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덕일의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출간기념 강연

▲ 2018년 11월 8일 종로구 재동 의백학교에서 열린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출간 기념 강연회에서 ‘남한의 역사학, 북한의 역사학’을 주제로 강의를 한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옆에 자리 잡은 의백학교(MJ빌딩 3층)에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발간을 기념하는 역사학자 이덕일의 강연회가 열렸다. 의백학교는 의암 손병희와 백범 김구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교육을 하는 곳으로 손병희 선생의 손자뻘인 손윤이 이사장이고, 이덕일이 교장을 맡고 있다. 늦가을 비가 내리는 밤인데도 준비된 좌석이 꽉 차서 보조의자까지 놓아야 했을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한 관심들이 뜨거웠다.

1961년 중국 북경대에서 박사 논문으로 통과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1962년 북에서 출간됐고, 1990년대 초반에 남쪽의 몇몇 출판사에서 영인본(복사본) 형식으로 발행했다. 그런데 리지린의 원저에 인용된 수많은 사료들이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서 비록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어도 일반인이 읽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에 발간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이덕일 박사가 한자를 모두 해역하고 각주를 달아서 일반 독자도 읽기 쉽게 펴냈다.

이날 이덕일 박사의 강연에 앞서 손윤 이사장, 허성관 전 장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축사를 했는데,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마오쩌뚱이 ‘북경 건너편은 우리 땅이 아니었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 책은 북경이 고조선의 땅이었음을 고증한 책이다.”(손윤) 

▲ 축사를 하고 있는 손윤 의백학교 이사장. 의암 손병희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빨간 볼펜으로 밑줄 그어가며 이번에 나온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다 읽어봤는데, 당시에 그 많은 자료를 어찌 다 찾아내서 읽어봤는지 놀랬다. 끊임없이 숱한 의문을 제기하며 사료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자세를 남한학자들이 배워야 한다. 역사가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해야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허성관)

“신채호의 멋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북한(조선) 학자가 저술했다 해도 우리의 역사학계에 폭탄을 던진 책이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듯이 강단 사학계에 폭탄을 던진 것이다.”(이종찬)

축사에 이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기념 강연이 1시간30분 동안 이어졌다. 아래 글은 강연 내용과 이덕일 소장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에 쓴 해제를 참조하여 문답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해방 후 남북한 사학계의 과제는 식민사관 청산

- 1945년 광복 직후 북한(조선) 사학계가 과제로 제시한 것은 무엇이었나?

《임꺽정》(林巨正)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은 1949년 조선력사편찬위원회가 평양에서 발간하던 《력사제문제》(歷史諸問題)에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어용학설의 검토(상·하)〉라는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에서 홍기문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에 성공하자 그들의 소위 역사학자들은 조선역사에 대해서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면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크게 두 가지 역사를 조작했다고 비판했다. “첫째 서기 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오늘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漢)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으로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군=평양설’, 즉 ‘한사군=한반도설’이란 것이었다. “둘째 신라·백제와 함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던 가라가 본래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으로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다. 즉 한반도 남부의 가야가 임나라는 ‘임나=가야사’라는 것이다. 즉 북한(조선)은 1949년에 조선력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하던 《력사제문제》라는 학술지에서 이미 조선총독부가 만든 식민사관 이론의 핵심이 한사군 ‘낙랑군=평양설’과 ‘가라(가야)=임나설’임을 간파하고, 이를 해체함으로써 민족의 주체성에 기초한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어내려 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해방 직후 북한(조선) 사학계를 주도하는 학자들은 누구였나?

북한(조선) 역사학이 형성된 계기는 1946년 7월3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이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역사학자들을 초청한 것이었다. 이 초청에 응해 박시형·김석형·전석담 같은 사회경제사학자들, 즉 맑시스트 역사학자들이 월북했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역사학자 백남운도 이후 월북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1947년 2월1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내에 ‘조선력사편찬위원회(이하 력사위원회)’가 설립되었고, 홍기문의 논문을 실은 《력사제문제》를 발간했다. 위원회는 “가장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사상에 의거해서 조선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옳게 표현”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라는 시기의 연속성과 관점의 일관성은 역사학의 가장 기초라는 점에서 시기별로 칸막이를 친 남한의 역사학계와 비교된다. 

