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드는 3가지 의문 (1)

광복절에 드는 3가지 의문

광복 75,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다. 반복된 강요로 굳어져버린 사색의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3가지 질문에 답해 본다. [편집자]

(1) 일본은 왜 8월15일에 항복했나?

(2) 38°선을 왜 한반도에 그었나?

(3) 나라면 ‘찬탁’일까, ‘반탁’일까?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날을 우리는 광복절로 기념한다.

일제가 항복한 이유는 8월 6일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제는 원폭 투하 전인 7월 11일 미국에, 7월 13일 소련에 이미 항복할 뜻을 전했다.

7월 26일, 회담 중에 발표한 포츠담선언은 일본의 이런 항복 의사가 반영돼있다.

그렇다면 이미 항복한 일본에 미국은 왜 원폭을 투하했을까? 또한 일본은 항복한다는 공식 발표를 왜 8월 15일에 했을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이유

미국은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패망을 전후한 일련의 기록은 미국의 주장을 부정한다.

1945년 4월 5일 일본은 도조 히데키가 해임되고 스즈키 간타로가 수상에 올라 종전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일본의 종전 의지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일본군을 계속 섬멸한다.

6월 23일 오키나와가 점령되자 일본은 마지막 남은 전의를 상실한다.

7월 11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할 테니 천황제만 인정해 달라고 미국에 간청한다.

7월 13일 간타로 일본 수상은 종전을 선언하는 천황의 친서를 소련에 전하겠다고 공식 제안한다.

종전을 논의한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미국과 영국에 일본의 종전 의사를 전달하고, 7월 26일 회담 중에 일본의 무장 해제를 결의한 ‘포츠담선언’을 발표한다.

일본의 항복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미국이 군사 기지도 아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이유가 ‘전쟁 조기 종식’을 위해서라는 미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원폭 투하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미국은 1954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은 1954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탈리아에 이어 1945년 5월 8일 독일까지 소련에 항복하자, 2차 세계대전 전범국 중 이제 일본만 남았다.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 항복 3개월 후 일본 공격에 참여하기로 양해를 얻었던 소련은 이제 일본군 무장 해제에 뛰어들었다.

한편 일본마저 소련에 항복할 경우 전후 세계 질서가 소련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을 경계한 미국은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였다.

독일 항복 후 두 달여가 지난 7월 17일, 포츠담회담(1945.7.17~8.2)에 참석하러 가던 트루먼 미 대통령은 전날 뉴멕시코에서 한 핵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트루먼은 이 무기를 일본에 사용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처칠 영국 수상과 먼저 합의한 다음 7월 25일에야 스탈린 소련 서기장에게 이 무기의 존재를 밝혔다. 이튿날 미국은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를 언급하며 일본의 무장해제를 통첩한 ‘포츠담선언’을 발표한다.

아무리 굉장한 무기가 있더라도 실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가치가 제한된다. 일본이 항복을 공식 발표하기 전에 투하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를 일이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해 20여만 명의 민간인을 살상하고 약 100만 명에게 방사능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그 위력을 과시했다.

원자폭탄 투하로 미국은 전후 처리 협상에서 소련의 지위를 위협했고,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 38°선을 베트남에 16°선을 그어 국공내전 중이던 중국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군 전함 미주리호 위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
▲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군 전함 미주리호 위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

일본이 항복 발표를 8월 15일에 한 이유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 8일 소련의 선전포고, 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에 이어 10일 일본정부가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연합국에 통보했다. 단 하나 ‘천황의 통치권 계속’이라는 양해사항을 붙였다.

11일 번스 미 국방장관이 연합 4국을 대표해 일본에 답신했고, 일본 정부는 14일 항복 통보로 답했다. 그 사흘 동안 양측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이 사흘 동안 일본은 마지막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항복은 결정되었으나 언제 어떻게 항복하느냐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득실이 크게 달라질 상황이었다.

답신을 받아놓고 일본 지도자들이 미국과 흥정에 나서지 않았다면 직무유기다.

가장 큰 흥정 품목은 항복 시점이었다. 소련이 지분을 키우기 전에 서둘러 항복하는 것.
-김기협 ‘해방 일기’ 중에서

김기협 박사의 분석은 정확했다. 전후 미국은 일본에 천황제 유지를 보장했고, 731부대 세균전 비밀자료 등을 받고 전범재판에서 이들을 면제했다. 미국은 아시아 침략 전초기지 육성을 명분으로 전범기업들을 전폭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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