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 운동 (1) 대중 자신의 운동으로

2020년 10월 19일부터 2021년 1월 27일까지 100일 동안 이룩한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찬반 부산시 주민투표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의 놀라운 기록을 연재한다. [편집자]

(1) 대중 자신의 운동으로
(2) 귀인과 함께
(3) 세균전부대와 선거

▲지난 2월5일 19,747명의 서명용지를 부산시에 전달하는 추진위.
▲지난 2월5일 19,747명의 서명용지를 부산시에 전달하는 추진위.

부산항에 위치한 주한미군의 세균실험실 폐쇄 여부를 주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서명이 안 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부산은 해냈다. 목표 15만을 훌쩍 넘겨 부산시민 197,747명이 서명했다.

서명이 안 될 이유를 꼽으면?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격상, ▲최강 한파로 야외 활동 제한, ▲재난지원금 같은 눈앞의 실익이 아닌 매우 정치적인 사안, ▲주민번호 앞자리, 상세주소, 휴대폰번호까지 기록, ▲서명한다고 세균실험실이 당장 없어질 것도 아님, 등등.

세대수 보다 많고, 조합원 수보다 많은 서명

이처럼 차고 넘치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에서, 직장에서, 대학에서, 산에서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서명 폭탄이 터졌다.

부산 남구의 780세대 아파트에선 세대수 보다 많은 860명이 서명했고, 부산 전역 347개 아파트 단지에서 44,456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전태일3법 국회청원 서명에 1만7천 명이 참여했던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는 2배가 넘는 41,733명의 조합원이 서명에 동참했다. 어떤 노조는 비조합원까지 서명에 참여해 조합원 수를 넘겨버리기도 했다.

미장원, 동네 슈퍼마켓, 단골 식당 등 부산시민의 일상에 서명용지가 따라 다녔다. 주말엔 금정산 정상에 까지 서명 가판대가 펼쳐졌다.

시련과 난관 앞에서

그렇다고 100일이나 되는 대장정 기간 시련과 난관이 없을 리 만무하다.

서명 개시 2개월이 지난 12월 19일, 서명자는 3만 명에도 못 미쳤다. 이대로 남은 한 달을 보내면 서명 목표 15만 명은 고사하고 5만 명에도 이르지 못한다.

1천7백 명 수임인(서명 받을 법적 권한이 부여된 사람) 중에 100명 넘게 서명 받은 수임인이 있는가하면 1명도 받지 못한 수임인도 있었다.

지레 겁을 먹고 목표를 하향 조정하려는 소극성과 15만이라는 목표에 걸맞는 창조적인 방안을 연구하기보다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는 보수주의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이런 완만한 증가 폭이면 분명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음에도 속도를 높이자는 요청은 제기되지 않았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식이었다.

특단의 조치

이때 ‘추진위’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우선 주한미군 세균실험실은 서명하기 부담스러운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 부산시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된 문제임으로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시민 곁에 다가갈 것을 주문했다.

▲최악의 한파를 뚫고 금정산에 오르는 대학생 수임인(청년돌격대)
▲최악의 한파를 뚫고 금정산에 오르는 대학생 수임인(청년돌격대)

추진위는 단순히 주문에만 그치지 않고 영하 12도라는 최악의 한파를 뚫고 금정산에 올라 서명 목표를 넘쳐 수행하는 대학생 수임인(청년돌격대)의 모범을 소개하고, ‘크리스마스의 기적’(12월 24일 하루만에 1만 목표 서명)을 통해 집단적 기세를 더 높였다.

아울러 사적 공간으로 범접할 생각조차 못했던 아파트를 최대 서명 지대로 만든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세균실험실이 보이는 남구 감만동 어느 아파트에서 진행된 ‘아파트자치회장 명의의 서명 운동’을 부산 전역으로 확대, 관내 347개 아파트 단지 모든 관리사무소에 서명운동 동참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한 것.

공문을 접수한 아파트자치회는 서명운동 동참여부를 협의했고, 다수의 아파트에서 자진해서 서명을 받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왜 우리 아파트에선 서명을 안 받느냐”는 항의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열기가 짐작되고도 남는다.

공무원노조와 건설노동자들이 민주노총 선거를 활용해 투표와 서명을 동시에 실시함으로써 노동자는 노동현안에만 관심있다는 기존 관념을 깨버렸고, 이 기세를 몰아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조합원 최다 서명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부산시민 자신의 운동으로

대중사업이나 대중투쟁은 본래 대중 자신의 운동이다. 부산시민 스스로 세균실험실의 위험성을 주변에게 알리고, 시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서명을 받아와야 비로소 대중적 서명운동이 될 수 있다. 이번 부산 서명운동은 이런 대중운동 원리가 그대로 구현되었다.

주민투표 요구 서명운동이 대중운동으로 되는 데 있어 부산MBC의 연속보도가 큰 역할을 했다. 공영방송에서 세균실험실의 위험성을 알리고, 주한미군의 반복된 거짓말이 폭로되자, 긴가민가하던 부산시민들은 MBC 보도를 돌려보며 서서히 확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민의 입에서 입으로, 시민의 손에서 손으로 서명은 이어졌다.

아파트자치회 명의로 서명 받는 데 항의하는 주민에게 관리소장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서명운동의 의의를 해설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치위원장이 아파트 방송으로 서명을 호소했다.

단골손님이 끊기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식당에서 대놓고 서명을 받고, 실시간 서명 수와 호소문을 적은 대자보를 가게 앞에 붙이고, 친인척과 지인에게 서명용지를 담은 편지를 남몰래 보냈다.

자꾸 보고 여러 번 들으면 마음이 동한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서명 캠페인을 보고, 직장에서 동료에게 또 세균실험실 이야기를 듣고, 퇴근길 엘리베이터 안에 놓인 서명용지를 만나게 된 부산시민.

이들에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서명운동의 방해 요인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세균실험실이 부산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위험성만 부각했을 뿐.

이들에게 주한미군 시설이라는 정치적 고려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균실험실을 무단으로 설치해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 주한미군을 달리 보는 계기였을 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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