리지린이 제시한 고조선 강역

- 그로부터 10여년 만에 나온 리지린의 박사논문 《고조선 연구》는 북한(조선) 사학계에서 어떤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나?

1962년 리지린의 박사학위 논문인 《고조선 연구》가 출간되면서 북한(조선) 학계의 고조선사에 대한 정리는 일단락되었다. 고조선사의 핵심 분야 중의 하나는 고조선과 중국 연·진·한(燕·秦·漢) 제국 사이의 국경선이 어디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리지린은 서기전 5~4세기경까지는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부터 압록강 북부까지 걸쳐져 있었다가 서기전 3세기경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1~2000리의 강역을 빼앗긴 후 요녕성 대릉하(大陵河)까지로 축소되었다고 바라보았다. 낙랑군 또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정리했는데, 이는 비단 리지린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해방 후 북한(조선)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관점을 계승한 것이다.

- 이 논문이 나오기 전에는 북에서도 낙랑군=평양설이 주류 학설이었나?

북한(조선)도 처음에는 ‘낙랑군=평양설’과 ‘낙랑군=요동설’이 대립했다.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했고, 문헌사학자들은 ‘낙랑군=요동설’을 주장했다. 고고학자 도유호는 ‘낙랑군=평양설’이 유물사관(唯物史觀)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문화유산》 1962년 3호에 실은 〈신천 명사리에서 드러난 고조선 독널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고조선을 논하는 마당에 먼저 문제로 되는 고고학적 자료는 바로 고조선 유물이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기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조선 유물이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유물이 전연 보이지 않는 고장에서 중국 갈래의 유물을 들고서 여기가 고조선 자리라고 하여서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1962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간행되면서 북한(조선) 학계에서 ‘낙랑군=평양설’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의 방대한 문헌 사료는 물론 중국에서 출토된 여러 고고학 사료들까지 모두 섭렵해서 고조선의 강역이 때로는 중국 하북성까지 걸쳐 있다가 요녕성으로 후퇴했다고 논증했는데, 평양 부근의 일부 고고학 유물들, 그것도 일제의 조작설이 만연한 고고학 유물들만을 근거로 ‘낙랑군=평양설’을 펼치는 주장은 더 이상 학문적으로 설 자리가 없었다. 

- 리지린이 중국에서 고조선 유물을 발굴하는 데도 참여했다고 하던데….

북한(조선)은 1963년 중국과 ‘조·중고고발굴대’를 조직했고, 이듬해 요동반도 남단 려대(旅大:여순과 대련)시에서 고조선 무덤인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을 발굴했다. 이때 중국 총리 주은래가 리지린이 포함된 북한(조선) 대표단을 만나 요동은 옛 조선족의 땅이었다고 시인하는 연설을 했다. 그 후 중국의 요녕성은 물론 하북성과 내몽골 일대까지 고조선의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 등이 다수 쏟아질 줄 알았다면,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했던 도유호도 일찌감치 손을 들었을 것이다.

▲ 1961년 북경대 박사논문으로 통과된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에는 일제식민사관(낙랑군=평양설)을 극복하려는 북한 사학계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일제 식민사관과 함께 중화사관, 대국주의도 비판

- 북한(조선) 사학계의 주요 학설이 토론을 거쳐 정립됐다는 것이 뜻밖이다.

북한(조선) 학계는 거의 15년 이상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거쳐 ‘낙랑군=요동설’에 대한 각종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가지고 ‘낙랑군=평양설’을 무너뜨렸다. 남한 학계가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논쟁다운 논쟁 한 번 하지 않고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정립한 ‘낙랑군=평양설’을 100년 전에 확립된 ‘정설’이라고 우기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채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도대체 어디가 전체주의 국가였는가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 중국 사학계 입장에선 ‘대륙 고조선’을 주장하는 학설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내용일 것 같은데, 리지린의 논문이 순조롭게 통과됐나?

