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 운동 (2) 화를 복으로

2020년 10월 19일부터 2021년 1월 27일까지 100일 동안 이룩한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찬반 부산시 주민투표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의 놀라운 기록을 연재한다. [편집자]

(1) 대중 자신의 운동으로
(2) 화를 복으로
(3) 세균전부대와 선거

서명이 안 될 이유로 가득 차보이던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주민투표 서명’은 알고 보니 15만 목표가 달성될 가능성들로 넘쳐났다.

비대면의 반전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연말연시 모든 모임은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부산 19만 서명자 중 온라인 서명자는 겨우 4만인데 비해, 15만 명이 서명용지에 직접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서명운동 과정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반한 걸까. 아니다. 비대면 서명은 곧 온라인 서명이라는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버리고 화를 복으로 전환했기에 가능했다.

부산식 비대면 서명은 시민의 자발성에 의거하는 방법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서명 캠페인을 보고, 직장 동료에게 또 세균실험실 이야기를 듣고, 퇴근 후 집에서 아파트자치회장의 서명호소 방송까지 듣게 된 부산시민. 이들의 마음속에 코로나19보다 몇 백 배 더 위험한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여부는 반드시 주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이때쯤 아파트 우편함에 놓인 서명용지를 발견하게 된 부산시민은 자진해서 서명에 참여하고 이웃에도 권유한다.

자발성이 모이면 창조성이 폭발하기 마련. 아파트관리비 통지서가 나올 때 서명용지를 함께 넣어 전 세대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먼저 서명한 입주민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손편지로 서명을 호소하는 감동적인 장면도 연출했다.

결국 코로나19는 서명 방해 요인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세균의 위험성이 더 부각됨으로써 서명 촉진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반전이 일어난 데는 “코로나 비대면 때문에 서명이 어려울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에 위축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반드시 서명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추진위’의 강력한 의지와 부산시민의 창조적인 지혜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만약 비대면 서명을 한다고 ‘온라인 서명’에만 매달렸다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무시하고 서명용지를 시민들에게 마구 들이댔더라면? 19만 명은 고사하고 5만 명도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미자주의 승리

세균실험실이 위치한 부산항 8부두 인근 남구 주민들은 물론이고 과거 하야리아 부대 미군의 횡포와 범죄를 경험했던 부산시민들 사이엔 자주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부산항에 세균실험실은 존재하지 않고, 세균실험을 한 적 없다”는 주한미군 측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 났을 때 부산시민의 분노는 폭발했다.

특히 서명운동을 준비하던 지난해 8월 부산항 세균실험실에서 비상사이렌이 울렸는데 “혹시 맹독성 세균이 유출된 것 아니냐”는 주민들의 질문에 주한미군 측은 “사이렌이 왜 울렸는지 모른다”라는 답답한 소리만 되풀이했다.

이에 조사단이 세균전부대에 들어가려 했으나, 치외법권 지역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실제 모든 주한미군 기지는 영토 관할권을 미군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맹독성 세균을 아무런 통관 검역 없이 마음대로 들여올 수 있다.

“미군 세균실험을 미국 땅에서 하지 않고 왜 한국에서 하냐?”는 질문에 미군 측은 “세균 실험을 하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데, 한국은 호의적인(friendly) 나라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산시민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다.

이처럼 부산시민들 사이에 오랫동안 내재된 반미 자주의식은 서명운동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명운동 초반 “주한미군과 관련된 매우 정치적인 사안이라 서명이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추진위 사무실로 주민번호 앞자리가 ‘19’로 시작하는 서명용지가 배달되었다. 처음엔 잘 못 표기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분명 1919년 기미년 3.1운동 당시에 태어나신 올해 103세 할아버지의 서명이었다.

일제강점기 수난의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곧바로 미군정이 시작되고, 대규모 미군이 밀려들어 전쟁이 발발하고, 휴전협정을 체결한 미군이 70년 세월 이 땅에 주둔하며 어떤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아온 그 할아버지가 한자 한자 또박또박 써내려간 자신과 28년생 부인의 이름은 외세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의식의 결정체가 아닐까.

귀인이 귀인을 알아본다

1700명에 달하는 수임인 이외에도 서명을 받아 온 수많은 귀인들이 출현했다.

아파트 입주민 한 세대도 빠짐없이 모두 받아온 귀인, 서명용지에 1만원 지폐를 동봉한 귀인, 퇴근 후 서명 캠페인에 한 달 내내 나와 준 귀인, 아파트에 서명용지 수거 기간이 끝나자 일주일 넘게 속주머니에 품고 다니다 캠페인 중인 수임인에게 보풀이 인 서명용지를 전달한 귀인, 등등. 감동적인 귀인의 출현을 지면 관계상 죄다 소개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 귀인 보러가기

부산에 이처럼 귀인이 속출한 이유는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헌신한 추진위와 수임인의 노고가 부산시민의 마음에 가 닿았기 때문이다.

늦은 밤까지 활동한 수임인들은 매일 하루활동 보고서를 자정 전에 작성해 서명운동 상황실에 보고하고, 밤새 그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은 상황실 관계자들은 매일 아침 8시 조례에서 수임인의 활동에서 제기된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다.

청년돌격대가 뒤쳐진 지역에 달려가 서명 목표를 채워주고, 노조 간부들이 현장에 들어가 전 조합원 서명을 받아내는 굵직한 성과를 이뤄내 힘을 보탰다.

추진위는 서명운동에 힘을 주고 공적이 많은 부산시민을 귀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부산시민에게 추진위와 수임인들이야 말로 진정한 귀인이다. 부산시민과 추진위, 그리고 수임인들이 서로가 서로를 귀인으로 생각한 것이다.

세균실험실 폐쇄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명에 참여한 197,747명 모두가 어쩌면 귀인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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