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 발제문

들어가며

<현실 사회주의 비교와 한국사회 미래 전망>이라는 주제의 기획토론회가 12월15일 오후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원래 주최 측(소통과혁신연구소-소장 정성희)은 발제문 자료를 30부 정도 준비하였지만 예상치 않게 참석자들이 70여명에 달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자료를 받지 못하였다. 이 같은 열기는 새롭게 재기하고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높은 관심도를 보여줌과 함께, 더 나아가 현재 뿔뿔이 흩어져 있는 한국 변혁운동진영이 조속히 통일된 대오를 형성할 수 있길 바라는 기대감의 반영이라고 보여진다. 

당일 토론회는 현실 사회주의국가 중 중국과 북한 두 나라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다루는 자리였다. 2인 발제자의 발제가 있은 후 지정토론자의 소감과 문제제기, 청중들의 질의와 이에 대한 발제자와 토론자의 응답 및 상호 토론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제기된 문제들을 보자면, 지정토론자이든 청중이든 중국에 관해 발제한 필자에게 향해진 것들이 많았다. 토론회의 약정 시간의 제한 속에 필자는 그 중 일부에 대해선 답변을 하였지만, 더 많은 문제들은 다른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기획토론회는 앞으로도 ‘쿠바와 베트남 사회주의’,  ‘한국사회의 미래 전망—한국사회변혁의 상과 길’ 두 차례 더 진행될 계획인데,  각각 내년 1월과 2월에 열릴 예정이다.  

변혁진영 내에서 이처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주체들이 한데 모여 모처럼 소통의 자리를 마련한 금번 현실 사회주의 진단 작업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평가는 필자가 근일 내로 따로 제출하기로 한다. 여기선 토론회에 제출한 필자의 발제문( “중국, 사회주의인가 국가자본주의인가”) 내용을 공유하는 것에 그치기로 한다. 발제문은 원래 ‘1부 중국사회의 성격’, ‘2부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지면 관계상 여기선 후자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 <현실 사회주의 비교와 한국사회 미래 전망> 토론회 장면

Ⅱ.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현재 국내의 중국 사회성격 관련한 논쟁에 있어, 중국의 사회주의 성격을 부정하는 이론의 대표적인 것이 ‘국가자본주의론’이다. 이 때문에 이 이론에 대한 일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1) 국가자본주의론의 가장 크고 직접적인 해악은 사회변혁에 있어 소유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기존의 이론을 수정함으로써 큰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소유문제에 대한 정통 맑스주의의 입장은 한 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가장 핵심요소는 생산관계이며 그 중에서도 소유관계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변혁운동의 핵심과제 역시도 이 같은 소유관계의 근본적 변혁에 맞추어졌다. 즉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부정하여 독점자본을 ‘국유화’ 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변혁적 과제는 일차적으로 완수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정통 맑스주의에 있어 소유문제를 중시하는 태도는 맑스의 <공산당선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맑스는 공산당선언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간단히 말해서 ‘사적소유의 철폐’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 

“공산당원이 자신의 이론을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다음과 같다. 사적소유제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공산당원은 곳곳에서 현존하는 사회제도와 정치제도에 반대하는 일체의 혁명운동을 모두 지지한다. 모든 이들 운동에 있어, 그들은 소유제문제가 운동의 기본문제임을 강조하며……”

이는 맑스가 한 사회변혁에 있어서 소유관계를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실제로 이 같은 소유제적 기준으로 인류역사의 시기를 구분하였다. 즉 원시공산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분 등이 그것이다. 처음 성별에 기초한 자연적 분업과 초보적인 사회적 분업이 나타난 후, 일정한 발전 단계에 들어서 ‘사적소유’가 출현하게 됨에 따라 이 같은 분업은 더욱 고착화 되었다. 이에 따라 인간은 ‘부분적 인간’이 되었으며, 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백계급 그리고 착취자와 피착취자로 갈라지게 되었고, 인간해방을 가로막는 이 같은 기계적 분업은 더욱 고정화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간해방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선 이 같은 사적소유의 철폐가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으며, 자본주의는 마침내 이 같은 사적소유를 철폐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게 되었다. 즉 자본의 끊임없는 집적과 집중운동으로 인하여 극소수 사회집단인 자본가계급이 대부분의 생산수단을 점유하면서, 나머지 대다수 성원들은 프롤레타리아화하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2)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론은 이 같은 기존의 신념에 대한 회의를 제기한다.

