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16) 소수림왕

고국원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소수림왕(재위기간 371~384년)이 왕위에 올랐다. 소수림왕은 고국원왕의 아들로서 고국원왕 2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71년 10월 부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땅을 전부 되찾고, 후부여의 옛 땅 대부분도 통합했다. 이로써 아시아 대륙의 동방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로 됐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대릉하 지역을 넘어 유주에 이르렀다. 덕흥리에 있는 유주자사 진의 벽화무덤이 이를 실증해주고 있다. 그 무덤에 있는 벽화그림에 따르면 고구려의 관료였던 유주자사 진은 자기 휘하에 13개 군을 두고 통치를 했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비록 고구려의 유주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수년이 지난 후 없어졌지만, 소수림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고구려는 서쪽으로 오늘날의 베이징 지방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강대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삼국 통일 위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앞서 강대국의 체모에 걸맞게 중앙 및 지방 관제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또한 중국대륙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여러 나라들과 유리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시급했다. 당시 중국의 전연과 전진은 352년에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들과 맞서 자기의 권위를 높이려면 그에 걸맞는 국가체제 정비가 시급했다.

▲ 370년대 고구려의 영역

〈삼국사기〉소수림왕 조에 따르면 소수림왕 2년 태학을 설치하고, 4년 율령을 반포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율이란 현재의 형법에 해당되는 것이며, 령이란 지금의 행정법에 상당하는 것으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각종 제도를 말한다. 흔히 소수림왕 때 율령을 반포했다는 사실을 놓고, 고구려가 이때부터 성문법 체제를 비로소 갖추었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게 됐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성문법은 일찍이 고조선(후조선)의 ‘8조범금’부터 있어 왔고, 이후로도 계속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 성문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관습법만 존재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율령 반포와 중앙집권적 체제 성립을 등식화시켜 놓고 이때부터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로 됐다고 보는 것 또한 잘못이다. 법과 제도에 의해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이전에도 각종 법과 제도, 관료기구가 존재했었으며, 전제군주권 역시 공고하게 보장돼 있었다. 고구려의 건국 시기부터 각종 법과 제도, 관료기구가 갖추어졌고, 끊임없이 체계화되고 발전해 왔다. 그리고 전제군주권 역시 공고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소수림왕의 율령 반포는 ‘황제국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고구려는 원래부터 천자의 나라(황제국가)였다. 천자의 나라에 대비되는 나라는 속국 또는 제후국이다. 천자의 나라는 속국과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으며, 하늘로부터 천명(전제권)을 부여받은 나라를 가리키며, 제후국 속국은 천자로부터 명을 받아 왕 또는 제후 노릇을 하는 나라를 말한다. 고구려는 원래부터 천자의 나라였으며, 산하에 제후왕이나 속국왕을 거느렸다. 그런데 굳이 소수림왕 때에 이르러 황제국가를 천명하고 그에 걸맞는 체제와 제도를 정비한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중국 여러 나라들에서 사용하고 있던 황제라는 칭호를 도입하고, 그에 따른 여러 법과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함으로써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내외에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소수림왕의 국가체제 정비의 핵심은 황제국가로서의 체모를 갖추는 데 있었으며, 이것은 황제 칭호의 채택, 독자적 연호 제정 실시, 태학의 설립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황제 칭호를 채택하다

고구려에서 권력의 최고 통치권자는 국왕이었다. 국왕은 전제군주로서 제후왕과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료들의 위에 존재하는 최고의 통치자였다. 그는 각급 관리의 임면권, 군사통수권을 갖고 있었고, 전쟁의 개시와 강화의 체결, 다른 나라와 외교관계의 설정과 단절, 법의 제정과 적용 등 국가 통치 및 활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관했으며 좌지우지했다. 물론 봉건국가의 초기에는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강화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초기 왕권이 취약했다는 단편적 사실을 확대 과장해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를 확립하지 못했다느니, 왕은 전제군주로서의 권한을 갖지 못했다느니 하고 시비질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태도는 역사발전의 일반적 법칙을 외면하고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지 않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동방의 나라들에서 봉건적 통치기구들이 갖춰지고 강화된다는 것은 곧 국왕의 전제권이 강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의 경우도 기원전 3세기 초 국가성립 초기에는 전신국가-구려 때와 같이 5부 귀족들의 세력이 강했고, 귀족평의회 기구의 권능도 상대적으로 컸다. 이것은 왕권의 정치군사적 지반이 튼튼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건국 후 오래지 않아 국왕의 전제권은 비상히 강화됐고, 수많은 후국들이 성읍으로 개편되고, 국왕이 임명하는 관리들이 지방민들을 통치하게 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인사권과 통제권은 고려 때까지도 제한적이었다. 대체적으로 지방의 관리들은 중앙에서 파견하는 경우는 적었고, 지방의 토착 귀족세력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요식적으로 행사됐을 뿐이다). 특히 기원후 3년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부터는 5부 귀족들이 수도에 와서 살게 됐고, 그들은 직접 국왕에게 복무하는 관청들에서 관료로 일하게 됐다. 이처럼 국왕의 전제권이 강화되면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가 튼튼히 확립돼 갔다. 국왕의 전제권 강화는 왕궁과 왕릉을 크게 만드는 데서도 잘 표현되었다. 

