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최인기 빈민스토리
청계천을 중심으로 살펴본 도시문제와 노점상최인기 빈민스토리(16)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9.19 12:43
  • 댓글 0
▲ 1960년 청계천 [사진 : 노무라모토유키 제공]

1. 청계천의 역사

1968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제시하였으며 그 후 여러 나라에서는 도시문제를 둘러싼 실천적 운동에 ‘도시권’을 접목하고 있다.1) 한국도 오래전부터 환경운동과 지역 그리고 빈민운동진영에서 도시권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특히 2000년대 들어 유엔 산하 ‘해비타트’의 도시에 대한 권리 증진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앙리 르페브르’의 이론을 계승하고 있는 ‘데이비드 하비’ 등 도시문제 관련한 학자들의 한국 방문과 심포지엄 개최가 이어지고 있다. 한편 ‘앙리 르페브르’는 산업자본의 생산 현장에서 생산된 잉여가치가 부동산 투자라는 이차적 순환으로 성장하면서 도시공간을 급격하게 변화시킨다고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 도시는 소비의 장소이며 동시에 장소의 소비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며 자본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대안적인 공간 전유와 생산의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시대의 도시공간은 ‘모순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시권’ 개념은 교환가치와 이윤 추구의 자본주의적 공간생산을 넘어서서, 만남의 공간과 사용가치를 우선시하는 대안작품으로 도시공간을 전유하는 것을 함의하며 주변으로 쫓겨나 도심을 강탈당하고 수탈당하는 사람들이 이를 다시 전유할 권리를 포함한다2)고 이야기 한다.

주1) 강현수. 2010. 『도시에 대한 권리: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책세상
주2) 곽노완 2010. 21세기 도시권과 도시정의의 철학. 17쪽

한편 한국은 과거의 파괴적 도시개발이 주민의 삶을 위협했다면, 도시계획의 반성적 성찰로 제시되는 ‘도시재생’ 사업도 여전히 기대와 실망이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도시문제를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는 청계천 일대를 살펴보더라도 최근까지 노점상, 철거민 그리고 상인들의 저항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인간적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 가 담론을 넘어 실천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시기 우리에게 진지하게 다시 묻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질문을 풀어내기 위해 우선 청계천의 기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계천은 서울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하천으로 청계천은 길이 약 3,670m. 최대 너비 84m로 주변엔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여 서울 사대문의 물이 청계천으로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흐른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 이었다. 조선 왕조의 한양 천도 당시에는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여름철 홍수가 지면 근처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다.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지만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살았다. 조선 제3대 왕 태종이 개건 공사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영조 때에는 준설작업과 더불어 양안 석축을 쌓아 물의 흐름을 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 사업을 시행하였다. 청계천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된 준설공사는 순조․고종 때에도 계속되었다. 횡적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끊긴 개천을 이어주기 위해 수표교․오간수교․광교․영미교․관수교 등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다. 이 밖에도 청계천에는 많은 유물과 역사적인 장소가 있는데 조선 시대에 병사의 시험, 무예의 연습, 병서의 강습을 맡아보던 관청인 ‘훈련원 터’가 동대문 근처에 있고 청계천 8가 근처에는 삼국지 관우의 사당 ‘동묘’ 가 있다.

청계천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초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행해져 8․15광복 후에도 청계천의 유지관리가 이어졌으며, 청계천을 아스팔트로 뒤덮는 복개 공사는 1958년 6월부터 복개 공사에 착수하여 답십리동 신답초등학교 앞까지 복개되었다. 그 위로 김포공항에서 미군의 휴양지였던 워커힐 호텔까지 단숨에 달릴 수 있는 삼일 고가도로가 1967년 8월 15일 착공하여 1971년 8월 15일 건설되었다. 그리고 1969년부터 청계천 주변의 산동네와 판잣집을 가리기 위해 지어졌다는 삼일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침내 청계천은 불결한 곳이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청계천 주변에는 1963년 건설된 최초의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자리 등이 있었고, 그 옆에는 1965년에 건설되어 연예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해 연예인아파트로 불린 ‘동대문 아파트’가 지금도 있으며 근처에는 인쇄 골목, 문구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한편 이러한 개발사업은 청계천 일대 가난한 사람을 철저히 내모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1966년 김현옥 서울시장에 의해 추진되고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된 ‘세운상가’ 부지를 둘러싸고 ‘자진 철거하면 입주권을, 자진 철거하지 않으면 강제철거’ 라는 ‘당근과 채찍’을 대책으로 제시하며 무허가 불량주거지역 재정비 사업을 진행한다.3) 특히 경기도 광주 지금의 성남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며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는데4) 이 당시 상황을 청계천 근처 창신동에서 빈민운동을 전개한 김혜경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주3) 강우원. 세운상가 30년 존재 담론
주4) 2015년 12월 발간 청계천 박물관 도록 참조

