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21) 안장왕

백제와 고구려의 치열한 각축전

백제의 동성왕(재위기간 479~501년)은 집권 초기에는 국내 통치 질서를 회복하고, 경제와 군사에 힘을 쏟아 백제의 부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한 생활을 일삼고 사냥놀이에만 몰두했다. 동성왕은 불만을 품은 신하에 의해 501년 가을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 무녕왕이 왕위에 올랐다. 

백제는 502년 11월 고구려의 영내로 침입해 들어갔다. 고구려는 백제의 국경침범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503년 9월에 일부 말갈인 부대를 보내 백제의 마수책(위치불명)을 불사르고 고목성(위치불명)을 공격했다. 

백제는 그해 11월 달솔 우영이 지휘하는 5000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반격을 가하고 내친 김에 수곡성까지 진격했다. 수곡성을 뺏기지는 않았지만, 백제의 군대가 수곡성까지 진격했다는 것은 고구려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다 죽어가던 백제가 다시 살아나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백제의 동향에 대해 고구려는 동남쪽으로 신라에 대한 양보를 통해, 신라를 중립화시키고 백제와의 투쟁에 힘을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506년 7월 고구려는 먼저 말갈인 부대를 보내 백제의 고목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600여명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아들였다. 11월에 더 남진하려고 했으나, 큰 눈으로 병사들 내에서 동상환자들이 많이 생겨나자 전투를 중단했다. 백제는 507년 5월 고목성 남쪽에 울타리성 2개를 설치하고 장성을 쌓아 고구려군의 진공로를 막았다. 

한편 같은 해(507년) 10월 고구려의 장군 고로는 말갈인 부대와의 협력으로 한성을 치려고 횡악 아래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백제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성과 없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512년 고구려는 새로운 방향(측면)에서 백제를 쳤다. 

이해 9월 고구려군은 가불성(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충북 옥천군 일대로 추정됨)을 점령하고 백제 땅 깊숙이 들어가 원산성(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일대의 원산향)을 점령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백제의 무녕왕은 날랜 기병 3000명을 데리고 위천의 북쪽으로 진출했다. 고구려군은 백제의 병력을 많지 않을 것으로 보고 진을 치지 않고 있다가 백제의 기습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오곡벌 전투(529년)와 고구려군의 아산만 계선 진출

이처럼 6세기 초 고구려-백제는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이면서 기선을 장악하기 위해 각축전을 전개했으나 커다란 국면의 변화는 없었다. 

519년 고구려에서는 문자명왕(재위기간 492~519년)이 죽고 안장왕(제위기간 519~531년)이 왕위에 올랐다.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장자로서, 문자명왕 재위 7년에 태자로 되어 문자명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올랐다. 

안장왕은 태자 시절부터 삼국통일 실현을 위한 남진정책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직접 백제 땅에 몰래 잠입해 적정을 탐색할 정도였다. 왕위에 오른 후 그는 남진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유리한 대외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안장왕은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521~523년에 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국가 창고의 알곡을 대대적으로 풀어 신속하게 백성들을 구제했다. 또 가난한 백성들을 안돈시키는 데도 신경을 썼다. 안장왕은 이처럼 민심수습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군사력 강화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모든 노력들은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여건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안장왕은 이러한 노력과 함께 백제의 내정을 탐지하기 위한 정찰활동도 강화했다. 이에 관해서는 〈해상잡록〉에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른바 ‘안장왕의 사랑이야기’이다.

안장왕이 태자로 있을 때 장사군 행색을 하고 개백현(경기도 고양시 행주)에 가서 백성의 형편을 정찰하다 백제의 기찰군에 발각됐다. 그는 이때 그 지역의 부자집인 한씨의 후원에 숨었는데, 그 집 딸 한주를 알게 돼 친밀해져 백년해로를 약속했다. 태자는 고구려로 돌아가 곧 왕이 됐다. 그 사이 그곳 고을원이 한주의 미모를 탐내 청혼했으나 한주는 이미 약속한 사람이 있다고 거절했다. 고을원은 자신의 청을 거절한 한주를 박해했다. 그 후 안장왕은 계책을 써서 개백현을 차지했다.

