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오종렬 선생 생애(4)

민중과 함께, 자주민주통일의 지도자 故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의 생애를 몇 편에 나눠 싣는다.[편집자]

2007년 한국진보연대 출범

2005년, 2006년 투쟁 과정을 거치며 전국연합은 민족민주전선의 토대를 구축했다고 판단했고 2006년 10월, 오종렬이 상임공동대표로 있는 전국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서 조직발전논의를 통해 ‘진보진영 상설연대체’를 건설하기로 결정하면서 ‘한국진보연대’로 명칭을 확정했다.

그리고 2007년 1월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 전농 문경식 의장, 전빈련 김흥현 의장,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 전국여성연대 윤금순 대표, 민중연대 정광훈 상임대표, 전국연합 오종렬 상임 의장, 통일연대 한상렬 상임대표를 공동준비위원장으로 선임했다. 각 단위 사무총장을 공동운영위원장으로 인선하기로 합의하며 한국진보연대는 준비위원회 출범 이후 기존의 민중연대, 통일연대의 활동을 계승했다.

9월16일 한국진보연대 출범식을 앞두고 박석운 상임집행위원장과 주제준 사무처장은 수배 상태였고, 상임공동대표인 오종렬과 정광훈은 7월 한미FTA 투쟁 건으로 구속된 상태라 한국진보연대 출범이 심각한 난관에 부딪치는 듯 했다.

▲ 한국진보연대 출범식에 극적으로 참석한 오종렬과 고 정광훈 의장 [제공 : 통일뉴스]

하지만 진보연대의 수많은 동지들이 오종렬, 정광훈 의장님의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했고,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가 두 대표를 양심수로 선정해 한국정부에게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등 여론이 확대되자 출범식 이틀을 앞두고 오종렬, 정광훈 상임공동대표가 보석으로 석방되면서 극적으로 두 대표는 한국진보연대 출범식에 참가할 수 있었다.

출범식에서 오종렬은 “느닷없이 끌려갔다가 느닷없이 나와서 죄송하다”는 말로 인사말을 열었다. 또 “동지들의 깃발, 신발, 심장이 되기 위해 서울구치소에서 이틀에 한 번씩 팔굽혀펴기를 120개씩하고 날마다 운동장을 100바퀴씩 달려 발바닥에 새로운 발굽이 생겼다”며 그동안의 구치소 생활을 소개했다. 그리고 “운동을 많이 해 이제는 여러분과 천리만리 뛰어다닐 수 있다”며 “한국진보연대 깃발 아래 자주통일, 민중해방으로 우렁차게 떨쳐나서 비정규직 철폐 투쟁, 농업회생 투쟁, 빈민 투쟁, 청년학생 투쟁, 여성해방 평등 투쟁을 열어가자”고 호소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조국통일을 완수해 민중에게 권리가 돌아가는 것이 민중승리”라며 “진보진영의 총단결과 민중승리를 위해 신명과 생명을 다 바치겠다”고 강조했다.

2008년 2월에는 창립 17년 만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을 해산했다. 오종렬 전국연합 의장은 대회사를 통해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를 들고 해방 이후 가장 크게 일어선 전국연합이 드디어 새로운 도약에 올라섰다”면서 “민중의 정치부대인 민주노동당과 연대연합체인 한국진보연대를 강화, 발전시켜 나가자”고 호소했다.

“역사적 순간”을 맞아 대회사에 나선 오종렬 상임의장은 “‘자주·민주·통일’의 기치 높이 들고 ‘대중투쟁의 구심이자 정치적 대표체’로서 8.15이후 가장 크게 일어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드디어 새로운 도약대에 올라섰다”고 말했다. 전국연합의 지난한 활동을 통해, ‘대중투쟁의 구심’으로 한국진보연대가, ‘정치적 대표체’로 민주노동당이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8년 5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공동대표, 그리고 구속

2007년 연말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다. 민주당 정동영 후보보다 무려 500만표 차이로 앞선 압승이었다. 이어진 2008년 총선에서도 이명박이 당 대표로 있던 한나라당이 153석, 박근혜를 따르는 친박연대가 14석, 자유선진당이 18석으로 보수진영이 개헌선을 넘는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민주당은 81석에 그쳤고 민주노동당의 의석은 2004년 17대 의회에서 10석이었던 것이 5석으로 줄었다.

