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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1천 명 사살, 아군 1명 부상당한 신의 전투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5) - 1950년 7월 4~6일 충주 동락마을
  • 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 승인 2019.09.0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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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연대 1계급 특진으로 유명한 충주 동락마을 전투에서도 인민군과 전투한 것이 사실인지 의심 간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6사단이 관련되었다. 홍천 복골이 2연대, 이천 곤지암리가 19연대였다면 이번 충주 동락마을은 7연대였다.

장호원에서 내려오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하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는 7월 4일 동락리(신니면 문락리 동락마을)를 지나던 중 갑자기 인민군 정찰대를 만나 전투를 벌였다. 『한국전쟁사』는 이날의 전투에 대해 “너무 갑작스런 일이어서 본대에 연락할 사이도 없이 즉각 사격 명령을 하달하고 그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한 발의 응사도 못하고 퇴거하였다.”라고 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238쪽)

그림 1) 『한국전쟁사』 2권 238쪽 소대장 윤주용 소위의 증언

그런데 이런 이상한 전투는 7월 6일에도 반복되었다. 같은 국군 부대는 전날 전투가 있었던 같은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을 발견하고 오후 5시 “경계병 하나 세우지 않고 옷을 벗은 채로 나무그늘 밑에서 잠에 빠져 있는” 인민군을 공격했다면서 ”이윽고 어둠이 깔리면서 그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우글거리는 소리는 여전“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246~247쪽)

17일에 시작될 국군 17연대의 화령장 전투와 더불어 국군 연대원 전체가 1계급 특진했다는 전투에 대한 설명으로는 지나치게 빈약하고 자의적이었다.

1차 공격

춘천에서 후퇴한 국군 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는 원주를 거쳐 7월 4일 충주로 후퇴하여 충주중학교에 집결했다. 당시 국군이 상대해야 할 인민군은 15사단이었다. 산하에 48연대, 49연대, 50연대를 두었던 이 부대는 예비사단이었으니(국방부, 앞의 책 제1권, 40쪽) 전쟁 초기 전투에는 투입되지 않았을 것이고 교체를 준비하며 선발부대를 뒤따랐을 것이다.

국군 6사단은 주둔지를 방어하다가 국군 1사단에게 인수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다. 당시 국군 1사단은 평택방면에서 음성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동락마을을 비롯한 도로에는 남쪽으로 이동하려는 피란민이 많이 모여 있었다.

국군 6사단장은 7월 4일 저녁 8시 이천 방면에서 후퇴한 사단 헌병대로부터 인민군 15사단이 7월 3일 장호원에 진입했다는 정보를 듣고 원주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한 7연대에게 “장호원을 즉각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늦은 밤이 다가오는 시간에 명령을 받은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이 명령이 무모하다고 보고 먼저 1개 대대로 확인한 뒤 공격하겠다고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정찰 임무를 받은 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 4개 중대는 사단 참모의 “빨리 출동하라”는 독촉을 받으며 주둔지인 충주중학교를 떠나 장호원 방면으로 이동했다. 출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사단 참모로부터 독촉을 받을 정도였다는 것을 보면 국군 6사단이 인민군과 접촉 없이 후방으로 너무 멀리 후퇴했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국군이 출발한 때는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으며 이동 수단은 차량이었다.

주둔지를 출발한 선발중대 6중대가 20km 정도 이동하여 동락마을 부근에 도착하면서 정찰 소대가 인민군 측 차량의 엔진 소리를 듣고 이 사실을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이 소식은 곧 대대장에게 전달되었고 잠시 멈춰 소리를 듣던 대대장은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자 계속 진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전투 당시 대대장은 300미터 후방에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도 그 정도 뒤에 떨어져 왔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찰 소대가 들었다는 엔진 기계음을 후방에 있던 대대장이 안 들린다고 행군을 계속하라고 했다고 하지만 여태 전조등을 키고 달려오던 차량의 운행 속도를 줄이고 전조등도 껐다고 한다.

