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천강은 맛있다! ①

도시의 새들도 깃을 내리고 저마다의 둥지로 돌아가는 시간. 정처 없는 사람들 혹은 정(情)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이 있다. 지금은 도회지로 변한 인사동. 번화한 큰길에서 좁은 골목길을 굽이돌아 들어가야 비로소 나타나는 곳, 막걸리집 <천강에비친달>이다. 시절이 하수상 할 때에는 막걸리 한 잔에 숨죽여 흐느끼거나 목 놓아 울기도 했고, 질풍노도의 시대에는 승리의 환호소리 넘치던 축제의 마당이기도 했다. 그 <천강>이 세상과 함께 울고 웃던 세월이 어느 듯 스무 해가 되었다. 아직은 꽃다웠던 서른에 시작한 일. “수배자들과 그들을 잡으려는 기관원들이 함께 들락거릴 때가 가장 매출이 좋았다”며 깔깔거리는 주모의 얼굴에도 어느새 실주름이 잡혔다. 그깟 술집 하나 이십 년 되었다고 무에 그리 대수냐고 타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물방울 하나에도 온 우주가 비끼는 법 아니던가! 골목의 주점이 때로 광장의 거점이 되기도 하고. 지난 시절 이곳을 무시로 드나들며 무수한 업(業)을 쌓아온 인연들이 <천강>에 비낀 자신의 자취를 보내왔기에 나누어 연재한다. 첫 번째 글은 멀리 지리산 악양골에서 시인 박남준이 보내왔다.[편집자]

바람이 불면 그렇게 할 일이다 그 술이라던가 사람이라든가에 취하여 쓰러질 일이다 다시 눈을 뜨고 술 마실 일이다 그럴 일이다 봄이 온들, 꽃이 피어난들 아름다운 사람의 사랑도 잊혀져갈 일이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흐르듯 가고 그리하여 술 취할 일이다 이제 술 취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아, 그 많은 날들의 서러운 그리움을, 저 불어오는 바람을 어쩌란 말이냐

-(졸시) 흔들리는 나

내 서럽고 그리운 날들을 견디게 해준 술집들, 거기 서울 인사동에 <천강에 비친 달>이라는 술집이 있다. 어찌하여 나는 이 술집을 알게 되었을까. 지금의 자리로 옮기기 전 술집의 내부공사를 맡은 이는 저기 저 남쪽 촌구석 골짜기골짜기 깊은 골짜기 화순에 사는 목수였다. 그 촌 목수 녀석이 서울에서 공사를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와 격려와 위문을 핑계 삼아 내친김에 서울구경이나 하자며 마음먹고 상경을 했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 묘하다. 그 서울 길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이 어떻게 생긴 누군지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몇 년 후 서울 인사동에서 소설가, 시인들과 술집을 찾아 헤매다가 ‘아 그 술집이 있었지!’하며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곳, 그게 내 단골술집 <천강에 비친 달>과의 시작이 되었다. 

▲ 사람 냄새나는 정 때문일 것이다. 주인이며 그 집을 찾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 가면 거기 <천강>에 들린다.

1년에 대여섯 번 서울에 가면 그렇게 그 술집을 오다가다 들러 뱃속에 화르릉 불을 질렀다. 몇 년 후 백주대낮에는 떳떳하게 내놓고 다니지 못할 낯부끄러운 일이 이 나라에 일어났다. 천박한 쥐새끼라고 이름표를 써 붙이면 딱 들어맞을 인상의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이 된 것이다.

참으로 더럽고 지저분하게도 생겨먹은, 사람의 탈을 쓴 쥐새끼 같은 그의 공약 중에 한 가지가 한강과 낙동강과 영산강과 금강을 온통 녹조로 뒤덮인 썩은 물로 만들겠다는, 그러니까 뭐 처음에는 배가 공중부양을 하는 운하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2007년 이른 봄,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4대종단의 뜻있는 이들이 모여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이라는 깃발을 들고 모였다. 100일 동안 한강과 낙동강과 영산강과 금강을 따라 걸으며 4대강을 파헤쳐 운하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세상에 알리자는 것이었다.