북경대의 지도교수였던 고힐강(顧詰剛)은 고사변학파를 대표하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하던 중화주의 역사학자였다. 고힐강은 리지린의 논문에 대해 “자의적이고 견강부회적으로 역사를 해석했다”, “객관적 연구를 표방했으나 민족주의적 속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고힐강은 1961년 9월29일자 일기에서 “오늘의 시험은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다. 국제적인 우호관계를 위해서 그 결점을 지적하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고힐강도 논문 내용 자체에 대해선 일부 지엽적인 문제 제기 외에 본질적인 비판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리지린은 방대한 중국의 사서에 기초해서 논문을 작성했기 때문에 이를 반박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 리지린이 《고조선 연구》에서 일제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것과 함께 중화사관에 대해서도 직설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1960년대 초반에 일제 식민사관은 말할 것도 없고, ‘대국주의 사상’, ‘대국주의 사가’ 등의 용어로 중화패권주의 사관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아가 중국의 대국주의적 봉건 사가들과 조선의 사대주의 사가들의 학설이 일치한다고 비판한 것도 새로웠다. 지도교수인 북경대 고힐강 교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맥은 흉노’라는 고 교수의 설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학문적 기개 앞에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무렵 북한(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비판하면 비록 지도교수와 생각이 달라도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 사학계가 ‘낙랑군=평양설’ 고수하는 이유

- 그런데 지금 남쪽 주류 사학자들은 여전히 한사군 낙랑군 평양설을 고수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 이유, 근거는 무엇인가?

남한 학계는 아직도 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낙랑군=평양설’을 정설로 받들고 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면 논문 자체가 통과되지 않고, 교수도 될 수 없다. 사회주의 체제였던 북한(조선) 학자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며 ‘대륙 고조선설’을 만들어낸 것이 1961년인데 남한 학계는 친일사학자인 이병도, 신석호의 대를 이어 지금까지도 ‘낙랑군=평양설’을 고수하고 있다.

- 일부가 그렇게 주장할 수 있겠지만 사학계 전체가 하나의 학설로, 그것도 일제시대에 정립된 학설로 통일되어 있다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

2016년 『역사비평』은 두 차례에 걸쳐 ‘한국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이란 특집을 마련했다. 강단사학을 대표하는 젊은 역사학자들의 논문을 여러 편 실었는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일보는 2017년 6월5일자에 이들의 역사관을 소개하게 했는데 여기서도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했다. 이게 그 기사 내용이다.

「(한국일보 기자 조태성)=(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

안(정준)=“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재원)=“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경량)=“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한국일보, 2017년 6월5일)」

이 소장학자들이 모두 강단사학계를 대표하는 이른바 젊은 역사학자들이다. 안정준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것은 100년 전에 이미 끝났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고 말했다. ‘낙랑군=평양설’을 비판하는 남쪽의 역사학자나 이미 57년 전에 ‘낙랑군=요동설’을 밝혀낸 리지린, 이런 내용의 박사학위 논문에 동의한 북한(조선)사학계는 제대로 된 학자가 아니고 ‘사이비 역사학자’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북한(조선) 사학계도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안정준은 《역사비평》에서 북한(조선)의 연구결과를 180도 뒤집어 설명했다. 북한(조선)도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일제시기에 발굴한 낙랑 지역 고분의 수는 70여 기에 불과한 반면, 해방 이후 북한(조선)에서 발굴한 낙랑 고분의 수는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00여 기에 달한다. 현재 우리가 아는 낙랑군 관련 유적의 대다수는 일제시기가 아닌 해방 이후에 발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안정준, 역사비평, 2016년)”라고 썼다. 안정준은 북한(조선)에서 3000여 기의 고분을 발굴한 결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확정지은 것처럼 말했다.

▲ 일제의 단군 말살책동에 맞서 애국적 인사들이 1936년 평양시 강동읍에 세운 단군릉기적비와 1994년 완공된 단군릉.

낙랑군과 낙랑국의 차이

- 그렇다면 남쪽 사학자들이 북의 학설을 왜곡하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것인가?

북한(조선)의 학설을 180도 뒤집어 호도한 것이다. 북한(조선) 학자 리순진은 <평양 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방 전에 일제 어용사가들은… 우리 민족사의 첫머리인 단군조선의 력사를 말살하는 한편 평양일대의 낙랑무덤을 ‘한 나라 낙랑군시대의 유적’으로 외곡 날조하면서 그것을 기초자료로 하여 한 나라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락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해 냈다.… 해방 후 우리 고고학자들은 평양일대에서 일제어용사가들이 파본 것에 30배에 달하는 근 3000기에 달하는 낙랑무덤을 발굴 정리하였다. 우리 고고학자들이 발굴 정리한 락랑무덤 자료들은 그것이 한식 유적 유물이 아니라 고조선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락랑국의 유적과 유물이라는 것을 실증해준다. 락랑국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였던 위만조선이 무너진 후에 평양 일대의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다.”(리순진, 평양 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 도서출판 중심, 2001)