“우리 창신동 엄마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서, 한편으로 분노하기 시작했어요. ‘경기도 광주’가 어디냐. 한 번 가보자. 거기가 어떤 동네냐. 사람이 살 곳이냐. 이렇게 해서 우리 엄마들하고 동대문에서 차를 타고 두 번 세 번 인가 갈아타고, 그때는 천호동까지 가는 버스밖에 없었어요.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고 경기도로 하루 갔다 왔는데 지금도 생각나요. 처음 보는 불도저들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니까. 이상하게 생긴 차가 열심히 산을 깎고 있는 거야. 빨간 황토가 막 한없이 넓게 퍼져있는 거예요. 갈아엎으면서. 그 엄마들이 가서 그냥 뻘건 먼지 보고, 뻘건 흙더미 보고 기가 막혀서. 여기서 어떻게 살라는 얘기냐. 이걸 보고 와서 그때부터 엄마들이 우린 도저히 못 나간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하고, 살아도 여기서 살아야 한다. 1969년도 2월 말까지 철거를 안 하면, 어, 이거 나가지 않으면 강제철거를 한다. 그래서 계고장이 세 번 나오면 강제철거를 하겠단 얘기죠. 경기도 광주로 가면 땅을 20평씩 준다. 그러니까 자 여기서 10평도 안 되는 좁은 판잣집에서 아홉 식구 열 식구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 모시고 사느니, 북적북적 한 데서 사느니 이십 평 땅 주는데 거기 가서 그냥 텐트라도 치고 살 거냐. 땅 우리 그냥 공짜로 준다고 그러니까 거기서 살다 보면 땅값도 오르고 괜찮을 거 아니냐.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부분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냐면, 아니 우리가 여길 떠나면 어떻게 먹고사냐. 먹고 사는 것도 동대문 여기, 근거지가 동대문시장 있고, 평화시장 있고, 청계천 여기 다 있어서, 생존권이 여기서 다 이루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이사를 하냐. 또 하나 얘들 때문에 이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대물림해서 가난하게 살지 않으려고, 더 잘살려고 와서 얘들 교육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또 어디로 거기에 가 .....왜 우리한테 물어보지 않으냐 솔직하게 기본적으로 우리한테 먼저 물어보고 이런 계획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주민이 원하면 좋다고 찬성했을 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모르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화가 난 거야."5)

이 당시 청계천에는 많은 청년 학생들이 야학 활동과 지역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계천에서 남편 제정구 씨와 빈민운동을 함께했던 신명자씨는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973년이에요. 가을이요. 9월이었어요. 그때 청계천을 찾아가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서 버스를 타고 그 한양대 뒤편 거기서 내려서 길 건너서 둑을 하나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서 개천 다리를 건너서 다시 또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니까 이게 청계천 동네였어요. 근데 정말 저는 너무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냥 끝도 없이 도저히 사람이 사는데 라고 할 수 있는 데가 아니고, 그 또 언덕을 두 개나 넘어 사람들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사는 동네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성동구 쪽에서 사근동 쪽으로 답십리 쪽으로 나오는데 한 시간 사십 분이 걸렸어요. 뚝 길 위를 걸어서 오는데. 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어요. 사실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어디나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수만 명이 모여 그렇게 가난하게 산다는 거를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고 너무 충격이었어요. 오래된 청계천 사진 보시면 알겠지만, 그냥 바닥도 거적이고, 문도 거적이고, 벽 둘레 쳐 있는 것도 거적이에요. 거적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냥 바닥에 가마니 깔고 그대로 겨울을 나는 거예요. 결핵 환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어요. 그리고 물이 나오는 시간에 물동이를 가지고 줄이 끝도 없이 서 있었어요. 아무도 씻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죠. 애들은 여기 손이 완전히 갈가리 찢어져서 다 터져 피가 나는 거의 그런 정도였고요. 그래서 저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렇게 비합리적인 사회에서 뭔가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있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죠. 그때 시월에 ‘유신반대’를 해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다 도망가고 잡혀가고 하던 그런 때였고요.”6)

주5) 최인기. 2011년 8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혜경 도시빈민운동사 구술
주6) 최인기. 2011년 8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명자와 도시빈민운동사 구술

이 시기의 모습은 일본의 사회운동가 ‘노무라 모토유키’에 의해 사진으로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2002년 7월 복원공사를 공약으로 내건 이명박 서울시장이 취임하여 2005년 10월 청계천 복원공사를 마쳤다. 1925년 만들어진 한국 스포츠사에서 매우 소중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경성운동장’이 있었으나 그 후 오세훈 서울시장 때 허물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섰다.

