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19) 장수왕 : 수도 평양

장수왕(413~491)은 광개토왕의 아들로 광개토왕이 죽은 413년 왕위에 올라 무려 78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등 삼국통일 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왕이다. 그중에서도 장수왕의 제일의 업적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수왕은 재위 15년(427년)에 기본 수도를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옮겼다. 이때 평양성은 247년 동천왕 때의 평양성도 아니고, 343년 고국원왕 때의 동황성도 아닌 새로 쌓은 안학궁과 대성산성이었다. 

평양 천도는 삼국통일 정책(남하정책) 수행의 필연적 요구이다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이전에 있었던 두 차례의 평양천도와는 성격이 달랐다. 이전 두 차례의 천도는 국내외 정세의 필요에 따른 일시적인 천도였고 곧바로 국내성으로 되돌아갔다. 반면에 427년 평양천도는 국가 정책적 요구에 따라 오랫동안 사전 준비를 한 후 기본 수도를 아예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 지배계급은 왜 기본 수도를 평양지역으로 옮겼을까? 그것은 평양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 원활한 통치에 유리한 교통운수 조건, 남진정책 추진의 유리한 교두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평양이 갖고 있는 정치적 상징성이다. 평양은 단군조선 이후 수천 년 동안 고조선의 수도였다. 뿐만 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재령강 유역은 너른 벌판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나라에서 고대문명이 맨 처음 싹트고 발전했던 지역이었다. 고조선의 옛 땅을 모두 물려받고, 삼국통일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려는 고구려로서는 고조선의 수도 평양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4세기 중엽 후반경에 단군릉을 개건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 왕조가 단군릉을 개건한 까닭은 명백하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물려받은 나라라는 것을 내외에 널리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평양천도는 이것을 보다 뚜렷이 할 수 있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이러한 정치적 상징성에만 주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구려 국가발전의 절박한 요구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기본 수도였던 국내성은 고구려의 달라진 위상에 비춰볼 때 수도로서는 불리한 점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국토가 비할 바 없이 넓어진 조건에 맞게 교통운수 조건이 좋은 곳으로 수도를 옮기는 일이 절박한 과제로 제기됐다. 국내성은 이렇게 넓어진 국토를 다스리기에 불리했다. 또한 고구려의 중요한 생산 중심지가 한반도 서북지역(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요동지방으로 바뀐 조건에서 그 많은 물동량을 국내성으로 운반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했다. 이처럼 기본 수도 이전 문제는 경제적 필요성에서도 절박했다. 

그러나 고구려 지배집단이 평양천도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삼국통일 정책을 본격화하려는 군사전략적 필요성에 있었다. 국내성에서 남방 최전선까지는 1500~2000리나 된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남방전선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수도로부터 무슨 지시를 하달하려 해도 거리가 너무 멀어 통신의 신속성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을 부수도로 설정하고 장수산성을 또 다른 부수도(남평양)로 설정해, 전시에는 국왕이 직접 부수도에 머물면서 작전을 총지휘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왔다. 남방진출이 본격화되고, 남방에서의 전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조건에서 이러한 방식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었다. 수도를 아예 평양으로 옮기고, 전시에는 남평양에 국왕이 직접 나가서 전쟁을 지휘하는 효과적인 지휘 통솔체계를 구축해야 할 필요가 절박했다. 

평양천도는 국책으로 결정되어 광개토왕 때부터 준비됐다 

고구려의 남방진출 정책은 일찍이 고국원왕 때부터 본격화됐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고구려 서변지역에서 전연이 준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방정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370년 전연을 동진과 함께 무너뜨리고 고조선의 옛 땅을 모두 수복한 이후 비로소 남방진출 정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평양천도 문제가 중요한 정책적 요구로 제기됐다. 당시 국내성은 역사로 볼 때나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나 수도로는 적절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부터 수도이전 문제가 논의됐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림왕 때나 고국양왕 때에는 수도이전을 본격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할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391년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은 삼국통일 정책을 국책으로 결정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평양천도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 3년(393년)에 평양에 9개 사원을 짓도록 했는데, 이는 평양천도 결심의 유력한 증거이다. 평양에 9개 사원을 건설한다는 것은 평양지방에 큰 도시 구획을 9개나 형성한다는 것과 같으며, 이는 평양을 큰 도시로 건설하려는 원대한 구상과 잇닿아 있다. 이것은 대성산 일대 벌판과 청암동 지역 외에도 대동강 좌우 여러 곳에 새로운 시가지들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413년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광개토왕 때 결정된 평양천도를 최우선 정책으로 추진해 나갔다. 안학궁을 세우고, 대성산성을 축조 완성하고, 이방시설(도시구획)을 건설하고, 동명왕릉을 이설하고, 평양성 일대에 5부를 편성하고, 수도 방위체계를 구축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장수왕 15년(427년)에 마침내 수도를 평양으로 옮김으로써 국내성 시대(기원 3년~427년)를 마감하고 평양성 시대를 열었다. 

강대국 위상에 걸맞게 수도 평양을 건설하다 

▲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안학궁

평양에는 247년과 343년에 임시왕궁 건물이 있었으나, 새로운 강대국의 체모에 맞는 왕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평양천도를 위해서는 강대국의 체모에 맞는 크고 웅장한 왕궁이 필요했다. 고구려의 지배계급은 대외적으로 나라의 강대성을 시위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주민들에게 위엄을 과시함으로써 더욱 더 잘 복종시킬 목적으로 크고 웅장한 궁전을 건설하기로 했다. 대성산 남쪽 오늘날 평양시 안학동에 왕궁 부지를 잡고 대규모 왕궁건설 공사를 추진했다. 이것이 427~586년까지 고구려의 왕궁으로 사용된 안학궁이다. 