남한강쯤을 걷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 저게 누구야!’. 하루 동안 같이 걷겠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합류를 하는데 거기 천강 주인이 환한 웃음을 한 아름 안고 씩씩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앞장을 서서 오는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강을 따라 함께 걸었다.

“삽질을 하려거든 강말구 밭에서 하시지요.”

어느 날 한 젊은 여인이 이런 문구를 써서 몸에 두르고 왔다. 그날 짧은 시를 지었고 인터넷에 띄웠더니 세 사람이 작곡을 했다고 연락이 왔다. 백창우, 한보리, 그리고 얼마 전 <천강에 비친 달>에서도 기념 콘서트를 했던 백자 씨도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불러서 강을 따라 걷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한번은 천강에서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겼는데 술집의 방에서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잤던 모양이다. 몇 시나 되었을까. 시원하고 속이 확 풀어질 것 같은 해장국 냄새에 눈을 떴다. 주인장이 그랬을 것이다. 베개를 베고 이불도 덮은 채 단잠을 잤다. 얼마나 고맙던지.

그녀가 물어왔다. 호칭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다. 함께 앉아있으면 세상에 그렇게 말이 느려 터져 문단에서는 김사인 시인 다음으로 가슴이 답답하다는 평을 듣던 내가 그냥 단숨에 미리 준비해둔 대사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 오빠라고 해!”

그녀가 웃으며 “오빠!”라고 불렀다.

“아니, 오빠가 아니라 ‘어퐈~’ 이렇게 불러봐. ‘어퐈~’.”

밥을 먹고 나오려는데 그녀가 내게 내미는 것이 있었다. 주홍색 줄에 매달린 것, 열쇠였다. 서울 올라오실 때 혹시 문을 열지 않는 날이라도 마음 놓고 오셔서 잠도 자고 술도 마시라는 것이다. 하 이런, 이런 대접이 다 있나. 이뿐 여동생이 생겼는데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광우병 집회가 있었다. 용산참사 추모행사가 있었다. 세월호 촛불집회가 있었다. 박근혜 탄핵집회가 있었다. 집회가 끝나고 <천강>에 들르면 거기 그날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술자리마다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얼마나 훈훈하고 아름다운 술집의 풍경인가.

지리산자락으로 이사를 오기 전 모악산자락에 살 때도 전주에 나가 술 마실 일이 생기면 <새벽강>이라는 술집 외에는 다른 곳에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더러 묻고는 한다. 왜 다른 집은 안가느냐고. 사람 냄새나는 정 때문일 것이다. 주인이며 그 집을 찾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 가면 거기 <천강>에 들른다. 

▲ 지난 8월27일 <천강> 20주년을 맞이하여 민가협, 유가협,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조촐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그런 천강이 개업 20주년이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20년 동안 그 집의 문지방이 닳도록 넘나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폭력과 광기와 불온한 시대의 어둠속에 위로와 희망을 얻으며 즐겁고 거나하게 취한 발걸음의 옷깃을 여몄을까.

“축하해! 다 알고 있을 거야. 정말이지 그동안 애 많이 썼어. 서울에, 인사동에 <천강에 비친 달>이 있어줘서 참 고마워.”

인사동, 내가 서울이나 서울 근처 강연을 하거나 시낭송을 하러 갈 때도, 천상병문학상을 받을 때도, 아름다운 작가상을 받을 때도 <천강>에 전화를 걸어 뒤풀이 음식을 준비하라며 연락을 했다.

“성란이냐? 응. 서울 왔다. 지금 ‘어퐈’ 가고 있다!”

■ 박남준 : 1984년 시 ‘할메는 꽃신 신고 사랑노래 부르다가’로 등단.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중독자》 등과 산문집 《꽃이 진다 꽃이 핀다》 《박남준 산방일기》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 등이 있다. 천상병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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