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3차, 4차 전쟁

612년 7월 25일 살수싸움에서 대패했다는 통보를 받자마자 총퇴각 명령을 내리고 도망쳤던 수양제는 못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새로운 침략전쟁의 불길을 댕겼다. 당시 수나라 국내정세는 침략전쟁을 치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수양제의 폭정을 반대하는 투쟁과 폭동들이 전국 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산동지방에서는 왕박, 유패도, 두건덕, 손안조, 고사달 등이 폭동을 일으켜,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 말라’는 노래인 ‘무향요동랑사가’를 퍼뜨리며 투쟁을 벌였고, 612~613년에는 북방의 백유사 등이 수십만 명의 폭동군 대오를 거느리고 군현을 들이치는 등 전국이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제는 땅바닥에 떨어진 자기의 ‘위신’을 추켜세우려고 또다시 침략전쟁을 꿈꿨다.

613년 3차 수나라 침략 격퇴

▲ 백암성에서 바라본 태자하[사진 : 필자 제공]

613년에 들어서 수양제는 또 다른 침략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수적우세에 기초한 전략’ 대신에 ‘정예무력을 동원한 새로운 전략’으로 나갔다. 후방공급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612년 전쟁패배로 수백만 명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613년 정월 2일에 수양제는 전국에서 날쌘 사람들을 긁어모아 ‘효과’(날쌔고 과단성 있다는 의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월 10일에는 절충, 과의, 무용, 웅무랑장 등을 그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며, 패전 책임을 쓰고 서인으로 강등됐던 우문술을 다시 지휘관으로 등용했다. 그리고 군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중(섬서성)지방의 부자들에게 재산의 다소에 따라 당나귀를 내게 해 멀리 수천 리나 떨어진 이오하원 저말지경(오늘날 신강 위구르 자치주 동남쪽에 있는 저말현 등지를 말한다)에 가서 양곡을 실어오게 했다. 또 여러 주 장정들을 동원해 요서군 유성군에 가서 둔전을 경작케 했는데, 오가는 길이 너무 멀어 자기 농사일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불만을 품고 사방에서 농민폭동이 일어났으며 오가는 길들이 폭동으로 막히는 등 나라 안이 엉망진창으로 되어 버렸다. 전쟁을 개시하기도 전에 패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수양제는 다시 수십만 명의 병력을 긁어모아 요동으로 내보냈다. 자신도 3월 초에는 요동을 향해 떠났고 4월 27일 요수를 건넜다. 요하를 건넌 적군은 왕인공의 지휘하에 신성을 공격했다. 신성을 지키던 고구려군 수만 명은 처음에는 성 밖에 나와서 진을 치고 적들을 격파하다가 적들이 계속 밀려오자 신성 안으로 철수해서 성 방어전으로 돌입했다. 신성을 함락하기 위해 적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으나 실패했고, 신성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견결하게 지켜졌다. 그 후 수양제는 직접 나서서 요동성을 겹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했다. 적군은 바루(높은 다락이 달린 차), 당차(성벽파괴용 차), 운제(높은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공격하는 한편, 땅굴을 파고 성안으로 침입하려고 시도하는 등 밤낮,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적의 기도를 제 때에 간파하고 임기응변으로 20여 일이 지나도록 끄떡없이 성을 고수했다. 

성이 끄떡하지 않자 수양제는 100여만 개의 포대에 흙을 채워 넣어가지고 너비 80보(약 90m)나 되는 ‘어랑대도’(물고기잡이에 쓰는 그물처럼 생긴 큰길)를 성벽 높이와 가지런하게 될 때까지 쌓아 올리게 했으며 그 길을 통해 군사들이 성벽에 접근한 다음 꼭대기에 올라가 싸우도록 했다. 또 8개의 바퀴가 달린 다락 수레를 만들어 어랑대도 좌우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엄호사격을 하도록 했다. 또한, 땅 밑으로 굴길을 파서 성안으로 침입하려고도 했다. 한편 수양제는 우문술, 양의신, 설세웅 등으로 하여금 전과 같은 길로 해 평양성(북평양성)을 치라고 지시했으며, 내호아 주법상의 지휘 밑에 많은 함선을 동원해 이번에도 수륙병진 전술을 사용하도록 조처했다. 

그런데 이때 수나라의 양현감(수나라 건국공신인 양소의 아들로 예부상서였으며, 613년 전쟁의 군량운반 담당책임자)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양현감은 임유관을 점령해 수양제의 퇴로를 막아야 한다는 이밀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낙양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양현감의 정변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요동에 나와 있던 수나라 고관들의 자녀 40여 명이 양현감에게 투항했다. 이것은 수양제와 여러 장수, 관료들의 뒤통수를 치는 큰 사변이었다. 6월 24일에는 양현감과 친밀한 교우관계를 갖고 있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처단될까 두려워 고구려의 백애성(백암성)으로 망명했다. 양현감의 반란 소식을 들은 수양제는 6월 28일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의 퇴각에도 무슨 간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강력한 추격전을 펼치지 못함으로서 수나라 군대는 큰 피해 없이 도망갈 수 있었다. 