안학궁은 대성산 소문봉 바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622m인 약간 마름모형의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궁성의 면적은 약 38만㎡이고, 그 안에 총 건평 3만1458㎡ 되는 52개(궁전 21, 회랑 31)의 건물을 세웠다. 안학궁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규모로 웅장 화려하게 지었는데 그것이 돋보이게 건물 배치와 지형 이용에 많은 관심을 돌렸다. 안학궁 중궁 1호 궁전의 크기를 보면 궁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1호 궁전 자체의 크기는 앞면이 87m이며 옆면은 앞 뒤채를 합해 27m인데, 이것은 우리나라 옛 건물 가운데서는 가장 큰 건물이다. 비교하자면 서울 경복궁의 중심건물(근정전)은 앞면이 30.7m이고 신라 황룡사의 중심건물의 앞면 길이는 49m이다. 

안학궁은 둘레가 2480m로 국내성의 평지성(통구성, 길이 2686m)보다 좀 작지만 국내성 안에는 왕궁 건물 외에도 중요 관청들이 배치돼 있었던 데 비해 안학궁성은 오로지 왕궁성으로 돼 있고, 중요 관청은 안학궁전 앞에 배치돼 있었기 때문에 국내성보다 훨씬 컸다. 안학궁의 건설시기를 둘러싼 이러저러한 논란이 있는데, 안학궁 남문에서 정남방향으로 뻗어나간 대통로를 연결하는 대규모 나무다리가 413년에 가설됐고, 안학궁 중심으로 정연한 이방시설이 포치돼 있는 점으로 볼 때 평양천도 직전에 건설됐다고 확증할 수 있다. 

대성산성은 광개토왕 때 본격적으로 건설되었다 

▲ 고구려 평양 수도성 대성산성

수도이전에서 반드시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왕궁성을 건설하는 것과 함께 수도성의 2대 구성 부분인 산성을 쌓는 일이다. 평양성이 수도성으로 그 전보다 훨씬 크게 건설되는 만큼 산성도 그에 걸맞게 크게 건설돼야 했다. 종전처럼 둘레가 3~5k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성이 아니라 적어도 인구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산성을 쌓아야 했다. 새로운 수도의 위치를 대성산성을 포함한 지대로 결정한 것도 대성산이 일대에서 가장 높고 또 청룡산 줄기를 통해 후방과 연계를 맺을 수 있으며 성안 면적을 넓게 설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성산성은 안학궁 북문에서 직선거리로는 750m, 산성 남문까지는 약 1500m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대성산성은 6개 봉우리(소문봉, 을지봉, 장수봉, 북장대, 국사봉, 주작봉)를 연결하는 능선들과 산허리를 둘러막은 성으로 전형적인 고로봉식 산성이며 둘레는 7076m이며, 성벽의 총 길이는 9248m에 이른다. 대성산성에는 19개의 성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행궁터, 병영터, 창고터 등 수십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170개의 못이 있어 풍부한 물 원천을 갖고 있었다. 대성산성의 축조사업은 그 이전부터 시작됐지만 광개토왕 때 본격적으로 이뤄져 완공됐다. 이것은 대성산성의 기와와 안학궁의 기와가 다른데서 입증된다. 대성산성은 붉은 색 기와만 사용됐고, 안학궁성은 청회색 기와가 사용됐다. 고구려에서 청회색 기와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장수왕 때부터였다. 이것은 이미 광개토왕 때 수도 이전을 정책적으로 결정했다는 방증으로 된다. 

평양천도의 역사적 의의

427년(장수왕 15년) 평양천도는 이전 두 차례의 임시수도를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역사적 대사변이었다. 이 수도이전은 400여년간 기본 수도였던 국내성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평양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웅장한 서곡이었다. 국내성 시대 고구려에 부여된 역사적 대과업이 외세와의 투쟁을 통해 잃어버렸던 고조선의 옛 땅을 모두 수복해 우리겨레의 삶터를 되찾는 것이었다면, 평양 시대 고구려에 부여된 역사적 대과업은 남방진출 전략을 승리로 일궈 삼국통일 위업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삼국통일위업 수행이라는 시대적 역사적 대과업을 올바로 포착하고, 일찍이 4세기 중반부터 남방진출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준비해 왔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평양으로의 천도를 국가 발전의 중대 방침으로 결정하고 광개토왕 때부터 수도이전 준비사업에 힘을 쏟아 드디어 장수왕 때 수도이전의 역사적 대과업을 집행하게 됐다. 이로써 고구려는 삼국통일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였다. 수도와 최전선 사이의 거리가 훨씬 줄어듦으로써 군대 이동, 군수물자 수송, 군사통신의 신속성 보장 측면에서 국내성 시대와 비할 바 없이 유리해졌다. 평양천도는 또한 고구려의 전반적 경제문화 발전을 비상하게 촉진시켰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자체 내부의 발전, 군사적 강화의 측면에서 전환적 계기가 됐으며, 백제 신라 가야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고구려의 위세를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