즉 자본주의적인 사적소유를 철폐하여 비록 사회적 소유의 가장 높은 단계인 ‘국유화’를 실현한다 할지라도, 그 같은 국유소유를 기초로 하는 사회 역시도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의 일종인 ‘국가자본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들에겐 소유형식이 무엇이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며, ‘노동자 직접통제’ 혹은 ‘자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가 핵심 문제가 된다. 즉 후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국유화가 이루어진들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이론의 문제점을 제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이 주장하는 이 같은 ‘노동자 직접통제’ 혹은 ‘자치’라는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될지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이론은 대단히 추상적이며,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둘째, 이 같은 ‘노동자 직접통제’가 사회주의의 본질이라고 할 때, 그것과 자본주의에 있어 당면한 구체적 변혁적 과제와의 관계 역시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즉 이전에는 소유관계의 철폐를 반자본주의 투쟁의 핵심강령으로 내걸었다고 한다면, 이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철폐의 의의를 국가자본주의론이 부정해 버린 상황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그 무엇을 현실 변혁운동의 구체적 실천 강령으로 내걸어야 할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예컨대, 노동자 직접통제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철폐한 국유화 이후의 과제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변혁과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사안인지가 불명확하며, 만약 후자라면 그것은 실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가 그것이다. 그 결과는 결국 구체적 강령(재벌국유화)을 추상적 강령(노동자자치)으로 대체하는 것이 되며, 이로부터 사실상 한국 현실 변혁운동에 있어 강령과 대안 부재의 문제를 낳게 만든다. 
셋째, 이 이론의 해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실 사회주의가 존재한 이래로 사회주의 건설과 관련된 일체의 경험들을 대부분 부정하고 악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그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소련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 낙후된 삼류 자본주의국가에서 단시간 내에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을 포함한 전체 선진자본주의 진영에 맞서는 일류강국으로의 발 돋음, 파시즘으로부터 인류의 구원, 다수 인민의 교육·주거·문화생활 등에 있어서의 거대한 공적들이 그들에게는 거의 아무런 가치 있는 것들이 되지 못하며, 마치 어떤 후진국도 마음만 먹으면 달성할 수 있는 평범한 업적으로 치부되고 만다. 그들의 협소한 시야에는 오직 ‘노동자자치’라는 매우 추상적 잣대를 기준으로 그 같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던 사실만이 존재하며, 혹은 특정 시기 특정한 상황에서 나타났던 강제수용소나 피의숙청 등이 모든 것을 압도할 뿐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그 어떠한 혁명이 그 정도의 부작용이 없었을까? 예컨대 모두가 예찬하는 프랑스대혁명과, 그 전에 있었던 소위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는 영국 부르주아혁명을 보라! 이들의 혁명과정 역시 폭력과 피로 점철된 과정이었다. 만약 그 이전 노예제와 봉건제에서의 이행과정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더욱 처절하였으리라. 원래 하나의 사회적 생산양식의 변화를 동반하는, 즉 전혀 미지의 새로운 사회관계가 등장하는 혁명 과정은 이 같은 혼돈, 야만, 폭력, 굶주림 등 거친 요소를 어느 정도는 수반할 수밖에 없다. 
넷째, 이 이론은 또 현재 남아있는 사회주의국가들에서의 긍정적 탐험과 실천까지도 위의 ‘노동자자치’라는 추상적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그 의의를 모두 부정해 버린다. 참으로 편리하고 간단한 만능의 잣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을 포함한 자본주의국가의 노동운동과 진보세력이 새로운 전망을 찾는 노력까지도 모두 막아 버린다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정작 문제의 핵심인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사람들에게 드는 상식적 의문은, 모든(혹은 대부분의) 생산수단이 국가소유로 된 상태에서 그러한 사회가 과연 ‘자본주의’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기본계급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존재하여야만 한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여기서 사적자본이 이미 철폐된 상태임을 감안하여 ‘관료’들을 자본가계급으로 보며, 그 지휘를 받으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노동자계급으로 본다. 물론 후자는 별 문제가 없지만, ‘관료’가 하나의 계급이며 특히 ‘자본가계급’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선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잠시 이들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은 소련은 (그리고 지금은 사회주의시장경제를 실천하는 중국이) 우선 ‘노동자자치’라는 자신들이 제시하는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아니며 ‘자본주의’라고 간주한다. 이 대전제 하에서 이미 국유화를 실시한 이들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관료’집단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집단에 갖가지 ‘자본가계급’으로서의 속성을 발견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이들이 자본가계급이기 위해선 이들은 무언가 일반 노동자계급과는 다른 특권을 가져야 한다. 예컨대, 봉급과 처우 등에 있어서 우월하든가, 경제활동에 있어 지휘·감독 등 우월한 지위에 있는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이를 위한 여러 통계자료를 찾아 제시한다.(사실 이 같은 통계자료는 대단히 일면적이며, 또 해석도 자의적이고 왜곡돼있다. 여기에 대해선 별도의 실증적 논박이 필요하지만, 이와 관련해선 이후 과제로 잠시 남겨두기로 한다.)
여기서 세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첫째, 관료집단이 과연 집단적인 자본가계급이 될 수 있는가, 둘째, 그들은 잉여가치의 진정한 수취자였는가? 셋째, ‘노동자자치’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한 본질적 규정이라 할 수 있는가이다. 국가자본주의 이론과 관련된 핵심문제는 모두 이 세 가지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 관료=집단적 자본가계급(?)

