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의 빈민스토리(4)

▲ 2019년 2월 21일 100년 전통 5일장 지키기 궐기대회 한 장면

유성 오일장은 사라지는가?

유성 오일장은 여전히 활기차게 느껴졌다. 대보름을 앞두고 충청권과 멀리 강원도에서 올라온 다양한 나물과 밤, 고구마, 곶감 등 농산물이 알록달록한 파라솔 아래 좌판을 펼쳐 놨다.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의 손에는 호떡이 하나씩 들려 있고, 봄을 알리는 신상품과 생활용품을 고르는 사람으로 장터는 북적였다. 여느 장터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지만 어딘가 어두워 보이기도 했다. 오일장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엔 재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 오일장은 1916년 10월 15일 최초로 개장된 이래 장대동 일대를 중심으로 세를 확장해 5일마다 서는 전통시장이다. 

2019년 2월 21일 다시 찾은 유성구청에서는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충청지역과 재개발해체주민위원회가 주상복합아파트 거주자와 점포를 소유한 외지인으로 재개발 추진 반대 집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 집회를 추진한 대전·충청 지역의 노점상 대표 김성남 지역장은 이렇게 말한다.

“100년의 역사가 만들어 낸 전국 5대 전통시장에 들어가는 유성시장을 시대착오적인 개발 논리로 밀어버리고 초고층 아파트를 짓는다는 것은 대전시민을 위해서도, 대전시와 유성구의 발전을 놓고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국 5대 전통시장 중에 재개발에 묶여 전통시장으로 등록조차 되지 않고 정부와 지자체의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지원이 전혀 없는 곳은 유성전통시장이 유일합니다. 또한, 유성 오일장은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이 있었던 우리 지역의 중요한 항일역사문화유적지입니다. 우리 후대에 물려줄 항일독립역사 문화유적지를 잘 보존하고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이를 훼손시키는 결정을 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이 장터에는 '을미의명효시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진잠 현감을 지낸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켜 을미의병의 효시가 된 곳이다. 유성 오일장과 시장은 대를 이어 생활 터전을 잡고 사는 수많은 상인과 1,000명이 넘는 노점상의 생존과 생활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유성구민과 대전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대전지역의 소중한 생활문화 공간이다. 그 후 유성 장대 B구역 재개발추진위 조합은 국공유지 면적이 35%에 달하고 재개발 추진위 측 동의면적 30% 미만으로는 조합설립이 어려운 상황이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중 토지면적 절반 이상의 토지 소유자 동의 요건 미충족을 이유로 유성구청은 이를 반려했지만 법적 공방이 오가고 있다.

전통 민속 오일장과 노점상 

전국적으로 마트가 들어서면서 오일장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오일장이 언제부터 열리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장시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수가 증가하는 가운데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오일장이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오일장이 형성되어 나간 것은 조선 후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부터다. 이 시기 봉건적인 계급 구조가 소멸해 나가는 대신 자본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부상 되었다. 소작농과 기아 상태였던 가난한 사람은 도시로 유입되면서 노점상과 난전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들은 하천과 산 중턱 비어있는 공터에 토막집을 지어 ‘토막민’이라는 이름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한다. 근대화의 바람으로 세계 각처의 문물이 유입되고 유통시장은 확대되어 곳곳에 장터가 들어섰다. 다양한 특산물과 상품은 보부상에 의해 곳곳에 이동되어 팔려나갔다. 보부상의 활동 반경은 커지고, 판매하거나 교환할 상품을 준비하는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5일 정도 걸려 점차 오일장이란 형태로 장이 열리며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자본은 일제 강점기 적극적 친일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서서히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해방 후 조선에 남겨진 일본인 자산은 국영기업이 되거나 민간에게 매각되었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민중의 삶의 처지는 나아진 게 없었다. 여전히 농촌은 소작농과 농업 노예로 생계를 이어갔고, 도시는 노동 노예로 전락하여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극도의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장터는 사람이 모여 물건을 교환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보를 교환하는 공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사회 현실을 이야기하는 공론장이었고 민중은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노점상 

한국전쟁은 민중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빈익빈 부익부로 극단적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자본가는 미국과 정부의 도움을 받아 농민 수탈에 의한 자본축적에 기반하여‘부’를 축적해 나갔다. 전쟁의 피해자인 민중은 살기 위해 노점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생존을 이어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노점상은 극히 한정된 자원과 경제적 조건에서 사회안전망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노점상의 물품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데 다름 아닌 미군 부대에서 사용하던 것이 시장으로 흘러나와 거리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지고 물자가 부족한 시절, 이들 물건은 많은 소비자의 선망에 대상이 되었다. 부산의 국제시장과 대구 등 대도시의 풍물 벼룩시장, 서울의 청계천 등이 이러한 흐름 속에 점차 활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서울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수도의 지위를 갖게 되고 해외ㆍ월남 교포 귀환과 시확장 등으로 1949년 특별시로 승격되는데,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인구 규모는 141만 8,025명이었다. 이후 서울 인구는 1950년 6·25전쟁 발발 등으로 잠시 줄었으나 1955년 157만 4,868명을 기록하며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1959년에는 209만 3,900여 명을 기록하며 서울의 인구는 처음 200만 명을 넘어섰다. 