그림 2) 1973년 동락리 전승비가 세워졌다. 감우재 전승비보다 건립이 늦었다. 2019년 3월 8일 조사

잠시 뒤 1차 공격이 시작되었다. 선발 소대가 신니면 문락리 동락마을 모도원 산모퉁이를 돌면서 갑자기 인민군을 만나게 되었다. 이 상황을 직접 겪었다는 윤주용 소대장은 “우리 소대는 분명히 장갑차의 굉음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나는 구경 50mm 기관총과 각자의 소총에 탄약을 장진케 한 채로 조심스럽게 전진시키고 있었는데, 모도원의 한 산 모퉁이에서 그들 정찰대로 보이는 장갑차 1대와 여러 대의 사이드카와 충돌하게 되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어서 본대에 연락할 사이도 없이 즉각 사격 명령을 하달하고 그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한 발의 응사도 못하고 퇴각하였다.”라고 증언했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238쪽) 피차에 달빛에 의존해 이동하던 중이었으니 비록 가까운 거리였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조준 사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갑차까지 보유했던 인민군이 국군 1개 소대를 만나 아무런 대응사격 없이 도망가기 바빴다니 믿기 힘든 주장이었다. 원래 무기가 없는 집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전투를 벌인 2대대는 인민군이 이제 음성까지 내려왔다고 판단하고 더 이상 장호원까지 전진하지 않고 인근에 각 중대를 배치했다고 하며, 7월 5일의 아침이 밝아서야 교전 현장에서 장갑차 1대, 사이드카 2대, 시체 5구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연대장은 7월 5일 새벽 2시에 2대대장으로부터 이 전투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고 하므로 전투는 자정 전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기록

7월 4일 충주 동락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위 설명은 『한국전쟁사』 제2권에 소개되어 있는데 앞의 책 제1권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르게 설명하고 있어 의문이다. 관련된 내용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라 연대장은 제2대대로 하여금 병암리로 직진토록 하는 한편 제3대대는 음성으로 우회시켜 병암리 부근에서 지대 내의 적을 협격토록 하고, 제1대대는 예비로 공치(控置)하였다.

각 대대는 동월 4일 08:00에 충주를 출발하여 삼거리(충주 서쪽 10km)에서 분진한 다음 각각 목표를 향하여 약진하였다.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10:00에 동락리에 이르렀을 무렵 모도원에 1개 중대 규모의 적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대대를 도로 양쪽의 능선으로 전개시켜 교전수합에 그들을 일축(一蹴)하고 추격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퇴각하는 적을 추미(追尾)하여 서진 중 19:30 모남리(병암리 동남 4km)에 1개 연대로 추산되는 적이 남침하고 있음을 발견하기에 이르자 동락리로 물러나 급편진지를 점령하고 그들의 침투에 대비하였다.“(이상 국방부, 앞의 책 제1권, 304쪽)

이 내용과 제2권의 내용을 비교하면 먼저 장호원 방면으로 출동한 부대가 2대대만이 아니라 3대대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군 7연대 2대대의 출동 시간도 다르다. 제1권은 아침 8시라고 했지만 제2권은 저녁 8시에 전조등을 켜고 이동했다고 했다.

또 제1권은 모도원 충돌 후 퇴각하는 인민군을 쫓다가 저녁 7시 30분 모남리에 주둔한 1개 연대 규모의 인민군을 발견하고 동락마을까지 후퇴다고 했다. 하지만 제2권은 추격을 중단하고 그 자리에 중대를 배치했다고 한다.