관료집단이 자본가계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무엇보다도 상부구조와 하부토대 양 범주의 혼동을 낳게 되고, 국가와 계급 관계의 혼란을 가져온다. 
사적유물론의 범주 상으로 볼 때 관료는 분명 상부구조에 속하며, 자본가계급은 생산관계와 관련된 하부토대에 속한다. 그런데 관료집단이 자본가계급이 된다면 이 같은 상부구조와 하부토대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되며, 양자는 통일되게 된다. 이 경우 어떠한 문제를 발생시키는가? 그것은 국가는 계급간의 적대가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산물이라는 사적유물론의 기본 명제에 어긋나게 되는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겉으로 나마 적대하는 계급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화해하는 자기 모습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 사회 위에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사회를 통치하는 ‘관료’ 자신이 자본가계급이 된다면 분명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관료가 자본가계급이 됨으로써, 양자의 관계가 너무 직접적이게 되고 이에 따라 국가의 계급적 본질이 너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피통치계급인 노동자계급은 관료가 자본가계급 자체임을 알게 되는 순간, 이들이 통치하는 국가에 대해 그 중재와 초월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 경우 머지않아 이 같은 국가권력은 피지배계급에 의해 부정되어 타도되어 지고 만다. 이는 사적유물론의 국가와 계급 간의 관계의 기본원리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관념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논리적 모순이다.

때문에 역사상 지배계급은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결코 직접적으로 일치시키려 하지 않는다. 국가를 포함하는 상부구조는 법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의 지배를 반드시 전 사회적이고 전 계급적 이익으로 치장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의식적으로 경제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한다. 예컨대 부르주아계급이 상품소유자 간의 자유로운 교역을 ‘자유와 평등’에 관한 인간의 보편적 원리로 승화시켜 추상화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한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이 사회의 절대 다수를 구성하는 피지배계급을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국가폭력에 의지하여야 하는데, 여기서 국가폭력의 작동은 반드시 이 같은 법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해서만 작용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계급사회에 있어선 상부구조인 국가권력과 하부토대의 계급관계는 반드시 상호 상대적인 독자성을 가지고 서로 구분되어져야 하며 직접적으로 일치할 수 없다. 국가자본주의론이 만약 소련과 기존의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을 자본주의사회라고 규정할 경우, 그것은 먼저 이들 사회에 있어 적대하는 계급들의 존재와 그 대립투쟁을 전제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국가와 계급간의 이 같은 ‘상호 독자성’의 일반원칙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이는 그들이 사적유물론 즉 맑스주의의 기본 원리를 이탈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좀 더 현실적으로, 관료는 왜 집단적인 자본가계급이 될 수 없는가? 이 문제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사회의 상부구조에 위치하는 국가의 조직구성과 운영에 대해 상식적으로 조금만 이해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일반적인 자본주의국가는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때문에 행정부에 속하는 관료는 다른 입법부와 사법부의 견제를 받는다. 그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수상 그리고 고위 장관들은 대부분 선거에 의해 당선되거나 임명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임기가 정해져 있으며, 차기 선거에선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차관급 이하 하위 관료들은 비록 ‘직업공무원’으로서의 신분이 보장되긴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공무원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야 하며, 또 이들의 신분과 대우는 모두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평균적 지위와 임금수준’에 의해 그것들이 정해진다. 이 같은 조건하에선 관료가 자본가계급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사적소유가 철폐되고 국가소유가 전일화된 자본주의국가 즉 소위 ‘국가자본주의’ 하에서의 관료는 어떠한가? 이 경우 일반의 자본주의국가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관료는 소비에트(소련의 경우)와 전국인민대표자회의(중국의 경우)라는 의결과 집행이 일원화된 최고 권력기구의 하위에 위치하게 된다.(소련은 인민위원회 산하, 중국은 국무원 산하) 그렇다면 이렇듯 의결과 집행이 일원화된 권력구조 하에선 관료가 자본가계급으로 변신할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하는가? 이는 완전히 ‘사회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불과하다. 