고구려의 국왕은 처음부터 황제였고, 고구려는 황제국가였다. 단지 국왕의 칭호를 황제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황제국가라는 것은 국왕(황제)은 처음부터 천자(하늘이 낸 유일한 임금이며, 자기 위에는 그 어떠한 절대자가 없으며, 오직 최고의 지위에서 군림하는 임금)이며, 자기 밑에 여러 제후 왕, 속국 왕을 거느린 나라를 말한다. 고구려 왕은 이미 건국 초기부터 여러 제후왕위에 있는 대왕(천자)이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천제의 아들’, ‘황천의 아들’로, 모두루 묘지명에는 ‘해와달의 아들’, 위서에는 ‘해의 아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서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아들’ 또는 ‘천제의 아들’ 등으로 시조 동명성왕이 천제의 아들로 묘사돼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비롯한 옛 기록들과 금석문에는 고구려의 최고 통치자 칭호를 왕, 대왕, 태왕, 성왕, 성태왕, 명왕, 신왕, 호태왕, 호태성왕, 제, 성제 등으로 쓰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이 땅에서 독자적으로 세워진 나라였고, 그 최고 통치자 칭호도 스스로 채택했다. 또 고구려 왕은 처음부터 대왕이었고 고구려에서만 쓰인 각종 존칭(명, 성, 신, 호, 호태)을 덧붙여 부르기도 한 것 자체가 고구려 왕호의 독자성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왕은 처음부터 천자이고 대왕이었으며,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에 있었다. 즉 고구려 왕 밑에는 제후 왕, 속국 왕 등이 있었고, 이웃나라들인 백제, 신라도 고구려와 사대하는 관계에 있었다. 단지 최고 통치자의 칭호만 황제라고 쓰지 않았을 뿐 명실상부한 황제국가였다.

소수림왕은 삼국통일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앞서 나라의 체제와 제도를 동아시아의 강대국 면모에 걸맞게 고쳤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내외적으로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로 만들기로 하고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그 이전까지도 황제국가였지만, 동아시아 최강국의 지위에 올라서고,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의 외교 무역관계를 활발히 벌여 나갈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황제 칭호를 고구려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소수림왕 통치 시기 초기에 황제를 칭하고 그에 맞는 제도를 실시하였다는 것은 여러 역사기록에 단편적으로 밝혀져 있다. 〈수서〉(636년 완성) 고구려전에는 고국원왕을 소렬제라고 불렀다고 두 군데에서 나온다. “위궁(동천왕)의 현손의 소렬제라고 하였는데, 그는 모용씨에게 격파되었다. 모용씨는 드디어 환도에 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소렬제는 후에 백제에게 살해됐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소렬제는 고국원왕이며, 소렬제라는 칭호는 그의 아들인 소수림왕이 추증한 시호로 볼 수 있다. 

고구려 대왕이 황제의 체모에 맞는 용어를 썼다는 것은〈삼국사기〉권20 고구려 본기 영양왕 11년 정월조에 태학박사 리문진에게 조(황제의 지시를 가리키는 말로, 조했다는 것은 황제가 지시했다는 말을 뜻함)해, 〈신집〉5권을 편찬하게 했다는 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관점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이 천자-황제로 처신하면서 쓴 말들을 모두 다 삭제해 버렸는데, 용케도 이것만은 남아 있었다. 또 고구려왕이 황제국가의 틀을 구비했다는 것은 ‘태학’이나 ‘태묘’를 두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나 있다. 태학이나 태묘라는 말은 황제의 나라에서나 쓰는 말이다. 〈삼국사기〉소수림왕 2년(372년) 6월조에는 “태학을 세워 자식을 교육했다‘고 나와 있고,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 벽화무덤에는 ’태묘작식인‘(태묘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란 묵서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단편적이나마 고구려가 황제국의 체모에 걸맞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황제 칭호를 채용한 후에도 본래의 왕, 대왕, 호왕, 호태왕, 호성왕 등의 칭호들을 그전처럼 썼다. 

독자 연호를 사용하다

소수림왕이 황제 칭호를 채택했다는 주요 근거 중의 하나는 독자적 연호를 제정 실시한 것이다. 소수림왕은 자신의 통치 시기 초기(율령 반포 직후로 판단됨)에 자기의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황해도 신천군 복우리에서 나온 벽돌에는 ‘건시 원년 한씨 조전’이라는 새김글이 발견됐다. 중국에서도 전한 성제 때인 기원전 32~29년 사이에 ‘건시’라는 연호를 쓴 일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벽돌에 연호를 새기는 풍습 자체가 없었다.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발견된 기년명이 있는 벽돌들은 대부분 2세기말엽 이후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호는 370년대 초에 고구려가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 실시한다는 뜻에서 쓴 연호일 것이다. 고국원왕 통치 시기만 해도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동진, 후조의 연호를 빌려 쓰고 있었다. 이는 무덤 묵서나 벽돌유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374년 이후에는 ‘태녕’이라는 연호를 썼다. 근년에 집안에서 나온 기와막새에 ‘태녕 4년 태세□□ 윤월 6일 기사’라는 새김글이 나왔다. 일부 사람들은 이 연호를 동진의 연호라고 주장한다. 동진의 태녕 3년(325년)에도 ‘윤 8월6일 기사일’이 있으니, 햇수를 잘못 쓴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러나 三을 四로 잘못 새긴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태녕 4년 윤월 6일’ 기사는 377년(소수림왕 7년) ‘윤 3월6일 기사’로 보아야 하며, 그 첫해는 374년이다. 따라서 건시 연호는 고구려가 황제 칭호를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372년부터 374년까지 햇수로 3년간 사용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연호

이처럼 소수림왕의 율령 반포는 고구려가 비로소 성문법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황제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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