614년 제4차 침략 격퇴

▲ 환도성(북평양성) 성벽[사진 : 필자 제공]

두 차례의 직접적 침공을 실패한 수양제는 나라 안이 벌집 쑤셔놓은 듯했으나 아랑곳 않고  세 번째 침공을 서둘렀다. 고위관료들의 냉랭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수양제는 기어이 고구려 침공을 명령했다. 2월 8일 조서를 내려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합리화했다. 그 내용인즉 옛날 황제는 52회나 싸웠고 성탕은 27회나 싸워 천하를 평정했다. 그런데 양제가 황제가 된 후 천하가 다 신속했지만 유독 자그마한 고구려가 공손치 못하고 수나라의 변방을 쳤으니 이번에는 기어코 요수에서 관병식을 하고 환도에서 말을 먹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수서〉권 4 대업 10년 2월 무자).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환도에서 말을 먹이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수나라의 공격의 목표가 환도였다는 것을 뜻하며, 환도란 당시 부수도 북평양성으로 역사서들에서 평양이라고 기록된 곳을 가리킨다. 

당시 수나라는 각지에서 농민폭동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나 수양제는 막무가내로 군대를 내몰았으며 3월 10일에는 양제 자신이 탁군으로 21일에는 임유궁(임유관 근처에 있는 궁)으로 나왔다. 이때 간난신고를 견디지 못해 도망가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여서, 수양제는 도망병들은 모두 가차 없이 쳐 죽이라고 명령했으나 소용없었다. 출정 병사들이 달아나고, 식량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선에 도착하는 병사들이 거의 없었다. 저절로 붕괴 직전의 상황에 직면한 수양제는 7월 17일 회원진에 도착했으나 진퇴양난에 빠져들었다. 이때 고구려는 이러한 치명적 약점을 간파하고 한편으로는 적군을 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나라 반역자 곡사정을 돌려보내면서 빨리 물러갈 것을 종용했다. 궁지에 빠져 있던 수양제는 곡사정의 송환으로 퇴각할 구실이 생겨나자 8월 4일 총퇴각을 개시했다.

고구려-수 전쟁의 역사적 의미

먼저 고구려-수 전쟁의 기본 성격을 명확히 해야 한다. 고구려-수 전쟁은 기본적으로 외세(수나라)의 침략에 대해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조국 방위전쟁이며, 정의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침략과 반침략에 대해 말한다면 한 나라가 다른 주권국가를 근거 없이 공격하는 경우 그것은 부정의의 침략전쟁이고, 침략에 반대하여 자기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해 싸우는 전쟁은 정의의 반침략 전쟁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역사상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의 구별이 없어져, 결국 다른 나라에 침략을 가해 온갖 재산을 강탈하고 인명을 살육하는 침략전쟁을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또는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전쟁을 비판함으로써 결국 침략자와 강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려는 투쟁의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고구려-수 전쟁은 수나라에게는 부정의한 침략 전쟁이며, 고구려에게는 외세의 침략을 반대해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인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구려가 수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하면서 수나라의 동남국경이 한반도 소백산 줄기에 이르렀다는 망발을 하면서 고구려-수 전쟁은 침략과 반침략의 전쟁이 아니라 수나라 내부의 국내전쟁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불성설이요, 망발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일부에서는 침략과 반침략의 성격을 명확히 해명하지 않은 채 당시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패권 장악 전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 역시 수나라의 침략적 성격에 면죄부를 주는 논리에 악용될 수 있다. 

6세기말 7세기 초 수나라의 침공을 반대한 고구려의 전쟁은 중세 조국방위전쟁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전쟁으로서 우리 민족 반만년 투쟁의 역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한다. 고구려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근본요인은 고구려 사람들이 평소부터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무장되고 무술을 잘 연마했으며, 국왕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단결해서 투쟁에 나섰으며, 높은 적개심으로 불굴의 투쟁정신을 발휘한 데 있다. 이와 반대로 수나라에서는 수양제의 폭정으로 상하가 단결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부정의한 침략전쟁에 내몰리게 된 군사들은 하등의 명분도 없는 침략전쟁에 아무건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억지로 전장으로 끌려 나왔기 때문에 전투의지도 없었다. 이러한 군대로 단결된 고구려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당태종까지도 고구려-수전쟁 당시에 고구려왕은 백성들을 돌보아주고 사랑해 상하가 화합되어 있었고 안락하게 지내고 있었으므로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고구려-수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수적우세를 앞세워 야차처럼 달려드는 적들에게 능수능란한 작전과 전술로 잘 대응했다는 점이다. 수양제는 전선과의 거리가 멀고 후방보급이 어려운 조건에서 수백만의 대병력과 수륙병진 전략으로 일거에 고구려 종심 깊숙이 침공함으로써 고구려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 했다. 그러나 을지문덕 장군을 비롯한 고구려군 최고 지휘부는 적의 전략전술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장기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며, 진지-성곽 방위전술과 청야수성전술, 장거리 유인전술, 대규모 포위전술을 옳게 배합하고 적용했다. 적의 주력에 대해서는 전방계선에 오랫동안 묶어 두도록 작전을 펼쳤으며, 적의 별동대인 9군 30만 대군에 대해서는 유인전술로서 적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든 후 대규모 포위전술로 소멸하는 전법을 잘 적용했다. 