먼저 과거 소련의 경우는 어떠하였는가를 보자. 비록 스탈린 시대에 일인 독재가 심하였고, 최고지도부인 정치국원들 대부분의 종신제가 상당 정도 보장되었지만, 그럴지라도 기본적으로 ‘소비에트체제’가 말해주듯 사회주의 민주주의 기본 골격은 유지되었다. 예컨대, 소비에트는 직능과 민족 그리고 공화국이라는 행정단위 등의 기준에 따라 하부로부터 상향식으로 선출되어졌다. 공산당의 집권당으로서의 지위는 보장되었지만, 이 역시 레닌주의를 따르는 볼셰비키당의 원칙과 전통에 따라 당 지도부는 기본적으로 기층조직인 당세포로부터의 신임에 근거하는 조직 원리를 따랐다. 이 정도로만으로도 관료가 집단적인 자본가계급이 될 수 없는 조건은 충분하다. 

다음으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을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얘기하는 ‘자본주의’에 더욱 가까운 사회일 수 있기에, 아마도 관료가 자본가계급임을 증명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중국은 현재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있어 당정분리의 원칙을 상당정도 실현하고 있으며, 직업공무원제를 채택하는 서구 모델을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장인 국가주석과 국무원총리를 비롯한 각 부서 장관들은 엄격한 임기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전인대를 통한 임명 절차를 반드시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미 종신제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폐지된 지 오래이다. 

물론 공산당은 중국에서 집권당으로서 법률에 대한 제안과 주요 정책 제안, 그리고 주요 직위에 대한 인사추천권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상 다른 서구 자본주의국가의 ‘집권당’이 갖는 권한이나 역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이나 미국의 수상과 대통령 역시 집권당의 수장 혹은 행정부의 대표로서 그 같은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은가? 중국공산당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이들 국가자본주의 사회에선 ‘형식’ 적 절차에 불과하며, 실상은 몇몇 권력 상층부의 독재자들이 결정하는 것일까? 이는 지나친 예단이며, 사회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에 불과하다. 집권당인 중국공산당 자체가 9천만 명에 육박하는 방대한 조직으로서, 그것은 부르주아정당이 모방할 수 없는 민주집중제에 의한 엄격한 상하 견제의 구조와 운영원리를 따르고 있다. 예컨대, 매년 개최되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말고도 5년에 한 차례씩 열리는 전당대회는 거의 일 년의 준비와 예비과정을 거쳐 진행되며, 가장 기층의 당 지부(전체 4~5백만 개나 된다!)회의로부터 시작해서 차츰 상향식으로 향·전, 현/시, 성을 거쳐 선발된 대표들(대략 2천 여명)이 최종적으로 전국적인 전당대회에 참여하게 된다.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역시 비슷하며, 다만 당원이 아닌 일반 18세 이상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주민을 대상으로 그 대표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중국식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부단히 개선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이 밖에 정치협상회의, 농촌자치(3억 인구를 포괄하는), 도시 기층자치 그리고 언론에 의한 사회적 감시비판 기능의 강화가 이러한 기본적인 중국의 국가기구와 민주주의의 운영을 보조한다. 현재 시진핑의 반부패투쟁의 성공은 이 같은 언론의 지지와 역할 그리고 광범위한 대중의 자발적 참여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과연 이 같은 조건 하에서 관료가 사회의 다른 계층에 비해 월등한 특별대우를 받는 집단으로서 잉여가치를 수취하는 자본가계급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사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관료의 역할과 신분(경제적 이득, 권리 등을 가져오는)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왜 기존 사회주의국가에서 그처럼 거대한 관료집단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역사적 조건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관료문제에 대해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결과와 현상만 가지고서 비판할 뿐이다. 중국도 개혁개방 전까지는 그러하였지만, 과거 ‘소련식 모델’을 취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에 있어 그 같은 비대한 관료주의 문제가 발생했던 배경은 다름 아닌 ‘계획경제’에 있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생산력수준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계획경제에 의존하고, 너무 조급하게 시장경제의 기능을 부정했던 탓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복잡한 사회적 분업을 총괄하는 방식은 인류역사 상 보자면 두 가지 방식밖에 없다. 즉 그것은 시장 아니면 계획이다. 결국 근세 이래 사회적 분업이 매우 발달하고 날로 복잡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 같은 사회적 분업을 인간의 계획으로 총괄하려다 보니 인위적 요소로서의 관료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팽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관료들이 수행했던 그 같은 역할은 ‘시장’을 통해 대체 될 수 있으며, 지금과 같은 인류의 생산력 수준 하에선 시장이 훨씬 그 같은 사회적 분업을 총화하는 기능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물론 그럴 경우,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또 사회주의에는 시장이 있을 수 없다는 선험적 규정에 의거해서, 그리고 소련과 그간의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에 있어 ‘시장’이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했다는 사실을 들어 또한 그들이 자본주의국가임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이들은 어찌 되었던 구제받기 힘든 사람들인데, 시장과 사회주의에  대해선 이글 뒷부분에 다시 언급될 것이다. 

