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하의 진보의 창(2)

들어가는 말

매번 선거 시기만 다가오면 구체적인 정책 공약을 둘러싸고 논쟁도 진행되지만 큰 틀에서 진보・보수 논쟁으로 시끄럽다. 그런데 진보라는 개념과 경계선이 모호해서 무엇을 ‘진보’라고 규정할지 매우 어렵고 대중들은 헷갈린다. 표를 의식하여 이 자리에 가서는 진보라 하고 저 지역에 가서는 보수라 주장하는 엉망진창 판이다.
정치인들은 진보라는 말을 좋아한다. 진보가 좋긴 좋은가 보다.

2017년 1월 4년 전 대통령 선거 때였다. 유엔 사무총장 출신 반기문은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칭했는데, 이에 대해 가수 이승환이 ‘마른 뚱보’라고 비유하였다. 
이번 선거에서는 집권여당 내에서 진보를 두고 말의 성찬이다. 요란한 진보, 무능한 진보, 유능한 진보라고 표현하며 상대방을 치고받는다. 

나아 갈 진(進) 걸을 보(步).
사전에서 말하는 ‘진보’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진보와 반대되는 정치적 경향으로는 반동, 퇴보, 수구, 보수 등을 말 할 수 있다. 파쇼는 적극적인 반동보수이다.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 영역으로 나누지만, 진보라고 말할 때는 주로 정치에서 나타나는 경향을 표현한다. 진보적, 진보성향 등등으로 불리면 좋아하고 수구보수는 뭔가 모르게 구리고 시대와 민심에 역행하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 중에는 스스로 진보라 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디까지가 진보인가.

진보는 기준은 시대와 민중이 정한다

많은 정치인들이 스스로 진보라 자처하니 진보를 지향하는 수많은 민중들은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진보는 어떤 기준에서 누가 규정하는가. 
진보의 내용과 수준은 시대와 민중이 규정하는 것이다. 
말과 주장은 진보적인데 정치적 행보가 그 반대이면 진보가 아니다. (이를 흔히 입진보라 말한다.) 진보는 추구하는 사회의 가치와 행동을 포함하는 의미이다.
특정 정치 집단과 개별 정치인이 자의대로 규정한다고 진보가 되는 것은 아니며, 집권세력이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보수 정치세력들이 대세를 이루고 진보역량이 약하다고 해서 진보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보수 정치세력들 중 상대적으로 약간 낫다고 해서 진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해당 시기 절대 다수 민중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이다.
계급사회 출현 이후 사회는 매 발전 단계마다 절대다수의 민중들이 있고 지배권력 착취계급이 존재해왔다. 절대 다수의 민중이 노예제 때는 노예, 봉건제 때에는 농노와 소농,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 농민 빈민이다. 착취계급도 노예주, 봉건지주, 자본가 등으로 변화했다.
그동안 민중들은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었음에도 주인으로서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해당 시기 사회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면 진보였다.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로 변화한 것은 진보였다.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제도의 진보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 자체가 진보라 하긴 어렵다. 생산력의 발전이 노동자 민중들에게 득이 될 수도 있고 자본의 착취의 고도화로 작용할 수도 있다.

현 기성정치권은 진보 풍년에다 보수 역시 각양각생 분칠들이다.
합리적・개혁적・새로운 보수・따뜻한 보수・찐 보수…. 
보수란 새로운 것을 반대하고 재래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하는 성향을 말한다.
하지만 이른바 대한민국의 ‘보수’가 지키고자 하는 재래의 전통이란 우리 민족이 자랑하고 보존해야 할 풍습이나 문화가 아니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불평등한 사회구조, 친일에서 친미로 이어지는 예속과 분단구조이다. 보수 중에서 초보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폭력적인 방법을 쓰는 것을 우리는 파쇼정치라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다.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제3지대를 주장하는 정치인들도 있는데, 본질은 보수이다. 3지대란 불가능한 신기루이다.
합리적 보수는 없다. 보수는 어차피 보수이다.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통치방법과 착취방법이 약간 차이 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합리적 보수는 모순이 심화되고 민중들의 투쟁이 발전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어려워지면 언제든지 ‘찐보수’로 넘어가게 된다.