2.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재편되는 청계천7)

주7) 이글은 필자의 2005년 경실련등 시민사회단체 주최 서울시 청계천 사업평가 토론회, 2013년 리슨투더시티 발간 동대문 디자인파크의 은폐된 역사와 스타건축가, 2014년 서울시민연대주최 ‘5천억 혈세 투여,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어떻게 볼 것인가? 에 게재한 원고를 토대로 작성

▲ 60년대 청계천에서 일하는 노동자 [ 사진 : 노무라모토유키 제공]

서울은 600여 년의 세월 동안 중심도시로 역할을 수행해 왔고, 그 한복판에 자리 잡고있는 ‘청계천’은 지리적으로 상공업 시설이 오래전부터 발달해 왔다. 한국전쟁 이후 60~70년대를 거치면서 문화적으로도 우리 사회의 ‘개발 선호’의 현상은 조국 근대화와 맞물려 형성되고, 빠른 속도로 국민성으로 뿌리내렸다. 정치적으로 단번에 큰 변화를 가져올 개발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할 재원을 끌어오는 사람이야말로 유능한 정치가라는 의식이 만들어져 나갔다. 개발은 성장이며 발전이어서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는 이 믿음은 ‘느림은 침체요 빠름은 발전’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다양한 영역에 촉수를 뻗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자본주의 체제’라 했을 때, 자본축적을 위한 필수 요소로 ‘산업화와 도시화’를 촉진한다. 한국전쟁을 거친 후 60~70년대 노동집약적 수출주도의 경공업 정책을 추진하면서 광범위한 인구가 도시로 몰리자 한국의 자본도 유리한 입지를 찾고자 즉 생산시설의 입지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충분한 노동력과 상품 생산과 유통에 유리한 도시 하부시설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된다.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도시에 공업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자본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공간적 분업과 도시의 팽창’을 추진하지만, 이미 청계천은 서울을 중심으로 각각의 시대에 걸맞은 생산을 담보하는 의류, 인쇄, 제화 등 공단시설이 확보되어 있었고, 1960년대 이후 기존의 업종이 시세를 확장하는 방식의 공구상가와 기계공장들이 모여들면서, 상공업지구로 전환이 시작된다. 이미 인구의 집중과 함께 교통의 발달 등 기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일찌감치 ‘도심 속 상공인 마을’8) 이라는 형식으로 생계 터전을 집중한 서민들은 인근 창신동 이화동 등 산동네에 자신의 거주지를 형성한다. 출퇴근거리가 짧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출퇴근에 드는 비용을 절약하는 효과로 청계천 을지로의 공구상가와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의류상가 그리고 분업화된 상권, 노동력 집약적인 가내수공업과 황학동을 중심으로 한 노점상 등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 확보와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따라서 광교에서 청계천 7-8가일부는 국가와 자본의 이해에도 맞아 비공식적 경제활동이 묵인되고 양성화되어 나가지만 비슷한 시기 1964년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설립되어 본격적인 수출산업공단 조성이 시작되었다.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수출산업공단 제1단지를 세웠으며 이후 구로공단이라 불리게 되었다.9) 생산시설인 공장은 서울 외곽을 중심으로 밀집되어 나갔으며 도로 등을 포함한 교통망과 주택, 의료, 교육 등이 신도시 건설과 맞물리며 노동력을 집중하고 확장되어 나갔다. 이때부터 자본의 특정 공간에 몰리는 ‘자본의 이익’이 집합적 소비수단을 통해 기반시설이 갖추어지는 방식으로 서울과 지방의 산업도시는 점점 거대화되고 외곽으로 팽창되어 나간다.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공장들은 교통망의 확장에 따라 인건비의 절감과 낮은 임대료와 저렴한 주거비용 등 저렴한 노동력 재생산비용 그리고 공간사용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지방의 도시로 이전하게 되고, 사대문을 중심으로 광화문에 인접해 있는 청계천 인근의 중심부는 기업의 본사 및 첨단 정보산업을 비롯한 오피스 기능이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기업의 본사를 포함하는 첨단산업 분야가 도시의 중심으로 집적되는 것은 각종 행정관서와 금융기관, 정보의 원활한 교류가 필요한 첨단정보산업들이 함께 몰려 있음으로써 생기는 이익이 현대 산업사회로 갈수록 더욱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주8) 서울역사박물관 발간 . 도심속 상공인 마을
주9) 위키백과.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