제1권이 밝히고 있는, 모남리에서 1개 연대 규모의 인민군을 발견했다는 내용은 제2권의 서술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닐 수 없다. 모남리는 인민군 장갑차와 충돌했다는 모도원에서 2km 남짓 떨어진 마을이었고 인민군이 주둔했을 것으로 짐작했다는 병암리에서는 6km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7월 4일 모남리에서 1개 연대 규모의 인민군을 목격했다는 제1권의 이 기록은 전투 후인 7월 5일과 6일 국군 6사단이 증평으로 이동했다는 사실과 크게 모순된다. 인민군 주력 부대를 눈앞에 둔 채 이동했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오락가락하면서 서술한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의 『한국전쟁사』 서술은 역사 조작의 흔적을 계속 남기면서 이후에도 수없이 반복된다.

그림 3) 전쟁 공원 안내판은 7월 4일 벌어진 전투를 소개하지 않았다.

2차 공격

7월 6일에도 같은 동락마을에서 2대대의 공격이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다시 인민군을 발견했고 또 커다란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인민군은 이틀 전 공격을 당했던 군대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7월 5일 아침 전리품을 후송한 2대대는 주둔지인 충주로 되돌아가지 않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진천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방으로 우회하여 돌아가는 길인 증평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 출발하려던 중 사단으로부터 진천이 이미 점령당했다는 정보를 듣게 되어 음성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2대대장은 오후 2시경 망원경을 통해 동락초등학교에 다시 인민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김 소령은 쌍안경으로 농암리와 무극리를 두루 살피고 충주와 음성에 이르는 꾸불꾸불한 두 줄기 길을 번갈아 추적하기 시작하여, 그 초점이 동락리에 이르렀을 때 쌍안경을 내리고 손수건으로 눈을 닦은 다음 다시 드려다 보고 있었다. 그 곳은 지난 밤 적과 최초로 마주쳤던 곳이기도 하며 혹 제3대대가 포진하고 있을지 모르는 동락리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혹시 지난밤에 있었던 갑작스런 총질이 저들에게 안 들린 건가? 우리가 인민군한테 쏜 게 맞나 생각하진 않았을까?

대대장은 전령을 시켜 중대장들을 소집한 뒤 함께 동락마을을 살펴보았다고 했다. 이 상황에 대해 이번에도 6중대 소대장 윤주용 소위가 증언했는데 살펴본 결과 학교 운동장에 10여 문의 야포와 보병부대의 개인화기가 질서정연하게 채워져 있었고 도로 옆에는 장갑차를 포함한 10여 대의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인민군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전날 같은 자리에서 장갑차 1대와 사이드카 2대, 5명이 전사한 자리였음에도 경비를 서는 인민군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인민군이 바보라는 식의 이런 증언은 계속 반복된다.

무방비 상태의 인민군을 발견한 중대장들은 망설이지 말고 어두워지기 전에 공격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대대장은 “우리는 300여의 소총병인데, 비하여 그들은 5~6배가 넘어 보이는 대병력에 중장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대대장인 나로서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일이 잘못될 경우 병력이 크게 손상할 것은 물론 연대장의 명령에 항거하였다는 책임을 면치 못하리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림 4) 전쟁 공원에는 마을을 향해 박격포를 날리는 대대장과 신용관 중위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동락초등학교에서 300미터 떨어진 바로 저 자리에서 쐈다고 한다. 이 조형물을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의 심정은 그리 편하지 않을 것 같다. 2019년 3월 8일 조사

여기서 “연대장의 명령에 항거했다는 책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연대장으로부터 전투 행위를 제한하는 명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난 7월 4일의 전투에 어떤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때 대대장은 또다시 연대장의 명령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행동을 먼저 한 후 나중에 보고하기로 결정하고 연대장의 명령없이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2대대는 오후 3시 동락국민학교를 향해 출발, 오후 5시 공격을 시작했다. 주둔한 인민군은 경계병을 세우지 않고 옷을 벗은 채 나무그늘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일부가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민가를 들락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하니 “민가”까지 대상에 포함된 기습 공격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던 상황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기습사격을 받은 그들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초로와 같이 사라지거나 구명원생한 자들은 방향을 분석치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사이에 아군이 사격한 철탄의 표적이 되어 격살되기도 하였는데 이 와중에서도 그들 포병만은 포구를 제8중대가 있는 곳으로 돌려서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라고 묘사하였다.