5) 소련 및 현실 사회주의에 있어 관료가 자본가계급이라고 가정할 경우 제기되는 두 번째 문제는, 그들은 무엇보다도 착취계급, 즉 잉여가치의 진정한 수취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관료가 이 같은 잉여가치의 진정한 수취자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보다도 보다 근본적으로 국유기업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 즉 ‘잉여가치의 수탈’이 존재할 수 있는가?
국가자본주의론을 처음 내세운 토니 클리프는 우선 관료와 일반 노동자의 소득(임금) 격차를 예로 든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이 같은 통계는 극히 일면적이다. 오히려 더 많은 통계는 소련 등 과거 사회주의국가에 있어 관료의 봉급수준이나 사회적 대우는 다른 자본주의국가와 비교해서도 훨씬 더 평등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컨대 소련에서 과거 국가지도자의 임금수준이 육체 소모가 심한 탄광노동자의 임금과 비슷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 설령 평균적으로 볼 때 관료의 상층 고위직과 일반 노동자 사이에 일정한 임금격차가 존재할 지라도, 그것은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점유한 상황에서 취득하게 되는 잉여가치의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절대 권력자인 스탈린, 모택동조차도 임종 시엔 별반 남긴 유산이 없을 정도였다는 것은 한국이나 자본주의 세계에는 별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만약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이들은 관료라는 자본가계급의 최상층에 속하기 때문에 록펠러, 혹은 빌게이츠나 워렌 버펫처럼 잉여가치의 최고의 취득자로서 상응하는 거대한 자산을 보유하고 남겼어야만 마땅하다. 더군다나 관리 층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하급 관리와 일반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그보다도 훨씬 적다. 아니 오히려 전자가 후자만 못한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이하에서 과연 국유기업에서 ‘착취적 잉여가치’ 범주가 존재하는 지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토니 클리프를 비롯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현실 사회주의국가에서 ‘착취적 잉여가치’ 범주를 ‘가치법칙’ 범주와 혼동하면서, 단순히 후자(가치법칙)의 존재를 통해 현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였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치법칙은 그 자체로서 잉여가치의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없으며 양자는 전혀 별개의 구분되어야할 두 개의 범주일 뿐이다. 전자(가치법칙)가 의미하는 것은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등가교환’일 뿐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결합할 때만, 생산과정에서의 부등가교환인 부불노동의 수취 즉 착취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교환가치의 존재, 그리고 상품과 시장의 존재 유무는 그 사회가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심지어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존재하는지 여부, 즉 형식상으로 ‘노동시장’이 존재하는지 여부 또한 그러하다. 국유기업이든 여타 다른 소유제 형식의 기업이든 ‘임금노동’의 형식으로 노동자를 고용한다고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국유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를 상정해보자. 이 경우 그는 과거 계획경제에서 국가가 직접 그의 일자리를 배정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지금 시장경제 하에서는 노동시장을 통해 국유기업에 고용될 것이며, 그럴 경우 그는 노동력에 대한 당시의 시장 평균임금 수준에서 고용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경우 분명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는 ‘노동력상품’에 대한 가치 규정이 관철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착취관계가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관건은 이 경우 그가 국유기업에서 자신의 재생산 비용 이상으로 창조한 가치가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달려있다. 그것은 자본가의 몫으로 전환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가 고용된 직장이 국유기업인 이상, 그 국유기업의 이윤(즉 잉여가치의 전화형태)은 국가의 몫으로 되며, 다시 그것은 최종적으로 본인을 포함한 전 인민에게로 돌아온다. 