북한(조선) 학계는 평양 일대의 고분들은 낙랑 ‘군(郡)’이 아니라 낙랑 ‘국(國)’의 유적, 유물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 나오는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로맨스가 있던 낙랑국(國) 유적을 뜻한다. 무덤 형태 자체가 중국의 한식(漢式) 무덤과는 완전히 다른 고조선 특유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3000여기의 무덤을 발굴한 결과 한식(漢式) 무덤은 단 한 기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한 학계와 언론은 북한(조선)의 발굴 결과를 180도 거꾸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학자’는 다 낙랑군=평양설에 동의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가짜역사학’이고 ‘가짜뉴스’다.

- 이 박사가 “중국의 사료엔 한사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료는 단 한 개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기경량은 최근 발표한 글을 통해 “이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가 존재한다”라고 반박하면서 여러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경량이 반박하면서 제시한 사료는 조선 후기의 정약용이나 조선 전기의 역사지리서 등이다. 그런데 정약용도 《아방강역고》에서 “요즘 사람들은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썼다. 즉 그때도 상당수의 학자들은 중국 고대사료를 직접 살펴보니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정약용은 이런 학설을 끝까지 연구해서 자신의 견해를 세웠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정약용의 한계이고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지금 남한 학자들은 낙랑군 평양설을 말하는 중국 사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삼국지》, 《후한서》 등에 낙랑군 평양설이 나온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아직도 국민들이 《삼국지》, 《후한서》 같은 중국 사료들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우기는 것이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써먹던 방식 그대로다. 《삼국지》고 《후한서》고 평양에 대한 말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삼국지》에는 요동왕을 꿈꿨던 공손도 집안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집안이 낙랑군 땅을 갈라서 대방군을 설치했다는 집안이다. 이 집안의 공손연은 위(魏)나라가 오(吳)나라와 치열하게 싸우는 틈을 타서 서기 237년 요동에 연(燕)나라를 세우고 독립했다. 그러자 위나라에서 사마선왕 사마의를 보내 정벌하게 한다. 두 군사는 양평(襄平)이란 곳에서 충돌했는데, 공손씨의 연(燕)나라가 한 번에 패전해서 망하고 말았다. 이 당시 양평에 대해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지금의 요녕성 요양(遼陽)시 부근이라고 비정한다. 물론 지금의 요양시보다 훨씬 서쪽으로 가야하지만 요양이라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삼국지》 공손도 일가 열전은 양평성을 파해 공손연의 머리를 베어 낙양으로 보냈다면서 “요동, 대방, 낙랑, 현도 등이 다 평정되었다”고 나온다.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를 무너뜨렸는데, 남한 강단사학계에서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낙랑과 황해도라고 주장하는 대방이 왜 함께 평정되는가? 낙랑, 대방이 모두 요동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남한 강단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은 모두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는 가짜 역사학이다. 역사 원전에 밝은 북한(조선)학자들이 남한 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속으로 어찌 생각할지 안쓰러울 정도다. 

▲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에는 15쪽에 걸쳐 북한과 중국에서 발굴된 고조선 유물을 화보로 실었다. 이 사진은 북한(조선) 황해도와 중국 요녕성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우).

1993년 단군릉 발굴과 리지린 학설

- 리지린의 학설이 지금은 북한(조선) 사학계의 정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고조선 연구》 논문이 발표된 지 이미 57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그동안 새롭게 발굴된 유물이나 자료를 통해 수정된 부분도 많을 것 같다.

단군릉 발굴 이후 평양이 단군조선의 도읍지였다라고 주장하는 것 외엔 리지린의 연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없다. 북한(조선)은 1993년 평양 단군릉을 발굴하고, 여기서 나온 유골을 측정한 결과 5011± 267년(1993년 기준)의 유골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토대로 북한(조선)은 평양의 단군은 실존 인물이며, 평양이 단군조선의 도읍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쪽의 사학계는 연대 측정방법, 고분 형식 등의 이유를 들어 북한(조선)의 입장을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쟁점이 되었던 것은 강동군에 단군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여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고조선의 서쪽 강역이고, 평양이 낙랑군 지역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북한(조선)학계는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리지린의 설대로 서기전 5~4세기에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이고, 서기전 3~2세기경에 요녕성 대릉하로 축소되었다고 본다. 북한(조선)의 『조선전사』의 시각도 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 역시 남한 사람들이 북한(조선) 역사학계에 대한 정보에 어두운 것을 가지고 호도하는 것이다. 

