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16) - 1950년 7월 21일 상주 화남면 동관리

7월17일 1차 40여 대 우마차 공격, 7월19일 2차 10여 대 우마차 공격에 이어 7월21일에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우연이었는지 이번에도 짙은 안개로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부대”가 “발자국 소리와 수레 구르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국군은 저들이 인민군인지 아군인지 피란민인지도 모르면서 공격을 해야 하는 상황에 또다시 직면했다.

국군 17연대 2대대(대대장 송호림 소령)는 역시 “등에 배낭을 메고 있다는 점”, “손수레가 집단 사이사이에 끼어 있다는 점”만으로 인민군으로 판단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의 공격이었고 이 공격이 이루어진 뒤에는 미 군사고문관의 확인까지 있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439~442쪽).

이번 2대대의 공격 역시 연대장의 명령 없이 시작했는데 이미 5일 전에 인민군 선두부대가 화령장을 지나 낙동강으로 갔음에도 5일 넘게 그 후방에서 보급부대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려 했던 것이다.

▲ 『한국전쟁사』 제2권 440쪽. “명령 없이 사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통신을 끊어가면서 사격을 가했다. 사로잡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살해선 안 될 사람을 쏘았기 때문일 수 있었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 사정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명령 없는 사격으로 시작된 전투

19일과 마찬가지로 21일 전투 역시 명령 없는 사격에서 시작되었다.

상주 화남면 동관리에 매복하던 국군 2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이 없이 사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되었던 “명령 없는 사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인민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정보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곳곳 초소에서 “이상 없음”이라는 보고만을 받고 있었으니 ‘놈들에게 속았구나!’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 역시 명확히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 지난 7월17일과 19일 전투는 1개 연대가 치른 전투라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공격한 부대라고는 인민군 15사단 48연대 주력이 아니라 대부분 민간인이 동원되었던 보급품 운반 인력에 불과했다. 국군 17연대가 화령장에서 5일의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우회한 인민군은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을지 모른다.

이때 2대대가 배치되었던 동관리에서 계곡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과 총성이 다시 들렸다. 연대장이 무전기를 확인했지만 2대대와 통신연락은 끊어져 있었다. 연대장이 통신장교로부터 들은 대답은 “제3대대 지역은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제2대대는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2대대장은 이번에도 명령 없이 총격전을 시작했고 이제는 연대장의 연락까지 무시했던 것이다.

▲ 화령장지구전적비. 1980년 10월 건립되었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무리를 공격하다

총격전은 1950년 7월21일 새벽 6시부터 시작되었다. 2대대장은 7중대장으로부터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부대가 진지 앞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연대장에게 “이상 없음”이라고 보고한 뒤 3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대장은 국군 1사단이 통과한다는 연락을 받았으므로 적군과 아군을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명령에 의해서만 사격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했다.

지난 19일처럼 이번에도 같은 경계초소에 근무하던 같은 병사가 보고했다. 우연이었는지 이번 보고자도 변진세 병장이었다. 그는 “분명히 어떤 집단이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와 수레 구르는 소리였으며, 그 소리가 커지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이동하는 무리는 배낭을 메고 있었고 중간중간마다 손수레를 끌고 4열 종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대대장은 “한국군 병사들은 한강을 건너면서 배낭을 모두 잃었고” 새로 배낭을 받은 뒤에는 이동 시에 “배낭을 차량에 싣고 다닌다”면서 국군은 이런 형태로 이동하지 않으므로 1사단의 행렬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한다(『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1권, 98쪽).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세 번째 전투였음에도 ‘국군은 배낭을 메고 다니지 않았으므로 배낭을 멘 군인은 인민군’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다. 게다가 더 심각한 측면은 이들이 피란민이었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새벽 6시 30분 정체불명의 대열이 국군의 매복 지점을 벗어날 순간 연대장에게 보고 없이 대대장의 일방적인 사격 명령이 내려졌다. 구체적인 책임 추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목적이었는지 이 중대는 연대와 연결되어 있던 모든 유무선 통신장치를 일부러 끊은 상태였다.

