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의 성공이 보여주는 것

제20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BIFAN)가 지난달 31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1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11일 동안 부천을 ‘사랑, 환상, 모험’을 주제로 한 영화의 도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평이 많다.

▲ 제20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폐막식[사진 : BIFAN 홍보실 제공]

서울과 가까운 수도권이란 지리적 여건도 한몫했고 다른 시기 열렸던 부천국제만화축제(제19회)를 같은 기간으로 끌어내고, 제1회 부천세계비보이대회(BBIC)와 제1회 부천전국대학가요제도 영화제 기간 동안 개최했다. 관람객 유치와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취지였는데, 휴가철과 맞물려 엄청난 인파가 부천을 찾았다.

BIFAN측은 “영화로 기억되는 영화제, 대폭 확대된 상업프로그램, 관객에게 다가가는 ‘한여름의 판타지아’ 추구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보다 높은 만족을 제공하는 다양한 행사로 구성”됐다고 홍보했으며 어느 정도 진정성이 맞아떨어졌다.

▲ 제20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 행사 [사진 : BIFAN 홍보실 제공]

영화 편수도 예년에 비해 67편이 늘어나 49개국 302편이 선보여 역대 최대 작품 편수란 기록을 세웠고, 폐막작으론 엄청난 흥행몰이로 1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는 ‘부산행’을 제작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상영되는 등 화제성도 상당했다.

편수가 늘어난 만큼 질적 향상을 위해 2명의 프로그래머를 새로 영입하고 중화권과 동남아권 객원 프로그래머 3명을 확충하는 등 ‘국제판타스틱영화제’란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전문 인력도 갖췄다.

다양한 연령대와 취향을 고려한 섹션별 구성도 돋보였고 우리나라 영화의 신작 발굴을 위한 ‘코리안 판타스틱’ 섹션을 신설했으며 온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패밀리존’도 인기가 높았다.

그 밖에도 ‘다시 보는 판타스틱 걸작선’,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 ‘고몽: 영화의 탄생과 함께한 120년’,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데이빗 보위의 추모전’,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특별전, ‘베스트 오브 아시아’ 등 풍성한 프로그램이 관객몰이에 기여했다.

영화제와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펼쳐진 부천은 그야말로 행사 기간 동안 문화예술특수를 누렸고 부천시민들도 나름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올해로 20회째를 맞은 BIFAN이 지난 20년이란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굴곡을 넘으면서 가장 빛났던 것은 조직위원장을 행정시장에서 영화인에게 완전히 승계했다는 데 있다.

▲ 제20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기간 중 부대행사들이 다채롭게 펼쳐졌다.[사진 : BIFAN 홍보실 제공]

지난 21일 개막식에서 민간 첫 조직위원장을 맡은 정지영 감독은 “자신이 조직위원장을 맡게 된 것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는 김만수 부천시장의 약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전 영화인의 고마움을 담은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에 명예조직위원장으로 새 직책을 맡은 김만수 시장도 “영화제는 영화인과 시민들의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며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겠다는 기준을 지켜가겠다”고 조직위원장을 맡아준 정 감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날 개막식에서 세 번이나 언급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은 공공 지원정책에선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지난 1945년 영국 예술평의회에서 처음 채택된 이 원칙은 관료적 간섭에서 벗어나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존중돼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지켜지고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BIFAN의 민간 이양이 더 값진 것은 과거 부천판타스틱영화제가 겪은 파행 때문이다. 지난 2004년 홍건표 당시 부천시장이자 조직위원장과 마찰로 인해 영화제를 이끌었던 김홍준 당시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 스텝들이 해고되는 사태가 있었고, 이 문제는 우리나라 영화계뿐 아니라 세계 영화인들의 공분을 샀다.

당시 암스테르담국제영화제의 얀 둔스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부천영화제를 지지해온 해외영화인들이 부천시의 김홍준 위원장 해임에 반발해 항의서한을 전해왔고, 단편영화 ‘포르노설전’으로 부천영화제에 참여했던 티 아더 코텀 감독은 홍 시장에게 “당신의 결정은 부천뿐 아니라 국제 영화계에서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에도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 제20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메인 포스터[사진 : BIFAN 홍보실 제공]

이런 아픔을 이겨내고 20회를 맞은 BIFAN은 영화계에선 자기 색이 분명한 정지영 감독을 조직위원장으로, 영화 ‘괴물’을 제작한 최용배 씨를 집행위원장으로 선임하고 개막식에서 해촉으로 맘고생이 심했던 김홍준 전 집행위원장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감사패를 전하는 등 과거사까지 정리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BIFAN에 대한 평판은 상당히 좋다. 언론은 물론 부천시민들 뿐 아니라 영화인과 영화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앞으로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거는 기대가 크다.

부천판타스틱영화제가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되는 20회에 철이 들듯 영화제로서 정체성과 진정성을 동시에 찾아낸 이면엔 영화인들은 물론 부천시의 상당한 노력이 있었다. 이는 또한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분명히 보장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20회 BIFAN의 성공을 보면서 지난 2004년의 부천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부산국제영화제의 거듭된 파행을 푸는 방법이 다른 데 있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영화제는 영화를 가장 잘 아는 영화인들이 만들 수 있도록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주고, 관객들은 그렇게 선보인 작품들을 평가하고, 관은 지원만을 해주는 것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말라’는 ‘팔길이 원칙’이 공공예술정책에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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