〈삼국사기〉(권 37지리지4) 고봉현조에는 “개백현이라고도 한다. 한씨 미인이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기에 (고을을)왕봉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 것으로 봐 〈해상잡록〉의 기사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준비 끝에 523년 8월에 군대를 보내 백제를 쳤다. 하지만 백제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백제의 좌장 진충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1만명의 병력을 미리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 군대가 패수(예성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백제의 군사들이 튀어나와 고구려군에 반격을 가했다. 갑작스런 반격에 고구려 군대는 잘 싸워보지도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한강 이북의 쌍현성을 보축했으며, 웅진성을 보수하는 등 전쟁 대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와 함께 신라와의 관계도 다시 수습해 우호관계를 맺기로 했다. 안장왕의 남진정책은 이처럼 백제의 강한 반발로 난관에 봉착했다. 하지만 안장왕은 난관에 주저 앉지 않았다. 

안장왕은 친정을 결심했다. 529년 10월 왕이 직접 군대를 통솔해 백제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에는 무턱대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갖추고 나서 진격했다. 

안장왕은 입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첫째로 기본 주력을 예성강 계선과 한강 하류계선에 배치해 놓았으며, 둘째로 오늘의 경기도 동남부와 충북 서부 계선에는 보조역량을 배치해 놓고, 총공격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그리고 셋째로 수군을 헐구성(오늘의 강화도)으로 진출시켜, 이 성을 함락시켰다. 이는 백제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전술적 조치였다.

백제군은 고구려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고구려의 기본 전선을 강행 돌파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좌평 연모를 지휘자로 삼고 보병과 기병을 합해 3만명의 주력부대를 고구려 종심 깊숙이 파고들게 해 고구려의 기본전선을 돌파하고 오곡벌에 진출했다. 

오곡벌이 어디인가? 오곡벌은 오늘의 황해도 서흥지방 오곡군 안의 평야지대인데, 당시 고구려 남방계선이 패수(예성강)-개성-서울 동부지역이었으니, 백제-고구려 국경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구려 영토 깊숙한 지점이었다. 

백제군이 오곡벌에 진출했다는 것은 고구려 영내를 아주 깊이 들어온 것이다. 백제로서는 고구려의 포위압박전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역공세를 펼친 전략이었다고 본다. 백제로서는 대담한 작전을 통해 고구려를 격파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고구려의 유인전략에 말려든 셈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백제를 자기 영내로 일부러 유인해, 결전을 치르려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곡벌 전투는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고구려는 이 전투에서 백제군 2000여명을 살상 포로로 하는 대승리를 거뒀다. 

전투에서 패한 백제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총퇴각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경기도 동남부 충북 서부지역에 배치해 놓았던 고구려의 보조역량이 경기도 서부지방을 몇 개 토막으로 잘라버려 백제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해버렸다. 백제군은 대혼란에 빠져 무질서하게 도망치다가 대부분은 고구려에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충북 서부에서 경기도 남부로 진출한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아산만 방향으로 진출했다. 이로써 아산만 이북에 있던 백제군은 붕괴되고 아산만 이북지역은 고구려가 장악하게 됐다.

529년 오곡벌 전투 승리와 고구려군의 전격적인 진출로 고구려는 서남지방에서 일거에 수백리를 진출함으로써 백제를 더욱 더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백제 사이의 역량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됐으며, 고구려는 아산만 일대까지 밀고 내려오게 됐다. 이때 충남 천안시 연기군 일부까지 고구려가 장악했다. 

고구려가 아산만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은〈삼국사기〉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구려가 이때 아산만계선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우리나라 역대 지리지에 오늘의 경기도와 충남 북부, 충북 서부에 수많은 ‘고구려 군현’들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런데 오늘의 서울 서부, 개성시 중심부, 한강하류 이남 경기도 광주, 용인, 안성 서쪽, 평택 지역들이 529년 이전에는 백제 땅이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많은 군현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529년 전투 결과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529년 고구려 남진으로 당시 백제 수도였던 웅진성(공주)은 전선에서 불과 60~100리 안팎의 가까운 곳에 있게 됐다. 백제 지배층으로서는 불안한 상태를 타개할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538년에 수도를 사비성(부여)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제반 사실들을 종합하면 529년 전투 결과 고구려가 아산만계선까지 진출했다고 확정할 수 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아산만–천안–연기군–청원–괴산–중원–제천–단양–영월 등 소백산 줄기 이북지역과 삼척 북쪽지역을 차지했고, 이로써 한반도의 3분의 2 이상, 중국 동북지방에 있던 영역까지 합하면 당시 삼국의 영역 전지역의 10분의 9 이상을 차지한 큰 나라로 됐다. 