위키리크스에서 밝힌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행보로 미국을 다녀왔다. 부시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한미FTA 미 의회 비준을 촉구하면서 대신 미국의 오랜 숙원이었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조건을 대폭 완화했다. 30개월령 이상 쇠고기와 소 내장 등 광우병 위험 특정 위험 물질도 제한 없이 수입하기로 한 것이다.

5월 초 청소년들이 먼저 이에 항의하는 촛불 집회를 시작했다. 거기에 일반 시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촛불집회는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그해 5월부터 시작된 촛불집회가 그해 8월까지 매 주말 이어졌고, 6월10일 ‘6월 민주항쟁 계승기념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촛불집회엔 10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하며 그 절정에 달했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강력한 요구에 밀려 미국과의 재협상을 진행했고, 그 결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30개월령 이하로 제한되고 광우병 위험 특정 위험 물질의 수입도 금지되었다.

오종렬은 촛불과정에서 마이크를 잡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촛불 집회 때 빠진 적도 없었다. 자발적 시민들의 촛불을 지원한다는 의지였다. 두 차례 정도 촛불집회에서 발언을 했는데, 첫 번째는 촛불이 막 타오를 때인 5월 초 촛불이었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광우병 쇠고기를 아무런 제한 없이 수입한다고 해 우리는 걱정돼 죽겠는데 정부는 안전하다고만 한다”며 “정말 미치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4월19일 우리 정부가 미국과 쇠고기 협상을 타결 한 날 20개월 미만의 소만 수입하는 일본에서는 뼛조각이 발견되자 검역 중단도 아닌 수입중단을 내렸다”며 일본과 달리 굴욕적인 협상을 한 정부를 비판했다. 또 그는 이명박 정부의 공안탄압을 우려하며 “협박에 굴한다면 계속 짓밟혀야 하고 광우병 쇠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더 많은 사람들이 나서 촛불문화제를 성사하자”고 주장했다.

▲ 경찰기동대 창설식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공 : 민중의소리]

오종렬은 국민안전을 위해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선 탄압에 대응한 폭력적 방식의 시위가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6월10일 100만 명을 모아보자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6월7일부터 72시간 릴레이 촛불 대행진과 농성을 제안하고 몸소 앞장섰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농성장의 좌장격으로 전체 흐름의 중심을 잡아주는 ‘어른’은 누가 뭐래 도 오종렬이었다. 경찰의 폭력 유도작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며 평화시위를 호소한 이도 그였다. 그는 경찰 폭력에 맞서 시위 방식도 폭력적으로 변화하면 대중의 참여도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면 이 싸움의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유모차 부대와 여고생이 참여하는 집회여야 확장력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농성을 시작하며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비폭력 평화시위의 원칙을 토대로 잘 이끌어왔다”고 평가했다.

오종렬 의장은 촛불문화제를 폄훼하는 정부 당국자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다. 그는 “시민들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면서 “시위현장에서 폭력을 선동하는 일부 수상한 자들의 음모에 빠지지 말자”고 당부했다. 경찰의 폭력 유발과 이를 빌미로 한 대폭압작전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오종렬의 판단은 정확했다. 7월을 넘어서며 촛불 대오에서 폭력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광우병 대책회의를 비난했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폭력을 선동한 이들 중 어느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촛불이 계속되자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대책회의 간부들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오종렬을 비롯해 한상렬, 박석운, 주제준 등을 포함 한국진보연대 중앙 간부 중 과반이상이 수배되거나 구속되었다. 오종렬 당시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와 주제준 한국진보연대 사무처장은 수배령이 내린 직후 한국진보연대 사무실로 잠입했다.