박정희 군부독재와 개발시대 노점상 

▲ 노점상[사진 : 노무라 모토유키 제공]

전쟁의 복구가 거의 끝나가고 도시가 발전하면서 노점상에는 또 중대한 변화가 찾아온다. 1960년대 박정희 군부독재에 의해 본격적으로 독점재벌 중심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전개된다. 저곡가 정책과 농축산물 수입 개방에 따른 농촌 파탄으로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자식을 키워 내기란 도저히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 시발점으로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서울은 1963년 325만4,600명의 인구를 기록, 처음으로 거대도시의 면모를 갖춘다. 이후 서울은 1970년 543만3,200명 1976년 725만 5,000명 983년 920만4,000명을 기록하며 1963~1983년 20년 동안 무려 60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늘어난다. 마침내 서울은 올림픽을 개최한 1988년 1028만6,500명의 인구를 기록, 처음으로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메가시티’로 변모했다. 이후에도 완만한 증가세를 보인 서울의 인구는 1992년 1096만 9, 8000명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는다. 그러다 1993년 서울의 인구는 1992년보다 4만4,000명 감소한 1092만5,400명으로 기록하며, 6.25 전쟁 이후 처음 인구가 감소한다.  2016.06.01 / 한국일보. 서울 인구 변화사

한국경제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장 과정으로 진입하게 된다. 하지만 대외 의존적 국가 경제 구조하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서로 유기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즉 생산은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소비는 수출을 통해서 선진국에서 이루어지는 왜곡된 자본순환구조가 형성되었다. 단지 국내시장은 소비시장으로 존재하기보다 저임금노동력이라는 생산의 제공지라는 측면에서 존재하게 되고, 국내 유통 부문은 빈약한 내수시장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한정된 발전에 그쳤다. 70년대까지도 국내 유통시장은 대자본에 의해 자본주의적으로 재편되지 못한 채 전근대적이고 영세한 규모였다. 이렇게 국내시장 규모가 이윤을 창출할 만큼 크지 않고 낮았기에 상품유통은 재래시장과 노점상등 비공식 부문에 의존했다. 

많은 사람이‘이농 현상’으로 도시에 유입되면서 젊은 층과 여성 일부를 제외하고, 돈이 없거나 학력이 낮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중장년층이 도시 변두리 달동네 판자촌에 정착하면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자본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노동 인력을 필요로 했다. 이런 조건에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늘어나는 노점상들은 도시가 담아내고 일부는 공식적인 노동시장으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늘어난 노점상을 대대적인 재정비로만 일관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정부 역시 단속을 통해 광범위한 도시 빈민의 생존 근거를 위협함으로써 심각한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노점상 덕분에 농촌 파탄으로 인한 농민뿐만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가 도시에서 살아가기위해 필요한 생필품을 그나마 낮은 가격으로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었다.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 달동네도 마찬가지로 저임금 노동력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로서 ‘계륵’이지만 필요한 존재였다. 

더욱이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가난의 사각지대를 노점상이 스스로 메우고 해결해 나갔기에 다소 묵인했다. 노점상은 대도시 곳곳 장사가 될 만한 곳을 중심으로 급속히 늘어가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노동시장의 외각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생업뿐만 아니라 임시방편적이거나 한시적으로 직장을 얻을 때까지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시기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절약과 함께 빨리빨리는 시대의 정신이 되었다. 노점상을 바라보는 낭만적 시각이 이 시기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노점상은 정책면에서‘도시 비공식 부문론’으로 발전해 나간다.  도시빈민연구, 정동익, 아침출판사 57쪽 / 이 개념은 1971년 하트(Hart)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그는 도시 경제에 최초로 편입된 사람들의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그러면서도 공식통계에서는 집계되지 않는 고용 기회를 ‘비공식적 경제 활동’이라고 규정했다. 그 후 이 개념은 ILO에 의해 채택되어 개발도상국 도시경제에 관한 수많은 연구가 도시비공식부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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