1,500명이 넘는 인민군의 대응이라곤 포격을 준비하는 것에 그쳤다는 것이고, 인민군 측의 이런 대응조차 포 다리와 조준경도 없이 발사한 국군의 박격포 단 세 발에 제압당했다고 했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247쪽) 믿기 힘든 신의 포격술이었다.

전사한 인민군 1천 명, 부상당한 국군 1명

이어 “이윽고 어둠이 깔리면서 그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우글거리는 소리는 여전하여”라고 하면서 일부 중대장들이 소탕전을 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대대장의 명령이 있었다고 했다.

여태까지 동락마을에 주둔한 인민군들을 근거리에서 공격했다지만 실제 300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어두워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거나 “우글거리는 소리”는 여전했다는 것은 상당히 먼 거리에서 공격했을 때 할 수 있는 말로 보인다.

대대장 김종주 소령은 다음날인 7월 7일 새벽 5시 “동락리에서 적 1개 연대 격멸”이라고 보고 했다. 그는 이후 발견된 인민군의 시체만 1천여 구에 달했으며 마을을 수색하여 97명을 사로잡은 반면 아군의 피해는 부상 1명 외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장소가 분명하지 않고 일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전투와 관련되어 보이는 내용을 라주바예프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보고서에는 “제2군단의 우익에서 진격하던 제15보병사단은 정찰 및 경계의 미숙으로 인하여 음성 북쪽과 충주 서쪽에서 2회에 걸쳐 적의 매복에 걸린 결과, 많은 손실을 입고 신양리(생극, 음성 서북방 14km), 대소리(음성 동북방 12Km)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방어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204쪽)라고 했다. 대소리는 충주 대소원면 대소리를 말하는데 이 보고서에서 매복에 걸렸다는 음성 북쪽이 동락마을을 말한다면 대소리는 이곳에서 15km정도 지난 곳이었다. 이 보고 내용은 후발부대가 매복에 걸려 입은 손실로 신양리에 머무른 한편 대소리에 있던 선발부대 역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후 7월 9일 인민군 1사단이 음성지역에 투입되면서 인민군 15사단이 7월 10일 음성을 점령했다고 한다.

그림 6) 공원 내 시설물조차 전투일이 6일과 7일로 일치하지 않는다. 관련자들 조차 전투일에 대해 확신이 없는 모양이다.

충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국군 6사단이 충주에 주둔하던 7월 3일부터 5일 사이 충주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6사단 7연대 헌병에 의해 총살당했다. 당시 후퇴하던 헌병 10여 명이 충주경찰서에 들어와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경찰들은 이 명령에 따라 동네마다 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고, 주민들은 헌병에게 이끌려 호암동 싸리고개로 이송되어 집단희생당했다. 당시 충주군 살미면에서는 주민 73명이 이 사건으로 희생되었는데 현장에서 최은용 등 3명이 살아 돌아왔다. 시신을 직접 수습한 주민은 군인들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쐈다고 증언했다. 남로당의 대표 지도자인 김삼룡의 고향이 엄정면이었기 때문에 충주지역에는 좌익단체 가입자도 많았고 그런 이유로 보도연맹원도 많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당시 충주경찰서장은 차일혁 경감이었고 이 전투와의 관련성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민간인 피해는 없었을까?

