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은 아직 이름이 없다. 4.3폭동으로 불리다가, 4.3사건…, 4.3학살…, 4.3항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4.3기념관 백비는 여전히 누워있다.

▲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고 쓰인 백비의 모습

미군정이 자행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

1945년9월8일 맥아더 포고령이 발표된다. 38선 이남의 군인 경찰은 물론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미군이 강탈한다.

미군정은 친일 부역자들을 그대로 등용, 경찰요직에 앉히고 군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군수 판사 자리를 내준다.

미군정 경무부장을 지낸 윌리엄 매글린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일제에 충실했던 그들을 다시 재등용하지 않을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노예는 주인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바뀌었을 뿐 식민지 그대로인 현실을 참다못한 제주도민들은 1947년 3월1일 독립만세를 재연했고, 위협을 느낀 친일경찰은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1948년5월10일 미군정은 분단통치를 위해 38선 이남에만 단독선거를 실시했고 분단을 원치 않은 제주도민은 선거를 거부하고 산에 오른다.

분단통치를 거부한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빨갱이섬)라 칭한 미군정은 ‘초토화 작전’을 펼쳐 중산간마을 95%를 불 태우고, 2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다.

▲ 1948년 5월5일 4.3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윌리엄 딘 미군정장관이 제임스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과 대화하고 있다. 그 옆으로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 연대장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제주4.3 화해와 상생?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을 ‘화해 와 상생’으로 잡은데 이어 ‘제주 4·3 위원회 백서’에도 ‘화해 와 상생’이 등장한다.

화해란?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앰. 상생이란? 서로 북돋우며 다 같이 잘 살아감.

제주4.3에 화해할 일이란 없다. 누가 누구와 싸웠단 말인가. 단지 미군의 집단학살이 있었을 뿐.

서로 안 좋은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 오로지 살인의 흔적만 남았을 뿐.

상생도 가당치 않은 말이다. 죽인 자와 죽은 자가 어떻게 같이 잘 살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왜 어떻게 죽였는지 몰랐을 때는 그렇다 쳐도 미군정이 분단지배를 위해 국가폭력을 행사한 것이 밝혀진 이상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되어 미군은 집단학살을 자행하고도 처벌은커녕 사과 한마디 없이 범죄 현장에 버젓이 주둔하면서 군작전통제권을 비롯한 모든 권력을 그대로 누리고 있는가.

미국이 답하라

어떤 진실이 더 규명돼야 하는가. 제주4.3이 대한민국 정부가 생기기 전 미군정의 군대와 경찰이 자행한 국가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일제 강점기 때만도 못하다. 그때는 일본의 책임이라도 물을 수 있었다.

이제라도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주한미군과 미국은 당장 제주4.3에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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