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마광수는 대학교수·작가·시인·수필가·문학평론가·소설가다. 그는 1951년 4월 서울에서 태어나 청계초등학교와 대광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현대문학>에 ‘배꼽에’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고,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1983년 ‘윤동주 연구’로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를 역임(1979-1983)했고, 연세대 문과대 국문학과 교수(1984-1995, 1998-현재)로 있다.

그는 다수의 문학이론·비평서, 시집, 에세이집은 물론 소설을 펴냈다. 그 중에서 1989년 장편 소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언론의 혹평을 받았고, <즐거운 사라>로 필화를 겪고 구속, 해직되는 등 고초를 겪는다. 마광수는 자신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누리집 ‘광마클럽’(http://www.makwangsoo.com/)을 운영하고 있다. 

4. 문학으로 법 읽기, 법으로 문학 읽기 2

▲ 마광수 작 '자화상'

도덕적 엄숙주의는 우리 사회 기득권 지배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이 <사라>를 판금조치하고, 또 저자인 마광수를 구속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한결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이 “청소년들의 가치관을 혼란시키며, 성의 타락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인 손봉호의 견해는 이러한 입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문학작품이라도 그 외설적인 내용은 독자의 성욕을 자극하고, 자제능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을 성범죄로 이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강간이 범해지고 있다. 그 반 이상이 10대에 의하여 저질러진다. 금년에도 성범죄는 19%나 증가했다. 그리고 에이즈 보균자 상당수는 자신이 감염된 줄도 모르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한다. 어떤 예술도 청소년들의 성욕을 자극할 권리가 없다.”(동아일보, 1992.11.7)

손봉호의 “<사라> 때문에 청소년의 성범죄가 늘어난다”는 주장에 대해 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종혁 교수는 “마광수 교수의 도전과 수난”이란 글에서 ‘의사(疑似) 인과관계의 논리’라며 비난했다. 그에 따르면, 마광수의 <사라>와 청소년의 비행이란 두 가지 사회현상 사이의 상관관계는 아이스크림의 판매량과 교통사고 양의 증가 사이의 상관관계처럼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손봉호를 비롯한 일단의 사람들이 <사라>와 청소년의 성범죄 사이의 상관관계를 핵심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반지성적, 반문화적 오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논의들을 볼 때, 마광수가 구속된 것은 명목상으로는 소설 <사라>라는 ‘음란물 제조’지만, 작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마광수 ‘교수’라는 개인의 행동과 글에 대한 우리 사회 기득권 지배층의 반감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 마광수 작 '권태는 변태를 낳고...'

실제 1992년 12월3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첫 공판에서 이 사건을 담당한 석호철 판사마저 “피고는 이 책을 딸에게 읽힐 수 있느냐”, “피고인이 교수가 아니었다면 책이 팔렸으리라고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냉정한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할 법관조차도 개인의 도덕적 가치에 의거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판단태도는 1심과 2심은 물론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대법원은 <사라>의 음란성 유무에 대해 판단하면서, ‘음란한 문서(음란물)’에 대해 이렇게 판시하고 있다.

“음란한 문서(음란물)라 함은,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에 비추어 그것이 공연히 성욕을 흥분 또는 자극시키고, 또한 보통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고,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판결에서 사용되는 있는 표현을 살펴보면, 법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온통 ‘주관적·도덕적’ 판단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판결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건전한 사회통념’, ‘공연히 성욕을 흥분 또는 자극’, ‘보통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 등의 표현을 그 전형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문학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마광수는 <사라>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이미 자신의 문학관을 시와 소설, 논문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밝혀왔다. 어느 인터뷰에서 마광수는 자신의 성묘사는 도덕주의자의 눈에는 ‘음란’하지만, 자신의 말하는 ‘야(野)하다’라는 단어는 자신의 성묘사가 나름의 인생관이나 예술관에 근거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지금까지 줄곧 얘기해온 ‘야한 사람’의 요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겉 다르고 속 다른 허위의식이나 위선에 빠지지 않고 안팎으로 솔직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강조해온 ‘야한 정신’은 정신보다는 육체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국수주의보다는 세계적인 보편성에, 집단보다는 개인에, 관념보다는 감성에, 명분보다는 실리에, 교조주의보다는 다원주의에 가치를 두는 세계관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런 세계관으로의 변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의식의 변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대한 평가는 독자 개인의 몫일뿐 사법당국에 의한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마광수는 <사라>를 통해 평소 자신이 주장하는 성애론을 문학작품으로 구상하고, 밝힘으로써 도덕적 엄숙주의가 지배하는 기성의 가치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실제로 마광수의 <사라>는 성애(性愛)에 대한 담론뿐 아니라 문학작품의 외설(음란성) 여부에 대해 많은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 마광수 작 '그래도 사라는 즐겁다'