예컨대 현재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국유기업→국유자산관리감독위원회(혹은 재정부)→전국인민대표자회의→인민의 순서를 밟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 같은 이윤의 전 사회적 환원을 통해 그것을 생산한 노동자 자신도 그 혜택을 보게 된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생산한 전체 잉여가치의 일부이겠지만, 그러나 그 또한 마찬가지로 다른 국유기업의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향유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볼 때 그 혜택은 동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관료층과 경영층의 부패가 개입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착취 개념과는 다른 부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착취와 부패 두 개념 범주를 자주 혼동하는데, 이 양자는 엄연히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한다. 중국의 시진핑 지도부가 보여주듯, 사회주의는 끊임없이 자체 개혁과 반부패투쟁의 수행을 통해 사회시스템을 점차 개선하고 완성해 감으로써 부패를 없앨 수 있다.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가치법칙의 역할은 미시적으로는 유통과정에서 상품간의 등가교환을 매개함과 동시에, 거시적으로는 사회적 분업을 ‘총화’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치법칙의 매우 중요한 기능의 하나인데, 사회성격 논쟁에서 종종 간과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오늘날과 같이 사회적 생산력이 고도화하고 이에 상응하게 사회적 분업이 지극히 복잡해진 상황 하에서,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 기술이 전면적으로 발전하기 전까지는 이처럼 복잡한 사회적 분업을 총화 할 수 있는 기능은 오직 ‘시장’을 통한 방식, 즉 가치법칙의 작용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사회의 성격을 떠나서, 즉 그 사회가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과거 계획사회주의가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같은 사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노동자자치’는 계획이냐 시장이냐에 대해 결코 제3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없다. 그 좋은 사례가 일찍이 자치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던 유고슬라비아 모델의 역사적 실패이다. 30여 년간 진행되었던 유고 자치사회주의의 실패가 보여주는 것, 그리고 유고와 같이 보다 완벽한 자치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사회에서 ‘시장’이 다른 사회주의국가들 보다 일찍 출현하고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수수께끼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사회적 분업’을 어떤 수단을 통해 총화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같은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기본문제는 자치를 실시하는 생산단위(개별 기업, 농촌합작사 등) 간의 생산물교환이 어떤 기준에 의해 진행되는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들 간의 민주적 협상을 통해? 그것은 공상적인 발상이며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자치 사회주의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중앙의 권위 있는 기관에 의한 ‘계획’과 ‘지시’를 부정하는 이상, 그 경우 남는 것은 오직 ‘시장’을 통한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유고의 경험은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토니 클리프 류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소련에서 전일적인 국유기업 소유제 하에서의 가치법칙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통해 소련이 자본주의사회임을 입증하려 하는 것, 또 한 발 더 나아가 그 같은 가치법칙이 존재하는 내적 동력을 찾기 위해 세계 다른 자본주의국가와의 경쟁 (특히 군비경쟁)을 거론한 것 등은 가치법칙의 이 같은 사회적 분업의 총화 기능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6) 끝으로 ‘노동자자치’에 대해 언급해 보자.

이는 앞서 유고 자치사회주의에서 보듯, 현재 인류의 생산력수준에선 현실화 할 수 없는 요구이다. 또 ‘자치’를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삼겠다는 발상 역시도 틀렸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잣대를 계속해서 들이밀며 과거와 현실 사회주의를 재단하고 현실 실천의 원칙이나 원리로 삼으려고 하는 시도는, 사실상 ‘무정부주의’ 적인 발상에 다름 아니다. 그 같은 잣대에 비춰 보면 과거나 현재 사회주의국가가 이룩한 공적은 모두 별것 아닌 것이 되며, 또한 현실적 실천에 있어 전략과 전술상의 무능력만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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