당시 오종렬은 2006년 한미FTA 건으로 구속되어 보석으로 풀려난 이후 다시 수배령이 내렸기 때문에 이번에 구속되면 긴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바로 한국진보연대 후원회원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진보연대 사무실은 민주노총 건물 안에 있었는데, 저녁이면 오종렬을 따르는 사람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매일 적게는 5명, 많게는 50명씩 간담회를 하고, 모두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오종렬은 사진을 찍기 전에 반드시 한국진보연대 회원가입을 권유했고, 후원회원 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8월 시작된 간담회는 11월 초순까지 3개월간 1000여 명의 한국진보연대 후원회원을 모았다. 오종렬에게 수배는 한국진보연대 확산의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이는 한국진보연대의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3개월간의 한국진보연대 사무실 안에서의 수배를 마치고 오종렬은 주제준과 함께 현장순회를 떠난다. 경기 수원에서 회원을 만나고 다시 충남으로, 그리고 인천, 전주를 거쳐 전농에서 간담회를 하는 도중 경찰에게 연행된다. 2008년 11월 중순이었다. 그리고 오종렬과 주제준은 2009년 설 직전에 보석으로 석방된다.

▲ 수배에 도움을 준 전교조에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제공 : 전교조]

2011년, 혁명 동지 정광훈을 잃다

2009년 오종렬과 정광훈은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에서 물러나며 상임고문 직함을 얻는다. 십수 년간 최전선에서 싸우던 두 대표에게 고문이라는 직함이 맡겨졌을 때 왠지 가슴 한편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오종렬과 정광훈 의장은 20년을 넘도록 함께 같은 활동을 한 가운데 꼬박 10년 이상은 숙식도 함께하며 타향살이를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로는 둘이서 나란히 감옥에 끌려가기도 하고 풍찬노숙도 함께 했다. 1990년 3당 야합 이전엔 농민운동과 교육노동운동 현장에서 각각 따로 활동하다가 민족민주전선 건설 사업에 뛰어들다 보니 저절로 한배를 타게 된 것이다.

▲ 1999년 어느 날, 함께 집회에 참석한 당시 전국연합 의장 오종렬과 전농 의장이었던 고 정광훈 의장.

둘이 자취를 하던 작은 집, 한 칸 있던 방은 추위를 많이 타는 정광훈이 썼고 반대로 더위를 많이 타는 오종렬은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성격도 판이하고 생각도 많이 다른 줄 오해하기도 하지만 둘 사이는 단 한 번도 어긋날 적이 없었다. 2009년 정광훈 의장이 12년 만에 고향 해남으로 돌아가면서 오종렬은 이제 자취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2010년 진보연대 공동대표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오기 직전 서울 농민대회에서 했던 정광훈의 연설이다.

“노동자가 죽어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농민이 죽어 자빠져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국민이 죽어가는 데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한탄만 하고 있을 겁니까? 저는 이제 공식 석상에 서는 마지막 자리라고 생각하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만 하면 때려죽이려고 하지만, 혁명을 해야 한다는 말, 변혁을 해야 한다는 말, 천지개벽을 해야 한다는 말, 다 같은 말입니다. 이제 우리 남한 민중들은 우리의 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말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혁, 혁명을 통해서만이 민중권력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오신 분들, 앞으로 함부로 두들겨 맞지 마십시오. 왜 우리가 맞습니까, 왜 우리가 죽습니까?

오늘 투쟁하다가 두들겨 맞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해고입니다.”

이 연설은 정광훈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그리고 2011년 민주노동당 선거를 지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정광훈 의장이 사망한다. 오종렬의 정치적 쌍둥이를 잃은 것이다. 오종렬은 너무나 비통해했다.