인민군 15사단이 당시 어디까지 진출했는지 라주바예프의 보고서나 『조선전사』 등 이북의 역사문헌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충주의 보도연맹원들이 7월 5일까지 충주경찰서에 의해 학살당한 사실을 볼 때 7월 4일 밤과 5일 새벽에 있었던 동락마을 1차 전투는 인민군이 도착하기 전의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7월 6일 2차 동락리 전투의 인민군 태도는 이런 의문이 이상하지 않음을 뒷받침한다. 이미 7월 4일 같은 장소에서 공격을 당해 5명이 사살당했음에도 인민군 측이 경계를 소홀히 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1차 공격을 당한 뒤 인민군 측의 반격도 없었다. 공원의 안내문에도 7월 4일의 전투는 소개되지 않았다. 전투가 없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7월 6일의 전투에 있어서도 어두워지면서 인민군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으나 우글거리는 소리는 여전했다는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각 중대장들은 소탕전을 벌이자고 주장했으나 대대장은 아군간의 총격전이 염려되므로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다음날 확인한 인민군 피해는 1,1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응사격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7월 4일 사망자들이 피란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피란민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참전 군인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같은 날 오후 2시 30분을 지나면서 피란민 대열이 다시 도로를 메웠다고 한다. 전투 역시 마을을 향한 공격이었음이 분명하므로 주민들의 피해는 없었는지 엄밀히 조사되어야 한다.

그림 7)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가 동락국민학교를 향해 박격포를 쏘던 자리에 전쟁공원이 조성되었다. 여기에는 두개의 전승비와 여러 개의 조형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2019년 3월 8일 조사

진실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말한다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에는 『6‧25참전 전승비』가 있는 곳에 전쟁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안내판에는 “1950년 7월 7일, 이곳은 6‧25전쟁에서 최초로 승리한 전투지이며 노획된 소련제 무기는 유엔 16개국이 한국전에 참전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라면서 1973년 처음 전승비를 세웠으며 2016년 7월 7일 새로이 정비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7월 4일 밤에 벌어진 전투는 누락되었으며 6일 벌어진 전투가 7일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국방부 자료와 기념물 등에는 이때 공격당한 인민군 소속이 15사단 48연대라고 기록하고 있어 라주바예프의 50연대 주장과 차이가 있다.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인민군 15사단 48연대는 7월 17일 화령장 1차 전투, 즉 상주 화서면 상곡리 전투에서 또 한 번 전멸당한다는 비운의 부대였다.

『한국전쟁사』 국방부의 주장에 따르면 동락마을 전투는 7월 6일 하루 공격만으로 거의 1개 연대 규모에 해당하는 인민군 1,100여명을 사살하고 97명을 사로잡는 한국전쟁 최고의 대첩에 해당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6‧25전쟁사에 있어서 그 어떤 전투보다도 최대 규모의 승전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전투에 대한 보고를 언제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승만은 처음으로 국군 6사단 7연대원 전원을 1계급 특진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전공이 최고의 전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동락전투와 같은 시기인 7월 5일부터 5일 동안 600여 명을 사살했다는 감우재 전투, 7월 말 5일 동안 600여 명을 사살했다는 상주 화령장 전투, 8월 29일 650명을 사살했다는 해병대의 통영 전투 등은 모두 상당한 규모의 전쟁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고 해서 이 전투들이 뛰어난 전투로서 인정받을 만 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단일한 전투로 따지자면 모두 동락전투만 못한 것이 분명하다. 과연 이 전투가 어디까지 사실일지 의문이 드는 이유이다.

실제 동락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본다면 동락마을은 상당히 넓은 평지의 중심이다. 3백 명이 이르는 군인들이 다가온다면 관측이 어렵지 않아 조금만 신경을 써도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군인들의 접근을 보고도 대응하지 못한 것을 보면 대부분 민간인들이 아니었는지 그 가능성을 확인해야 한다.

당시 동락마을에 피란민이 많았다는 사실은 국방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244쪽에는 인근에 “피란민이 많이 모여 있던 어느 암자”가 있었다고 했으며, 247쪽에는 “(7월 6일) 14:30이 지나면서 피란민의 대열이 노상을 메웠고 한결같이 남으로 향하여 황급히 내닫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로보아 전투 중 피란민들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후퇴하던 국군 6사단 7연대 헌병대는 충주경찰서에 소집되어 감금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7월 5일부터 8일까지 충주시 호암동 싸리재에서 총살했다. 진실은 그들의 전투가 적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고, 군인들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webmaster@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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