신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고려채, 안시성 건안성 등 요하 동쪽 계선의 중요한 성들을 철벽으로 강화해 어느 한성도 함락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고구려 국내 깊이 뚫고 들어가려던 수양제의 작전 기도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적 9군이 멀리 우회해 침공하려고 하자 적군을 종심으로 깊숙이 유인하고 연도의 매개 성들의 방위를 강화하는 한편 철저한 청야전술을 써 적군이 한 톨의 쌀도 구할 수 없게 만들었고 굶주리는 적군의 전투력을 상실하도록 유인하고, 그때를 기다려 살수계선에서 일대 반격전을 벌임으로써 중세 전쟁사에서 빛나는 대승으로 거두었다. 또 이에 앞서 적의 수군 4만 명이 전선사령부가 있는 북평양성으로 달려들었을 때에 적군을 외성 안으로 유인해 섬멸적 타격을 줌으로써 적들의 수륙 병진전술을 파탄시켜 버렸다. 이처럼 고구려군은 각 전선에서 언제나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적들을 꼼짝 못 하게 격파 소멸했다. 고구려군은 수적 우세를 믿고 달려드는 적들을 전략전술적 우세로 때려 부쉈다. 

고구려군의 전쟁 승리의 또 다른 요인은 고구려의 강력한 경제 군사적 역량을 들 수 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경제와 기술, 문화를 발전시켰다. 무기 무장 제작수공업에서도 당시 최고 발전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수나라 군대와 맞먹거나 더 우수한 쇠뇌, 활, 창, 칼 등의 무기와 무장장구류들 그리고 견고한 수군함선들을 갖고 있었다. 요동성 전투가 몇 달 동안 계속되는 동안에 고구려군이 사용한 화살만 해도 수십만 개에 달했을 것이다. 또한 농업 목축업이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요 성곽들에 수만 석, 수십만 석의 군량을 저축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군량이 있었기 때문에 장기항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축성기술도 발전했기 때문에 모든 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놓을 수 있었다. 이러한 훌륭한 군사기술적 물질적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장기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고구려-수나라 전쟁에서 고구려의 빛나는 승리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그 역사적 의미가 지대하다. 

첫째로 우리 민족의 반외세 반침략 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승리의 전통을 세워주었다. 수십 수백만의 침략대군을 무찌른 고구려 민중들의 투쟁은 그 어떠한 강적도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정의의 전쟁에 하나같이 떨쳐 일어난 민중들을 정복할 수 없으며, 쓰디쓴 참패만을 당할 뿐이라는 것을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 보여주었다. 광범한 민중을 비롯해 민족의 자주권 수호에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합심해 높은 애국정신을 갖고 투쟁할 때 이기지 못할 적은 없다는 것을 실천으로 웅변해주었다. 

살수대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고구려-수나라 전쟁 때의 요동성 전투, 평양성 전투, 살수 전투의 대승리를 뇌리에 깊이 새기고, 선조들의 애국전통과 투쟁기풍을 계승하고 따라 배워 하나같이 떨쳐 일어나 외래 침략자들에게 떼죽음을 안겨 주었으며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영예롭게 지켜내곤 했다. 

둘째로 고구려의 대외적 위신을 드높여주었다. 고구려-수나라 전쟁에서 고구려의 대승으로 중국에서 고구려를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무서운 나라로 인식되었다. 645년 고구려-당 전쟁을 앞두고 수나라 때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전쟁에 참가했던 정원숙이란 자는 당태종에게 “요동은 길이 멀고 양식운반이 어려운 데다가 동이(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지키기 때문에 쉽게 항복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등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의 승리는 백제와 신라, 심지어 왜국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강대성을 과시했다. 

셋째로 수양제를 비롯한 수나라 통치세력의 몰락과 수나라의 붕괴를 촉진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수양제는 4차례에 걸친 고구려에 대한 침공에서 자국 민중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적 물적 역량을 침략전쟁에 쏟아부었으나,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매번 뼈도 못 추리는 비참한 패배만을 당하고야 말았다. 이것은 수나라 내부정세를 극도로 악화시켰으며 각지에서 수많은 농민폭동의 발발요인으로 작용했다. 수나라 민중들의 반발과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수나라 멸망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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