이에 대해 장정일은, “(<사라>를 통해 야기된) 그 ‘즐거운 혼란’은… 한국 문학사에서 희귀하고 소중한 예에 속한다”며 <사라>가 가져온 사회적 혼란을 오히려 ‘즐거운 혼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그는 “저자의 ‘야한 정신’을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이 책은,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부교재로 쓸 만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야한 정신’의 요체는, 이 사회에 만연한 겉 다르고 속 다른 허위 의식이나 위선에 빠지지 않고 안팎으로 솔직한 사람을 기르는 데 있기 때문인데, 저자의 ‘야한 정신’은 정신보다 육체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국수주의보다는 세계적인 보편성에, 집단보다는 개인에, 관념보다는 감성에, 명분보다는 실리에, 교조주의보다는 다원주의에 가치를 둔다. 그는 스스로 합리성의 옹호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합리성’이란?: ”결정론에 대한 저항이지요“(p.161). 그러니 ‘야한 여자’를 성에 헤프고 사치한 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용어가 여성의 성도구화를 부추기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여성을 위한 ‘야한 남자’의 필요성도 역설하니까.”

어쩌면 장정일은 마광수의 성애론보다 한 발 앞서나간다. 그는 아예 ‘야한 정신’의 요체는 ‘야한 여자’가 아니라 ‘야한 남자’라고 주장하며 마광수를 옹호한다. 그러면서도 장정일은 <사라>에 대한 사회적 혼란을 이유로 사법당국에 의한 법적 판단에 대해 강한 어조로 경고한다.

“예술작품을 법률적 잣대로 평가하려는 태도는 우리 사회 예술의 장래가 여전히 공권력에 의해 좌우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공포를 심어준다.”

▲ 마광수 작 '그대와 탱고를'

장정일의 우려는 단순히 기우가 아니었다. 후일 그는 자신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필화를 겪는다. 그는, “이 책은 마광수에 대한 모든 오해를 푼다. 그리고 <사라>를 둘러싸고 마광수를 욕해댄 필자들이 모두 개새끼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라며, 예술(혹은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내세우는 위정자와 문학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에게 문학작품인 <사라>는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마광수의 문학 세계는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도덕적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장정일은 ‘솔직해지자’며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마광수를 옹호한다.

“청컨대, 마광수를 미워하지 말자. 그가 가진 ‘솔직성’은 우리 가운데 들어 있는 약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속에 숨어 있는 또 인간이 개발해야 할 선한 부분이다. 때문에 그를 박해해서도 안 된다. 이념과 철학이 붕괴된 시대에 그것은(‘솔직성’)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는 빛과 소금이다.”

나이와 지위에 걸맞는 처신을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이 사회의 엄숙한 도덕률이자 정언명령이 되어 버린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야한 사람’이 되고, ‘야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국가권력과 자본이 결탁하여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즐거운 사라’가 되어 ‘즐거운 혼란’을 즐길 권리가 있다. 

▲ 마광수 작 '인간'

('슬픈 필화사건' <즐거운 사라>는 이번으로 연재를 마치고 다음에는 장정일 <내게 거짓말을 해봐> 필화사건이 이어집니다.)

* ‘슬픈’ 필화사건에 게재된 그림은 마광수 교수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입니다. 그림 사용을 허락해주신 마광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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