정광훈 의장은 앞서간 열사들의 무덤 앞에서 늘 ‘지하에 가셨으니 이웃 열사들과 지하조직 잘하여 해방세상 이루시라’고 하였는데 오종렬은 이 얘기를 정광훈 무덤 앞에서 하며 서글피 울기도 했다.

▲ 고 정광훈 의장 영결식에서 추모사 하는 오종렬.

오종렬은 정광훈 의장과 자신이 정치적 쌍둥이라고 하는 것은 “자주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이며 “자주통일은 민중해방, 복지사회로 가는 결정적 관문이자 절대적 필요조건”이고, “자주통일 그 자체가 곧 복지사회는 아니지만 자주통일 없는 자리에 민생복지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화통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한결같은 뜻은 “갑오에서 오월로, 오월에서 통일로!!”였다고 했다. 그리고 오종렬은 정광훈 의장의 추모사를 통해 “어떤 지역, 어떤 계급, 어떤 부문 운동단체든 ‘전선’으로 모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개 폼잡고 ‘달밤에 유난체조’나 하고 자빠졌으면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는 정광훈 의장의 평생 주장을 재확인했다고 했다.

“총 든 자본주의, 제국주의 몰아내고 통일세상, 대동세상 이루어서 향기롭고 맛나게 자손만대 살아보자!”며 “Down Down WTO! Down Down FTA! Down Down USA!”를 힘차게 외치며 추모사를 마쳤다. 오종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2012년 8월15일 오종렬 의장님
통합진보당, 분당은 파멸, 기준은 자주민주통일

2012년 총선 이후 통합진보당은 당내 큰 혼선이 일었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 등이 통합하며 치러진 선거에서 당내 부정 선거 시비가 확대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구 진보신당을 기본으로 통합진보당 내에서도 사민주의 논란도 확대되고 있었다.

이때 오종렬은 사민주의 논란과 관련하여 진보진영을 향해서도 “분단이라는 큰 감옥 속에서 복지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괴상한 망상에 진보적 인사들까지 중독되고 있다”며 “진보진영까지도 자주통일이라는 것이 공연한 잠꼬대인듯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오종렬은 진보진영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북핵 반대 입장을 표명해야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꼬리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힘줘 말했다. “청룡도 든 이(미국)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늘 든 이(북한)를 시비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질문에 “그들은 진보진영이 정권을 갖도록 절대로 놔두지 않는다. 열 겹, 스무 겹, 백 겹 함정과 올무를 자치해놓고 있다”며 “이번 사태를 통해 이걸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단순히 진보진영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의 모종의 공작과 연계돼 있다고 강조하면서 오종렬은 “진보역량에 대한 파괴음모와 공작은 항상 있어왔다”며 “우리의 실패를 그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고 자성을 촉구했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분당을 향해 달려가는 데 대해서는 “파멸의 길”이라며 “아무리 화가 나고 성질이 나도 분당은 없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어 “자주민주통일을 핵심으로 하는 진보의 가치라는 기준이 있다”며 “패권을 말끔히 청산하고 아픔을 딛고 크게 다시 태어나보자”고 말했다.

▲ 2012 통합진보당 총선승리 전진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는 모습.

2014년 간경화 발병과 2015년 5.18 민족통일학교 건립

2014년 2월 오종렬은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 동시에 오종렬은 간경화와 급성 신부전증 진단을 받는다. 녹색병원에서는 혈액 투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안 그러면 생명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오종렬은 혈액 투석을 거부하고 자연치유에 전념했다. 서울 자취 생활도 어쩔 수 없이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투쟁 생활과 함께 일생 역점 사업이었던 5.18 학교 건립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전 재산을 털어 5.18묘역 근처인 전남 담양에 부지를 마련하고 백방으로 5.18 학교 건립을 위한 벽돌쌓기 회원을 모집했다.

여기에는 담양농민회 최정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설계는 인천의 소성호 동지가 맡아 시 공도 책임져 주었고 광주 건설연맹 조합원이 손수 콘크리트를 타설해 주었다. 벽돌쌓기를 통해 5억에 가까운 재정도 마련했다. 2015년 6월28일에는 5.18민족통일학교 준공식을 열었다.