국군의 소총 공격은 물론 81mm와 60mm 박격포, 중기관총, 수류탄이 폭발했다. 여전히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가한 공격이었다. 이번에도 이동 무리의 반격은 없었으며 공격을 당한 자들의 신원은 아침 8시 안개가 걷힌 뒤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 연대장이 미 고문관과 함께 대대장을 찾아왔다. 명령 없이 사격했을 뿐 아니라 통신연락까지 끊었던 대대장을 문책하려던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 화령전승기념관 마당에 세워진 동관리 전투 안내판. 356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투에서 아군 전사 피해는 4명에 그쳤다고 소개하고 있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그런데 공격 현장을 목격한 미 고문관은 “내가 30년의 군생활을 통하여 전투도 많이 해 보았고, 서부활극을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통쾌한 전투는 처음 보았다”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는 이를 칭찬인 것으로 묘사했지만 필자에게는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 서부활극을 빗댄 비아냥을 오해한 것처럼 들린다. 위 책은 이들이 인민군이었다고 했지만 이미 앞의 공격에서 보았듯이 상당수는 민간인들이었을 것이다.

사살한 인민군 수를 밝히지 못한 『한국전쟁사』

동관리로 피신했을 패잔 인민군에 대한 소탕전은 오후 2시에 끝났다고 했다. 포로는 30명이었고 박격포 16문, 기관총 36정 등 각종 소총 800여 정을 노획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국전쟁사』는 이 전투에서 사살당한 인민군의 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442쪽). 포를 쏘는 등 인민군 측의 반격이 있었으므로 진지를 이동하느라 무기만 챙기고 사살자 수를 파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런데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1권은 “7월 20일 14시 경 소탕작전을 완료한 17연대 2대대는 사살 356명, 포로 26명, 박격포 16문, 대전차포 2문, 기관총 53정, 소총 186정 등 많은 전과와 전리품을 획득하였다”라고 『진천·화령장전투』(1991)를 재인용하여 밝혔다. 하지만 이 자료는 당시 인민군 전사자 수를 356명이라고 밝혔지만 정작 전투의 내용은 『한국전쟁사』와 달랐다. 21일이었던 전투 날짜를 20일로, 사로잡힌 적군 수 30명을 26명으로 밝혔다.

한편, 국군의 피해는 1명 전사에 그쳤는데 그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가 특이하다. 『한국전쟁사』는 이 사실에 대하여 “제7중대 화기소대장 김삼만 중위도 도랑을 따라 도망치는 적을 발견하고, 전의석 상병이 사격하고 있는 견착식 경기관총을 빼앗아 들고 사격을 가하면서 앞으로 나가다가 그들의 휘두르는 총격에 맞아 쓰러지고 그는 이 전투에서 유일한 전사자가 되었다”라고 했다. 소대장이 부하 장병이 쏘는 경기관총을 빼앗아 사격을 하다가 적군이 쏜 총을 맞았다고 하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을 의미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날의 전투에 대한 설명에도 온갖 허점과 의문이 가득하다. 21일 공격 역시 인민군들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격이 중단된 아침 8시에야 피살자들이 인민군임을 확인했다고 하니 그전까지 인민군일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의 생명을 빼앗는 전쟁 전투를 무슨 도박으로 여겼던 것일까? 인민군이 아니었으면 인민군으로 조작해도 되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노획물만 아니라면 이들의 모습은 피란민을 공격하는 것에 더 가깝다.

『한국전쟁사』는 1명 전사자에 대한 설명 외에 인민군 측의 대응 사격에 대해 서술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사망한 국군은 장교였는데 그는 부하가 쏘고 있는 경기관총을 빼앗아 쏘다가 총을 맞았다. 여기에 포로가 30명(또는 26명)이었다는 것 외에 인민군 측의 전사자가 몇 명이라는 추정치조차도 확인되지 않는다. 우마차 끄는 소리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사로잡혔다는 30명 포로의 신원도 인민군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연대장 김희준이 대대장 송호림을 문책하려 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 2018년 10월 개관한 화령전승기념관. 전쟁의 판세를 바꾼 승리였다고 선전하지만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2019년 5월 15일 조사.

한편, 1954년 간행된 『육군전사』는 7월19일 전투와 마찬가지로 21일 전투 역시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사』의 집필자들은 국군 17연대가 마치 인민군 15사단 48연대와 49연대 등 2개 연대를 거의 격멸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앞서 세 번의 전투를 보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라주바예프 보고서 중 이와 관련돼 보이는 서술이 있다. 여기에는 “제1보병사단은 역습하는 적과 5일간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대량 손실을 입은 후 7월22일 점령 지역으로부터 8~10km 철수하였다”라고 했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206쪽). 인민군 15사단이 아니라 인민군 1사단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여서 『한국전쟁사』에서 17일부터 21일까지 사이에 화령장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묘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