한때의 진보가 영원한 진보는 아니다

김문수, 장기표도 한때는 진보였다
지금은 수구꼴통세력의 대표적인 인사로 여겨지는 김문수와 장기표. 그들도 한때는 쟁쟁한 진보 운동가였다.
김문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대에서 제적된 이후 위장 취업을 하고, 면도날을 만드는 한일공업에서 노조를 만들어 위원장까지 하였다. 이후 ‘서노련’이라는 정치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를 주창하였고, 이재오・장기표와 함께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얼마 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민주노총을 망국7적 가운데 제1적이라 한 장기표 또한 쟁쟁한 진보인사였다. 전태일 열사의 혼이 담긴 청계피복노조사건으로 구속까지 되었던 그가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민주노조를 저격하고 나섰다. 
한때는 노동자 민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그들이 왜 정반대의 편에 서 있는 것일까. 개인의 입신양명과 영달을 위해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로 이념의 한계와 민중의 발전과 능력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아무리 투쟁해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고 패배주의에 빠져 결국 투항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현 집권세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386(586)세대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들을 진보라고 부르기 보다는 기득권 세력, 기성정치인이라 부른다. (심지어는 극우 보수 세력과 같은 발언과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엄혹한 시기 고문과 탄압을 당하고 구속되면서까지 청춘의 바쳐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한 그들이었다. 
하지만 왜 이제는 기득권 세력, 보수 정치인으로 불리는가. 그때는 진보적이었고 선구자적이었지만, 지금은 보통의 민주노조 간부들이 이미 그 정도 수준이다. 아니 그들을 넘기도 한다.
구르는 돌에도 이끼가 끼고 강철에도 녹이 쓸 수 있다.
아무것도 몰랐던 수많은 현장 노동자가 민주노조를 만나 투쟁하고 학습하고 동지를 만나면서 훌륭한 운동가로 성장해 나간다.
날 때부터 진보운동가가 없고 영원한 진보운동가도 없다. 아주 뛰어난 개인도 저절로 훌륭한 진보운동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진보세상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활동과 투쟁, 학습을 통해 그리고 집단적인 조직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수양하고 단련하지 않으면 어느 사이엔가 뒤처지게 되는 것이다. 

진보는 발전법칙이 있다

진보가 발전하는 데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진보를 가늠하는 기준은 높아져 가고 그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대중의 지향과 요구가 높아지고 대중들의 창조적 능력(의식, 조직적 능력)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발전에는 사회 구조적 모순의 심화와 객관적 조건의 변화 발전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진보 세상을 향한 노동자 민중의 지향과 요구가 높아지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의식적 조직적 역량, 투쟁역량의 성장과 역할이다.

지난 시기에는 독재에 반대하면 진보였고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진보였다. 1987년 6월항쟁 시기에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직선제를 쟁취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하는 것이 진보였다. 노동자의 초보적 권리인 민주노조를 결성하는 것 자체가 진보였다.

지금은 다르다. 노동자 민중들은 더 잘살고 더 평등하기를 원하는데, ‘이전 보릿고개 시절을 비교하면 이 정도면 먹고 살만한 것 아니가’라는 것은 꼰대소리 듣기 딱 좋다.
촛불항쟁을 경험한 오늘의 민중들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심한 불평등으로 고통받고, 주권이 없다시피 한 현실을 눈으로 보고 있다. 자주와 평등 사회를 향한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은 보다 활성화되고 발걸음을 날이 갈수록 빨라질 것이다.

진보 운동가들은 민중들이 자각하고 투쟁에 나서고 역사가 발전하는 것을 중심으로 보지 못하고 기성정치권이나 미국과 기득권층의 강대성에만 눈을 돌려 패배주의에 빠지게 된다.
요즈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에서 패배한 것 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세계 유일 패권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세계경제는 파산의 위기에 처해 있다. 
변화하는 정세와 발전하는 민중의 요구를 따라 잡지 못하면 한때의 진보였던 사람도 정체를 넘어 퇴행하고 만다. 
진보진영이 바라는 자주와 평등의 새 사회를 건설하는데서 민중들의 지위와 역할은 저절로 높아지지 않는다. 진보 운동가들의 앞장서서 그 방향으로 투쟁을 추동하여야 한다. 지난 어떤 시기보다 많은 것들이 진보운동가들 두 어깨에 달려 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진보는 자주와 평등, 민중 주체이다

청년 실업, 부동산 집값, 비정규직, 사드, 전쟁훈련, 주한미군….  
절대 다수 노동자 민중들을 고통에 빠트리고 주권을 유린하며 전쟁의 위기로 빠트리는 모든 상황의 근본 원인은 불평등과 주권 상실이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진보는 자주와 평등, 민중 주체이다. 
올바른 정치는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노동자민중이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다. 평등이다.
제대로 된 정치는 주권을 지키며 우리 민족끼리 손잡고 분단과 전쟁이 아닌 통일과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자주이다.

자주와 평등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민중이 주체가 되는 직접정치이다.
자주와 평등은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 노동자 민중의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 실현된다. 노동자 민중을 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전 정치에서는 도둑질 안하고 청렴하고 지역구민의 요구 수렴 잘하고 민원 잘 해결해 주면 진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식의 장래를 진정 생각하는 부모는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 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했다. 대중을 위하는 실천에서 대중 스스로 힘 있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중을 최고로 위하는 길이다. 또 노동자 민중들의 힘이 강해져야만 자주의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 민중의 힘이 성장할 수 있도록 민주노조를 장려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을 하는 것이 진보정치이다. 진보 역량의 성장과 투쟁을 가로막고 심지어 탄압하면서 진보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진보정치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K-불평등을 외면하고 재벌의 편에 서고, 미국의 눈치를 보며 민족의 자주를 포기하는 것 역시 진보와 아무 인연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현 집권세력은 진보 정치세력이 아니다.

대중의 지위와 역할은 저절로 높아지지 않는다. 진보 운동가들의 앞장서서 추동하여야 한다. 지난 어떤 시기보다 많은 것들이 진보운동가들 두 어깨에 달려 있다.
조건은 성숙되어 가고 투쟁은 활성화되고 있다. 
자주와 평등, 민중주체 역량 강화라는 진보의 기치를 들고 부단히 역량을 강화시켜 나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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