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드는 의문 (3)
해방된 땅에 외세가 또 우리를 통치한다는데 누가 찬성(찬탁)하겠는가? 그래서 ‘신탁통치’란 말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반대(반탁)하게 된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의외로 찬반 논쟁이 격렬했다.
38선 이남의 여운형, 김규식, 김원봉 그리고 송진우 등은 찬탁, 이승만, 김성수 등은 반탁 대열에 섰다. 반탁에 앞장섰던 김구는 ‘송진우 암살 사건’ 이후 미군정을 반대하진 않는다며 한발 물러섰다. 38선 이북은 대부분 찬탁이었다.
간단해 보이는 문제가 이처럼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

이승만이 찬탁에서 반탁으로 돌아선 까닭
신탁통치는 미국의 제안으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미·소·영 외무장관) 회의에서 제안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군정 신탁통치 10년’을 제안했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거부되고 “한반도를 조속히 독립시키기 위해 임시민주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지원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두고, 5년 내에 한반도를 자주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해 4개국의 승인을 거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자신의 안을 관철하지 못한 번스 미 국무장관을 징계하고, 그 안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3상회의를 파탄낼 방안을 강구한다.
같이 한 합의를 대놓고 반대할 수 없게된 미국은 반탁 여론을 조작한다. 이렇게 발생한 사건이 바로 ‘동아일보 오보사건’이다.
‘동아일보 오보사건’이란?
3상회의 결정 사항의 공식 발표는 12월 28일이었으나, 미국은 25일 AP 통신에 워싱턴발 가짜 정보를 흘렸다. 26일 동아일보는 이 속보를 대서특필했다.
미국이 흘린 가짜 정보는 “소련이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었다.

이 뉴스가 보도되자 좌우 가리지 않고 3상회의 무효를 주장하는 반탁 여론이 불붙었다.
뒤늦게 소련을 통해 가짜 뉴스를 확인하고 다수가 찬탁으로 돌아섰지만, 이미 찬탁론자들은 민족을 배신한 좌파 빨갱이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 때 철저한 친미파 이승만은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찬성하다가 돌연 반탁으로 돌아서 친미반소 세력을 결집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좌파는 찬탁이고 우파는 반탁이었을까?
한반도를 아시아 침략의 전초기지로 생각한 미국은 38°선을 분할 할 때부터 군정에 의한 신탁통치 구상을 무르익혀왔다.
해방 후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을 최초로 국내에 전한 것은 1945년 10월 23일 매일신보였다. 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말을 인용한 기사로, 당시 좌익과 우익 모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오보 사건’ 이후 소련을 따르는 좌파는 찬탁, 미국을 따르는 우파는 반탁이라는 식으로 국론은 분열했다.
하지만 중도우파인 김규식을 비롯한 정통 우파 송진우 등 이승만의 반탁 몰이를 거부한 우파 찬탁론자도 대거 등장했다.
‘찬탁 좌파, 반탁 우파’ 논리는 실상 이승만의 친미세력 결집용이자 정적 제거용에 지나지 않았다.

'반탁'을 부추겨 '찬탁'을 관철한 미국
반탁 주장이 거세지자 소련은 ‘10년 군정통치’를 제안한 미국의 초안을 공개해 여론 호도를 막는 한편 3상회의에서 합의한 대로 임시민주정부 구성에 박차를 가한다.
뒤로 반탁 여론을 흘려 3상회의 합의를 파탄 내려던 미국은 결국 1946년 3월 26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에 아놀드 소장을 수석대표로 보내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3상회의 합의 파행 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은 임시민주정부 구성을 두고 억지를 부렸다. 임시민주정부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구성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고 반탁 대열에 선 단체나 인사가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기초적인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승만, 김성수 등 소련에 대항해 미국의 이익을 챙겨줄 반탁인사의 임시정부 참여를 고집하면서, 대표적인 민주단체인 회원 60만의 전평, 80만의 조선부녀동맹, 65만의 조선청년동맹, 300만의 전농 등은 제외했다.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대로 한반도에 임시 민주정부가 수립되어야 38선을 철폐하는 등 남북 통합을 논의할 수 있다는 합리적 입장을 견지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소련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이 38선 이남에만 단독선거(1948.5.10.)를 실시함으로써 완전히 파탄 나고 말았다.
광복 7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다. 반복된 강요로 굳어지고 엉켜버린 진실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몇 가지 질문에 답해 본다. [편집자]
[연재] 광복절에 드는 3가지 의문
(1) 일본은 왜 8월15일에 항복했나?
(2) 38°선을 왜 한반도에 그었나?
(3) 나라면 ‘찬탁’일까, ‘반탁’일까?
(4) 미군점령, 일본군 무장해제가 목적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