오종렬은 이 자리에서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민중이 깨우치고 손 맞잡고 일어서면 조국통일, 사회평화, 인권 다 우리 것으로 누릴 수 있다. 내 눈으로 통일되는 것을 꼭 보고 싶지만, 설사 그것까지는 안 된다 하더라도 여기까지는 해놓고 가야 눈을 감을 수 있겠다. 일어서는 민중, 깨우치는 민중, 이 모습은 꼭 보고 가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종렬은 고천문을 통해 “민족이 무너진 구덩이에는 민중의 떼 주검이 파묻히고 자주성이 훼손된 자리에서는 백성들의 피가 끝없이 흘러내립니다”라고 강조했다. 어진 백성들의 눈물과 땀으로 <갑오에서 5월로, 5월에서 통일로> 하나 되어 나아가는 <만인교사 만인학생> 토론의 전당인 <5.18민족통일학교>를 세우고 준공식을 올린다고 했다.

▲ 5.18학교에서 부인 김평임 님과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모습. 오종렬은 일생의 마지막 사업이라 생각하고 5.18학교에 매진했다.

다시 생각하는 민족간부

오종렬은 민족간부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민족간부 육성이 왜 중요한지 들어보자.

“자주민주통일을 실천하는 주체는 틀림없이 대중이지만, 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민족간부라고, 민족간부 육성이야말로 우리의 살 길이라고, 민족간부 육성에 온 힘을 기울이자고 거듭 간절히 호소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오종렬이 생각하는 민족간부는 자주민주통일의 강령으로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겸손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진정한 민족간부는 대중 앞에서 언제나 겸손합니다. 대중 속으로 녹아 들어가,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그리하여 결국, 자주민주통일의 강령으로 대중과 하나 됩니다. 우리의 생존문제에서 민족자주란 도대체 무엇인가? 백성의 삶과 사회의 민주발전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자주적 평화통일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가? 이웃에서 늘 마주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답답해하고 무엇에 아파하는지, 그것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 대중의 언어로 설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민족간부”라고 여러 차례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또한 “낮은 걸음, 더딘 걸음이지만,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을 만들어 내는 사람, 그가 바로 민족 간부입니다.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무슨, 사회과학 서적을 좔좔 외우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문은 좁게, 문턱은 높게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왜 뛰어넘지 못하느냐고 호통하지도 않습니다. 문을 넓히고 문턱을 깎아내립니다. 여럿이 함께 가는 길에 가시덤불이나 젖은 구덩이가 보이거든 앞장서 그 위에 엎어집니다. 그리하여 지친 사람들이 자신의 등을 밟고 갈 때 그는 고통 속에서도 웃습니다. 이것이 민족간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체역량을 기르는 민족의 지도자” 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종렬은 “사상의 뿌리는 깊게, 표현의 수위는 낮게, 연대의 폭은 넓게, 실천기간은 영원토록, 우리 민족간부로 살고 투쟁하자”고 언제나 힘주어 말하곤 했다.

▲ 2019년 9월 21일, 5.18민족통일학교 정기총회에 참석한 모습. 이날의 개회사가 그의 생에 마지막 발언이 되었다.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찾아와줘서 참 좋습니다.
내 몸이 비록 이렇게 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들에 의해서 뜻이 다 이루어지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민중을 위하여, 민중과 더불어, 민중과 함께
조국통일의 자주성을 확실하게 우리는 확보합시다.
모든 것은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제 새로운 출발, 날마다 새로운 출발, 여러분들에게 기대합니다.
저 뒤에 보면 대숲이 있습니다.
저 자라나는 대숲을 나는 날마다 바라보며 연명해 갑니다.
저것이 바로 민중입니다. 뿌리 깊은 민중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손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모두 개척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 2019년 9월 21일. 5.18민족통일학교 정기총회 개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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