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의 대차대조표

이렇게 길고, 전문적 용어가 많은 정상회담 합의문이 있었던가 싶다. 그만큼 정상회담의 의제가 많았고, 새로운 의제도 다수 포함되었다. 누구의 의사가 더 많이 반영되었는가, 누구에게 더 유리한 합의인가 평가하기에도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봤다.

이번 공동성명은 크게 “한미동맹의 새로운 장을 열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포괄적 협력”이라는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전자의 파트를 “안보공약”, “평화 프로세스”, “지역 안정”으로 세분화했으며, 후자의 파트를 “미래가치”로 분류했다.

수혜국의 선정은 해당 이슈에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고, 다른 합의내용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은, 오직 객관적으로 해당 합의 내용이 어느 쪽에 더 이익이 되는가 여부로만 판단했다.

정상회담의 대차대조표 : 양적 평가

전체 28개의 합의(합의사항을 담고 있는 문장은 어림잡아 40개가 넘지만 28개로 논의를 국한한다) 중 한국에게 이익이 되는 합의는 8개이며, 미국에 이익이 되는 합의는 10개이다. 한국과 미국의 국력 차이, 급한 쪽은 한국이고 느긋한 쪽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8:10의 성적은 그렇게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부 주제로 들어가면 평가가 약간 달라진다. 우선 ‘안보 공약’의 경우 2:2로 대등한 합의를 했다. 1과 2가 교환되었고, 3과 4가 교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화 프로세스’의 경우는 4:3으로 약간의 흑자를 보았다. 한국 정부가 역점을 두었던 주제였다는 점에서, ‘성공적 회담’이라고 하기엔 좀 초라한 성적이다.

‘지역의 안정’으로 안정으로 가면 0:4로 미국이 완벽한 흑자를 보았다.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구상을 연계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신남방정책을 굳이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계할 이유가 없다. 이에 반해 미국은 자신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우리 정부의 신남방정책을 연계시킴으로써 어떻게든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을 끌어들여야 했다. ‘남중국해 등에서 항해의 자유’는 미국이 냉전 해체 이후 30년 동안 구사해왔던 레파토리였다. ‘대만 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역시 미국이 양안관계에서 대만을 지지하는 데서 써먹던 위한 고전적 레파토리다. ‘쿼드’를 지역 다자주의의 하나로 인정함으로써 미국이 쿼드 참여를 종용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미래 가치’ 영역은 말 그대로 미래를 위한 투자 성격을 갖고 있어서 2:1이라는 수치상의 우세는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백신 협력을 끌어낸 것은 현재의 코로나 상황을 고려하면 분명 큰 성과이고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대목이다.

대차대조표에 따르면 이번 회담은 우리 정부가 평화 프로세스, 백신, 미사일 주권 등에서 미국의 양보를 끌어냈고, 미국 정부가 쿼드를 포함한 인도태평양 전략, 양안 문제 등에서 한국의 양보를 끌어 낸 회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불안정한 요소가 있지만, 양적 평가에서는 비교적 균형적인 회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질적 평가: 추상적 이익과 명료한 손실

그러나 질적 평가로 넘어간다면 평가는 달라진다. 우선 우리 측이 수혜를 보는 영역을 살펴보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라는 수사보다는 다소 진전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완전한 비핵화’를 한미 양국이 합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평화 프로세스의 재가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평화 프로세스가 중단되었던 하노이 회담에서도 한미 양국은 완전한 비핵화에서 공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확인 역시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의 동력이 되기는 어렵다. 한미 양국이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거부해서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남북 대화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 역시 ‘성과’로 보기 힘들다. 언제 한 번 미국이 남북 대화를 반대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한 적이 있던가. “남북 관계가 한반도 비핵화와 속도를 같이 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남북 대화 속도 조절을 요구해 왔을 뿐이다. 미국이 대북 제재와 유엔사를 내세워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에 개입할 때도 남북 대화는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우리에게 ‘이익’으로 평가되는 합의들은 대개 추상적이거나 원론적인 것들이다. ‘말공약’의 성격이 농후하다. 오직 하나 명확하고 구체적인 ‘수혜’는 ‘미사일 지침 종료’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미국 측이 수혜를 보는 영역은 어떤가.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에 전작권 환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은 ‘조건’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워 반대함으로써 문재인 정부의 전작권 환수는 좌절되었다. 유엔안보리 결의 완전 이행은 대북 제재의 유지와 강화를 의미한다. 대북 제재는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의 발목을 잡는 핵심 장치였다. 한미 양국의 대북 정책 완전 일치는 어떤가. 그 명분으로 출범한 한미워킹그룹회의는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방북조차 불허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미국측에 ‘이익’으로 평가되는 합의들은 우리 정부가 빼도 박도 못할 만큼 구체적이고 명료하다. 다만 ‘지역 안정’의 영역에서 미국이 받는 수혜 역시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표현들이 많다. 이는 최근 미국이 주도하여 등장하는 이슈들이다. 과거 미사일 방어 체계, 사드 배치 등 새롭게 등장하는 이슈가 추상적 논의에서 구체적 실행으로 넘겨졌던 사례를 비춰보면 ‘지역 안정’에서의 추상적 합의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구체적 실행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이번 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는 그런 단서를 제공했다.

평화프로세스 재가동을 위해 문재인 정부가 정작 해야 할 일

한미 정상회담을 성공 시켜 북미 대화를 재개한다는 구상은 비현실적이다. 이미 미국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도 세 차례 북한에 대화를 제의했지만, 북한이 대화를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한미 정상회담이 북미 대화를 재개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한미 정상회담이 북미 대화를 재개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의 대북 접근법을 완전히 바꾸는 것뿐이다. 대북 제재를 완전히 종료하지는 못하더라도 대북 제재를 완화하고,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해 한미 군사연습은 잠정 중단한다는 합의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막 출범한 바이든 정부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그러한 ‘결단’을 내릴 것이라는 기대는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를 축으로 하여 가동된다. 그 한 축인 북미 대화는 북한과 미국의 문제이다. 이는 우리 정부가 개입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만약 개입하려고 했으면 하노이 회담 전에 해야 했다.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제 문재인 정부가 평화 프로세스를 가동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북 대화라는 또 하나의 축을 가동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초 남북 대화를 북미 하노이 회담 이후로 미뤄버리는 결정적 실책을 범했다. 한미 정상회담으로 북미 대화를 끌어내고 그 후 남북 대화를 재개한다는 것은 지난 실책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018년 남북 대화는 북미 대화 이전에 열렸다. 한미 군사연습을 연기함으로써 남북 대화가 열릴 수 있다. 현시점에서 남북 대화를 재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미 군사연습을 연기 혹은 중단하는 것이다.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연기 혹은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길밖에 없다.

선택의 결과는 성과 외에 후과도 따른다. 후과가 없는 성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과를 두려워하면 성과는 낼 수 없다. 평화 프로세스라는 성과를 내고 싶다면 후과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문재인 정부에 지금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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