이제 1980년대 접어들면 청계천에서 벌어지는 개발사업과 입지를 둘러싼 경쟁은 자본이 상품생산지역을 대도시의 중심부에 위치시킬 필요성을 점차 희박하게 만든다. 따라서 지대의 가치상승과 맞물려 기존의 소위 낙후되었다고 판단되는 지역 특히 청계천 주변의 개발은 자본의 이해를 확장하고자 하는 국가 또는 자치단체의 주요 정책으로 오래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된다. 청계천 변은 소위 ‘공간의 효율적 이용’을 둘러싼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가난한 이들은 삶과 경쟁력을 잃고 내밀리거나 쫓겨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토지는 각각의 물건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서 유용성 가치 즉 ‘사용가치’로 인식되기보다 공간의 입지에 의해 상품으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교환수단’으로서 인식되기 때문이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지주들은 건설자본의 도심 집중 현상과 함께 계속 뛰어오르는 지가에 맞춰 보다 높은 이윤을 실현할 수 있는 용도로 개발에 뛰어든다. 2002년부터 추진된 서울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 사업으로 청계천·을지로 일대 땅값이 약 5조7000억 원이 올랐고 이 가운데 3조7000억 원은 순수한 재개발 사업의 영향이란 분석 결과가 나왔다.10) 2019년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청계천 을지로 인근 명동 상권 내 한 토지는 3.3㎡(약 1평)당 6억 400만원으로 16년째 전국 땅값 부동의 1위11) 를 차지하고 있으며 실제 거래가격은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청계천 주변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은 토지이용에 대한 높은 이윤을 실현하기 위해 지가를 계속 상승시킬 것이며, 감당할 수 없는 임대료로 직접적 피해는 가난한 이들의 주거를 해체시키는 쪽으로 나갈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노동자와 서민의 재생산영역에 대한 침해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지가를 지불하고도 충분한 이윤이 남지 못하면 지가가 낮은 곳으로의 이전을 강요당해 영세상공인의 산업생태계를 심각하게 해체하는 요인이 되고, 상업자본이나 금융자본과 같이 자본주의의 생산 활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공간, 이윤을 위한 수단으로 재편되어 나가고 있다. 도시를 둘러싼 한국에서의 ‘젠트리피케이션’은 그 개념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도시 형성 자체가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형성되고, 도시공간이 자본에 의해 계속 재편될 것이라는 논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지역과 공간이 재생산 및 여타 필요한 사용가치로 쓰이지 못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에 유리하게 사용된다는 논리가 청계천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따라서 청계천의 틈새에서 생계를 잇던 영세상인 및 공구상가의 주인 그리고 노동자까지도 이미 자본화된 토지에 접근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 그 자본에 의해 착취를 당하거나 철거민이 된 채 이 공간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주10) 한겨레. 2019-04-04
주11) 동아일보 2019-05-31

3. ‘신개발주의’, 그들의 개발 정책

‘신개발주의’는 개발사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용적률, 건폐율, 토지가, 조세 등에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민간개발자는 개발에 드는 재원을 조달해 사업을 실행에 옮긴다. 이러한 사업은 신행정수도 이전, 청계천복원과 그 주변 재개발, 뉴타운개발 등 하나같이 우리의 미래에 심대한 영향을 가져다줄 사안에 관철되어 나갔다. 이러한 신개발주의 프로젝트들은 한결같이 생태, 환경, 역사, 문화, 여가 등의 시대가 요구하는 주제로 미화되거나 포장되어 나갔는데 기존에는 개발 주역이 국가였다면 신개발주의에서는 국가와 민간부문이 공고한 파트너와 동반관계를 이룬다는 차원에서 크게 구별하여 나뉘었다. 이렇게 기존의 개발은 ‘필요’를 채우기 위한 개발을 양산했다면, 신개발주의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논리였지만 결국 개발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개발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개발을 둘러싼 ‘담론’은 청계천복원 공사의 사례처럼 도시경쟁력 강화라는 미명 아래 생태, 환경, 역사, 문화, 등 시대가 요구하는 주제로 포장된 채 외형적으로 서울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개된다.12)