안장왕의 남진정책의 역사적 의의

안장왕은 삼국통일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왕이다. 안장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는 동남방면, 중남방면, 서남방면으로 영역을 크게 확장해 남쪽 방향으로 최대 영토에 이르렀다. 이제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은 완성단계로 진입했으며, 최종 완성을 위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 

고구려는 475년 백제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를 결정적으로 타격했으며, 481년 신라 동북부 지역 제압과 490년 중엽 중부 산간지대에서 소백산줄기계선 확보를 통해 신라에 대한 결정적 우세를 차지했다. 그러나 5세기말에 이르러 백제가 다시 강화되고 고구려 남쪽을 넘보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이 20여 년간 지속됐는데, 529년 전쟁을 통해 백제를 멀리 남쪽으로 밀어내버림으로써 백제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 삼국통일정책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젖혔다. 

이제 고구려는 새로 차지한 최전방계선인 아산만-금강계선에서 백제의 수도 웅진성까지는 약 60~100리밖에 되지 않아, 준비만 잘하면 임의의 시각에 백제의 수도를 포위하고 최종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게 됐다.

고구려가 아산만–천안–연기군–청원–괴산–중원–제천–단양–영월 등 소백산 줄기 이북지역과 삼척 북쪽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백제와 신라, 가야는 한반도 남부 일부지역으로 쪼그라들었다. 

당시 고구려의 영역은 서쪽으로 내몽고 대흥안령 산줄기 더 나가서는 오늘날 몽골공화국의 동남부 지역에 이르렀다. 북쪽은 눈강하류, 동류 송화강유역에 이르렀고, 동북쪽은 수분하를 넘어 우수리강 상류유역까지 미쳤다. 남쪽으로는 한반도의 3분의 2 이상 지역을 차지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 신라, 가야 나라들을 다 합친 것보다 약 13배나 되는 큰 영역을 가진 강대국으로 됐다. 이것은 고구려에 의한 겨레와 강토의 통일과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또한 이 시기 고구려의 남진으로 수많은 백제, 신라 사람들이 고구려의 주권 밑에 살게 됐고, 이들 속에 고구려의 선진적인 경제 문화 성과들이 급속히 전달되었다. 또한 이들을 통해 고구려의 선진적인 정치제도, 경제 문화적 성과들이 백제, 신라, 가야 나라들에 끊임없이 전달됐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민족의 공통성이 크게 강화되고, 전민족적으로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됐다. 

백제와 신라에서 고구려의 우수한 성곽축조방식인 고로봉식 산성축조방식을 널리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 그 대표적 실례의 하나로 된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원래 산정식 성곽축조방식을 썼으나 나중에는 고구려의 고로봉식 성곽축조방식을 받아들였다. 웅진성(공산성), 건지산성(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리), 석성산성(부여군 석성면 현내리), 부소산성(부여), 청아산성(부여) 등 고로봉식 산성을 여러 곳에 쌓았으며, 신라에서도 삼년산성(충북 보은읍 보은읍), 명활산성 등을 고로봉식으로 쌓거나 기존 산성을 고로봉식으로 개축했다. 

무덤축조방식에서도 고구려의 돌칸 흙무덤 축조법이 백제, 신라에 점차 보급됐고, 무덤에서 벽화를 그리는 풍습도 고구려의 것을 받아들였다. 백제의 능산리 벽화무덤의 사신그림, 천정의 연꽃무늬, 구름무늬는 고구려의 진파리 1호 무덤, 내리 1호 무덤, 강서 큰 무덤의 것들과 매우 비슷하고, 공주 송산리 6호 무덤의 사신도 역시 그러하다. 신라의 어숙지술간 무덤(경북 영풍군 순흥면)의 여인상은 장천 2호 무덤의 여인상과 비슷하고 순흥리 벽화무덤의 장사 그림은 고구려 벽화그림과 유사하다. 

신라가 고구려의 군사제도, 관직제도를 받아들인 사실은 505년(지증왕 6년)에 주군현제를 실시하고 주의 장관으로서 군주를 둔 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이밖에 지방관으로서 도사를 두는 당주제도를 받아들인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밖에 신라에서 520년 율령제도를 실시하고 백관의 공복제도를 정비한 것도 다 고구려의 것을 본뜬 것이었다(<수서>권 81 신라전). 백제의 경우 기록에 남은 것이 별로 없으나 주군현제도의 실시, 수도에서의 5부제도 실시, 지방관의 하나로 도사를 두는 제도 등은 다 고구려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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