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종전선언이 필요하다(2)

싱가포르에서 종전선언이 있을 거라는 섣부른 기대가 있었으나 정전협정 65년째인 7월27일이 지나도록 종전선언 소식은 깜깜하다. 북은 핵‧미사일 시험 동결, 북부 핵시험장 폐기, 미군 유해송환, 미사일발사 시험장 해체 등 선제적 조치를 연이어 취하고 있지만, 미국은 외려 몽니를 부리며 선비핵화 요구를 바꾸지 않고 있다. 이런다고 다른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닌데, 패권주의의 미몽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4.27판문점선언 시대를 낙관하는 것은 좋으나 미국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금물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상황이다. 이에 4.27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할 종전선언 문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안호국 시사평론가의 글을 세 차례 연재한다. 

1. 휴전협정, 강화협정, 평화협정 그리고 종전선언
2. 한국전쟁, 휴전협정과 정전체제
3. 판문점선언시대 종전선언이 가지는 의미

1951년 들어 38선에서 전황이 교착상태에 접어들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은 그해 5월 31일 새 명령서를 연합군사령관 리지웨이에게 하달하였다.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담은 이 명령서에서는 미 합참은 리지웨이에게 정전을 추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측은 한달후인 1951년 6월 30일 정전협상을 공식 제의하였다. 여기에 북과 중국이 동의하여 정전협상은 1951년 7월 10일에 처음 열렸다. 하지만 정전협상은 그 후 거의 2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정전회담에서 다루어야 하는 내용이 첨예하고 복잡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미국이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두차레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벌이면서 회담을 중단시켰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51년 8월중순부터 11월초순까지 원폭위협과 함께 대병력을 동원한 ‘하기 및 추기공세’를 벌였으며 다시 1952년 말부터 1953년 5월까지 벌인 ‘신공세’로 불리우는 대규모 북진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 두 번의 공세에서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수만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두 번에 걸친 대공세는 실패로 끝났자 미국은 정전회담장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과 북측 협상대표 남일이 3통의 휴전협정서와 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유엔군을 대표하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조선인민군을 대표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을 대표하여 인민지원군 총사령원 펑더화이가 각각 그의 후방 사령부에서 휴정협정서에 서명하였다.

한국군은 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한 상태였으므로 휴전협상에 참가할 수 없었고, 이승만정권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정전협정으로 흔히 불리우는 한국전쟁 휴전협정은 ① 적대행위와 무장충돌 정지 ② 정치회의 소집 ③ 군사인원과 군사장비 반입금지 ④ 정전체제 관리기구의 설치 ⑤ 비무장지대 설치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5조 63항으로 되어있으며 여기에는 11조 26항으로 된 부록이 첨부되어 있다.

정전협정은 ‘KOREA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후전협정은 서문에서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서와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정전협정 제12항에는 ‘육군, 해군, 공군을 포함하여 적대 쌍방 사령관의 통제하에 있는 모든 무력에 의한 모든 적대행위의 완전 중지(complete cessation of all hostilities)’를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휴전협정보다는 강화협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휴전협정은 전면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정전협정에 머무르고 말았다.

무엇보다 먼저 전쟁의 발발원인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휴전협정에서는 ‘정전쌍방이 정전 후 3개월 내에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거시키며 KOREA문제를 KOREA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문제 등을 협의’하도록 규정하였다.

하지만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한급높은 정치회담’은 미국이 처음부터 이행을 거부하여 열리지도 못하였다. 이로서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잠정적 전쟁중지상태를 이룬데서 멈추고 말았다.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미국이 북에 대한 적대적 의사와 적대적 방법에 의한 적대적 목적 추구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5조 60항에 정해진 외국군대의 철거가 이뤄지지 않았다. 한반도 경외로부터 군사인원과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증강하여 들여오는 것을 금지한 군사력 증강금지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은 1975년에 이르러 천여개의 핵무기와 54대의 핵적재기를 배치하는 등 핵무기까지 한반도에 반입하였다. 노골적이며 난폭한 협정 위반행위인 한미군사훈련은 횟수와 규모를 늘렸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선제핵공격과 전면전쟁도발을 공언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한반도 정전체제는 날이 갈수록 군사적 대결이 격화되고 전쟁발발위기가 고조되는 정전상태로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협정의 준수를 강제하고 군사적 충돌을 규제하는 기능이 매우 약했기 때문이다.

1953년부터 1991년까지 유엔군측이 북측이 정전협정을 위반하였다고 주장한 사례는 총 42만4,356건에 이르며 북측이 지적한 유엔군측의 휴전 협정 위반사례는 45만4,605건이다. 하지만 양측이 시인한 정전협정의 위반 건수는 각기 2건과 16건에 불과했다.

정전협정에서는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전면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고 중립국감독위원회와 군사정전위원회 등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비무장지대의 많은 지역이 점차 가장 무장된 곳으로 변하였다. 군사정전위원회는 유명무실했으며 중립국감독위원회는 냉전체제가 해체되자 소멸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협정준수 기능이 약했던 정전협정은 아예 ‘관리체계가 없는 협정’으로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한국전쟁 정전체제는 전쟁의 실질적인 종식을 보장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낳은 문제는 더 심각하다.

먼저 정전체제는 북과 미국, 남과 북 사이를 적대적 관계로 규정하고 이를 유지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정전체제는 상대에 대해 적대적 의식을 가지도록 강요한다. 적대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정전상태를 전쟁상태가 지속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고 적대적 수단에 의해 적대적 목적을 달성함으로서만 전쟁상태를 종식하는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

한국전쟁 정전체제는 상대를 교전 대상국으로 남겨둠으로써 적대정책을 추구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군사적 대치상황뿐만 아니라 적대적 대결의식이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로 되고 있다.

이처럼 정전체제는 우호관계로 전환하고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1968년 푸에블로호사건으로 시작된 전쟁위기, 1969년 미국EC-121정찰기 격추로 야기된 전쟁위기, 1976년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으로 인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 1991년 120일 전투 시나리오 등으로 조성된 제2의 한국전쟁위기, 1994년 미국의 영변폭격 시도로 닥친 전면전쟁 위기, 1998년 금창리 핵 위기, 2002년∼2005년 부시의 ‘악의 축’발언 및 제네바합의 파기로 고조된 전쟁위협, 2013년 한반도전쟁위기, 2017년 북미 군사대결 등 여러번에 걸쳐 전면전쟁의 위기가 발생했다. 이는 정전체제가 평화체제수립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발발 위기상황에서 휴전협정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휴전협정, 정전체제는 ‘전쟁과 평화 양측면 모두에서 낡고 무기력한 것으로 되었다’고 한다.

전쟁을 끝내지 못한 정전협정, 적대관계를 강요하는 정전체제는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가 자리잡게 하지 못하는 장애물이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