주12) 조명래, 최병두. 2005.04.22. 신개발 주의를 멈춰라 / 출판사 환경과생명

한편 청계천 ‘산업생태계’ 가치도 이미 오래전부터 몇몇 연구자와 활동가 사이에 그 중요성이 논의되어 왔다. 황학동 벼룩시장과 공구상가의 경우 겉보기에는 남루해 보여도 상당히 역동적이며 경쟁력을 갖춘 생산 공간이다. 수많은 자영업자와 숙련노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연줄망을 통해 이 지역을 서울 전역은 물론, 전국, 나아가서는 세계를 상대로 하는 독특한 ‘산업지구’로 만들고 있다. 복잡한 하청조직을 통해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기간산업과 연결되어 있으며, 거래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상당한 고용 기회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면, 금속-기계-공구 부문을 보면 금속재료, 가공-제작, 판매-유통의 라인을 형성하여 네트워크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뿐만 아니라 점포 간에 품목들을 분산하고 집적하는 과정에서 품종과 생산량을 배치하고 재배치하는 기술을 쌓아 왔다. 세운상가와 주변 전기-전자 부문은 기존의 상품들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평화상가와 동대문을 중심으로 한 의류봉제 산업은 모방을 통해 디자인을 개발하고, 제작의 속도와 유행의 속도를 빠르게 순환시킴으로써 품목을 세분하고 확장하는 기술을 터득하여 왔다. 황학동의 만물시장은 근대화로 인해 버려져 부유하는, 고장 난 상품이나 박물들을 고물이라는 동일한 차원에서 재생하는 작업을 통해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기술을 결합하는 방식들을 찾아냈다. 이러한 기술적 노하우를 바탕으로 청계천의 생산 시스템은 한국 경제 전반의 견인차 구실을 해 왔다. 청계천은 각종 산업 아이디어가 생산되는 진원이었다. 새로운 품목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품목에 투여되는 공통기술을 집적하였다. 청계천 변 사람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버려졌지만 버릴 수 없는 만물을 수집-재생-생산함으로써 그들의 꿈과 기억을 외면화하였고, 눈썰미와 손재주를 바탕으로 한 모방과 해체의 기술은 다품종 소량생산의 체계를 자생적으로 만들어 갔다.13)

주13) 류제홍. 청계천의 구원을 꿈꾸며, 청계천에 말걸기

그러나 2천년대 초반부터 청계천 일대 도시개발 분야에 신자유주의 이념이 적용된다. 정부와 서울시에서는 "동북아의 중심도시로써 서울을 국제적인 상업 도시와 금융거점 도시로의 개발" 한다는 목표 하에 청계천 복원 이후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하여 외국자본을 유치를 꿈꾸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특구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청계천을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역으로 탈바꿈하여 건설경기의 활성화를 추진한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경제자유구역법' 이 통과된 후 이미 각 지자체에서는 경쟁적으로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신청하였다. 부산, 마산 광양항 및 인천공항 주변의 영종도, 송도, 김포매립지에 대한 경제특구지정을 통한 물류 거점지역 육성과 경기도 인근에 '국제적인 관광․레저단지', '국제업무․지식 기반산업 중심지', '국제금융단지', '관광․숙박 전시단지'를 개발하고, 마포구 상암동에 '디지털 미디어 센터'를 조성키로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구상에서도 드러나는데, 현 청계천 복원사업의 결과로써 경제특구 지역에 대한 벨트를 형성하고, 청계천 일대의 전통적이고 비공식적이며, 저소득층과 관련된 부문을 개발을 통해 정리하고 그 후 이곳에 외국인투자기업이 들어서면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월차유급휴가, 유급 생리 휴가를 적용하지 않아도 됨은 물론 이 밖에 파견법에 명시된 근로자 파견 대상 업무 제한과 파견 기간 제한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도시빈민의 생존권은 물론 향후 이곳에서 일할 노동자들의 노동권조차 결국 밀려나는 형국이 될 뻔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개발 논리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경제문화 도시 또는 도시 균형 발전프로젝트 등으로 이어지거나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해 등장한다.

서두에서 짧게 언급했듯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모든 시민은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시는 어느 한두 사람 특히 돈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이 관철되는 곳이 아니고 모든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지기에 배제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에서의 도시개발은 사람들의 삶을 유린하며 전개되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청계천 노점상의 삶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news.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