- 남쪽의 고대사를 대표한다는 송호정(교원대 교수) 같은 사학자는 얼마 전 방송에 나와서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군은 신화속 인물이다”, “민족주의로 포장된 역사는 위험하다”고 했는데, 남북의 견해차가 클 것 같다.

강단사학자들이 ‘신화’라고 할 때는 ‘믿지 못할 이야기’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남쪽의 민족주의사학자들은 북한(조선) 사학계와 대화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오히려 강단사학계는 북쪽과 입장 차이를 좁히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조선총독부에서 집중적으로 왜곡한 우리 국사는 크게 세 가지다. 둘은 앞서 홍기문이 간파한 ‘낙랑군=평양설’과 ‘임나=가야설’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조선)의 리순진이 말한 것처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었다. 남한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이 세 가지 총독부 학설을 정설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조선)학계는 이미 1960년대에 모두 극복한 이론들이다. 친일파로 몰렸던 최남선조차도 반민특위에 소환되었을 때 “자신이 단군을 부인했다는 한 조목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단군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지금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같은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친일파로 비판받았던 최남선이 남한 강단사학계를 보면 지팡이로 정수리를 내려치고 싶을 것이다.

식민사관 분단사관 극복하고 민족사학, 통일사학 세워야

- 우리 역사에 대해 남북한의 시각차가 크다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남북한 역사학자의 교류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남한의 역사학과 북한(조선)의 역사학이 민족을 매개로 서로 소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 전에 남쪽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식민사학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반민족사학에 맞서는 민족사학과 분단사학에 맞서는 통일사학의 체계를 세울 때가 되었다. 물론 남한의 민족사학자들과 북한(조선) 사학자들의 역사관에도 서로 다른 점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이런 큰 틀에서 민족의 동질성을 확대하고, 교류를 확대하는 것으로 통일의 길로 나갈 때가 되었다.

- 마지막으로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해제하면서 느낀 소감을 밝혀 달라.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번역하는 동안 1960년대 초반에 이런 방대한 사료를 근거로 대륙 고조선사의 진실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직후 북한(조선) 지식인 사회에서는 중국의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역사관과 일본인의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식민사관의 관점을 폐기하고 우리 민족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집단적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북한(조선)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맞상대하는 것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해방 직후부터 형성된 이런 주체적 역사관의 산물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면 남한 강단사학계는 어떠한가? 지금도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는 것으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것이 아닌가? 당초 고조선이 평남일대의 소국이었고, 진한(秦漢)과 국경이었던 패수가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다가 한중 수교 후 만주지역에서 고조선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둥 고조선 강역이 지금의 요동까지는 갈 수 있다는 둥 비주체적 역사학으로 전환하지 않았나. 앞으로 더 서쪽으로 와야겠지만 강단 일부에서 고조선강역을 요동까지라고 인정한 것은 환영한다. 그러면 낙랑군도 중국 사료대로 하북성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요동반도에 비정하는 것이 맞지 않나?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낙랑군=평양설과 임나=가야설을 하나의 학설이 아니라 도그마로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 강단사학계가 구석에 몰리니까 요즘은 민족주의 자체를 폄하하기도 한다. 정당한 민족주의 사관을 사이비 역사학이라 비난한다. 해방 후 자신들을 ‘신민족주의 역사학’이라고 포장하다가 ‘조선총독부 역사학’이라는 것이 드러나니까 민족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나오는 것이다. 민족이란 동질성이 없다면 우리는 왜 북한(조선)과 통일을 추구해야 하나? 전 세계 모두가 자국사를 쓸 때는 민족주의로 쓴다. 중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영국, 프랑스, 인도 어느 한 나라도 민족주의로 자국사를 쓰지 않는 나라는 없다. 다만 역사를 외국에 대한 침략의 도구로 삼거나 자국사의 잘못된 점까지 미화하는 것이 문제지 민족주의 역사학 자체는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추구하는 역사서술 방향이다. 오직 전 세계에서 남한 강단사학계만 자국사를 폄하하고, 시간을 축소하고, 공간을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역사학은 끝낼 때가 되지 않았나?(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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