는 이러한 수사가 법정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으며, 경험의 기회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지인들과 찾아오신 방청객이 참석하지 못하는 공판이 많았다.

요즘 구치소나 교도소에는 TV와 신문을 볼 수 있다. 대선관련 토론과 뉴스가 한창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에 대한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선 후보가 아무도 없음을 발견한다.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라의 ‘군사작전지휘권’을 미국에 70년 넘게 넘기고, 한국의 독자적 작전계획조차 없는 한심한 예속 국방에 대해 벙어리처럼 모두 함구하고 한미동맹만 찬양한다. 진정한 평화를 향해 가는 길인 평화협정에 대해, 남북 상생번영의 길인 통일에 대해, 인권 중의 인권인 노동인권과 노동법 전면 개정에 대해,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어느 대선 후보도 얘기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문제는 원래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듯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나는 이 이상한 나라의 선거와 표현의 자유를 ‘국가보안법 체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국가보안법은 말하지 않는다. 기후환경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노동환경과 미국의 약소국에 대한 패악질과 인권유린 만행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은 차별 이상의 차별법이며, 차별보다 심한 합법적 인간증오법이다. 다른 생각과 사상, 다른 제도를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사회구성원과 자기 민족 절반을 증오하고 영구분리를 고무추동하는 우리 시대의 뿌리 깊은 파쇼악법이다.

‘국민의힘’ 같은 적폐세력이나 민주당 같은 개혁 쇼 세력이 이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자.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당이 그 무슨 표를 얻겠다고 보수정당을 따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TV패널로 나온 민주당 선거대책위 전00 의원이라는 자의 한마디가 오늘 나의 머리를 때린다. “한국 사회 표현의 자유는 차고 넘친다”, “표현의 자유를 막는 사례가 있다면 말해달라”고 한다. 그러면 한국 사회와 정부가 보장한 표현의 자유가 차고 넘치는데, 나는 왜 ‘주체사상 에세이’를 저술했다고, ‘북 바로알기 100문 100답’을 썼다고 여기 서울구치소 독방에 앉아있는 것일까?

나는 말한다. 한국 사회 표현의 자유는 헌법 위의 국가보안법 체제 하의 자유라고! 적폐 가짜 표현의 자유는 차고 넘치지만 진짜 사상과 통일을 말할 자유는 없다고!

한국 진보가 국가보안법 체제에 갇혀있다면, 한국 국민대중의 정치의식도 국가보안법 체계를 벗어날 수 없다. 정치의 주인은 국민대중인데 한국 진보가 사상의 자유와 정치적 상상력의 자유를 국민과 함께 쟁취하고 향유하지 못한다면, 한국 정치의 발전과 도약은 요원하리라고 본다.

한국 진보가 외세와 분단 기득권 세력이 틀을 짜고 박아넣은 분단전시체제, 사상억압체제, 국가보안법 체제의 대못을 빼지 못하면 10년이 지나도, 민주노총 200만 시대에도 대중의 정치의식은 비약할 수 없다고 본다.

국가보안법 극복 투쟁은 양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헌법 위에 군림하는 반통일, 반민주, 반민족, 반인권 악법을 넘어서는 사상의 자유 쟁취 운동과 6.15, 4.27판문점 선언에 명시된 남북 정치교류와 통일운동의 자유를 정부에만 맡기지 말고 민간의 힘으로 쟁취하는 운동이다.

또 하나는 국가보안법 자체를 폐기하는 투쟁이다.

한국 민중들의 피어린 투쟁 속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조금식 자리잡고 있지만, 아직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과 성취를 이야기하긴 이르다고 본다. 한국은 국가보안법 체제 하에서 제한적 초보적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통일 번영의 시대는 다가오고 있다. 한국 진보 운동의 또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를 기대해야 할 전환기라고 본다.

다시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며 가을의 결실을 희망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밭을 갈아야 할 것 같다.

다음 주 출소해도 나의 무죄를 위한 법정 투쟁과 국가보안법 폐지와 극복을 위한 투쟁, 사상의 자유와 통일운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저의 석방을 위해 힘쓰신 모든 분들의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2021.12.20.
서울구치소에서
이정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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