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민족의 통일 내전을 국제전으로 확대시켜 수백만 명을 죽게 한 미국의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1995년도에 출간한 그의 저서 「베트남의 비극과 교훈」을 통해 “미국의 지도자는 인류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원칙마저도 무시했다”며 미국의 베트남전은 전쟁범죄였다고 자인했다.

▲ 베트남 전쟁 고엽제 피해[사진 : 호치민 전쟁 박물관 캡처]

■ 폭력의 원천 미 제국 
1967년 4월4일 대중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의 원천은 우리의 조국 미국이다.” 

CIA가 베트남에서 비밀리에 벌인 피닉스 작전의 간부였던 랄프 맥그히는 자신의 글을 통해 미국의 범죄행위를 폭로했다. “내가 지난 25년 동안 나의 조국 미국을 위해 한 일은 살인과 고문이었다.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적의가 없는 민간인을 네이팜탄을 써서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베트남과 한국은 비슷한 역사의 굴곡을 거쳤다. 2차 대전 이전까지 베트남은 프랑스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2차 대전 이후 자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열망은 미국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도 미국의 간계로 무산되고, 민족의 염원을 배반한 단독선거를 거쳐 분단정부가 급조되었다. 

제국의 탐욕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인도차이나전쟁을 살펴보면, 우리 강토를 분단하고 우리 민족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내몬 미국의 한반도 정책도 쉽게 알 수 있다. 

■ 베트남전쟁의 비극
1943년 11월 미·소 정상은 테헤란에서 만났다. 스탈린은 “과거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종전과 함께 해방되어 각기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주장에 공감하며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의 반발이 예상되기는 하나, 미·소 양국의 확고한 의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구 제국의 식민지 복원보다는 일정 기간에 걸친 연합국의 신탁통치 쪽으로 기울였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제3국들을 독립시키기로 합의한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확약을 저버린 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복원을 지원하고 나섰다.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은 일본군을 무장해제한다는 구실로 베트남을 북위 16도로 나눈 뒤, 각각 장제스의 중국군과 영국군(영·불 혼성부대)에게 북부와 남부 지역을 접수케 했다. 

한편 일본의 통치권을 인수한 베트민은 베트남 인민의 무혈혁명을 거쳐 1945년 9월 초에 독립국가의 수립을 선포했다. 점령군과 베트민 정부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민 정부의 저항을 차단하고자 베트남의 통일정부 수립에 협조하겠으니, 대신 프랑스연방에 편입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호찌민은 이 제안을 수락했다. 

1946년 3월6일 북베트남(베트민)과 프랑스는 프랑스연방 결성에 합의했다. 합법적인 주둔권을 확보한 프랑스는, 과거 자신의 꼭두각시였던 응웬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복귀시켰다. 반민족적인 고위관료들도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이는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식민통치를 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북베트남이 반발하자, 프랑스는 이들의 근거지인 하노이와 하이퐁 등을 무차별 공습해 1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을 학살했다. 

호찌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도와달라며 트루먼과 미 국무부에 8차례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 민족에게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50년 동안 서구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며 프랑스를 옹호했다. 1950년 초 미국은 프랑스의 꼭두각시인 바오다이 왕조를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면서,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은 소련의 사주로 세운 괴뢰정부라는 흑색선전을 했다. 

▲ 베트남 전쟁 피해자[사진 : 호치민 전쟁 박물관 캡처]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되찾으려는 북베트남과 이를 막으려는 프랑스 사이 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이는 1951년 1월11일 제100회 국가안보위원회 회의록과 같은 해 1월 말에 개최된 트루먼 대통령과 프랑스 프레벤 총리의 회담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은 프랑스를 통해 인도차이나반도를 간접 지배함으로써 민족주의 도미노 현상을 차단하고 미국의 패권을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전후 프랑스는 군사력을 회복하려면 상당 기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2차 대전이 끝난 지 1년도 안돼서 인도차이나를 재침하고, 아프리카 식민지를 관리했다.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 실제로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에 소요된 비용의 80% 이상을 미국이 부담했다. 거듭되는 패배에 프랑스가 발을 빼려하자 미국은 4억 달러의 추가 지원금을 약속하기도 했다.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도 미국은 1만6000여 증원군과 각종 보급품을 공수했다. 50일 동안 계속된 전투는 사상자가 4만 명에 이를 정도로 격렬했다.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프랑스군이었지만 죽음을 각오한 북베트남군을 이길 수 없었다. 전투에 패배한 프랑스는 종전협정을 서둘렀다. 호찌민은 “이는 작은 승리일 뿐이다. 이제 미국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며 앞날을 예측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종결과 평화를 논의하기 위한 제네바회담이 개시되기 직전인 1954년 3월29일,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동남아는 천연자원이 풍부해 전략적 가치가 높다” “이 지역이 공산화된다면 다른 곳도 위험하다” “북베트남은 타도해야할 대상이다”라는 등 미국의 야욕을 확연히 드러냈다. 

■ 미국의 제네바협정 파기 공작
1954년 5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열려 7월20일 최종 서명을 마친 제네바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6년 7월 이전까지 국제감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 베트남 동시 총선거를 실시한다. 지역 내 모든 국가와 각종 무장단체의 적대행위를 종식한다. 인도차이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국군을 철수한다. 지역 내 무력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외국과의 군사동맹을 금한다. 프랑스 군대는 완전히 철수한다는 등이 내용이다. 

회담을 진행하면서 미국은 협정 체결에 강력히 반발했다. 1956년 5월6일 국가안보위원회에서 아이젠하워는 적극적인 무력개입을 강조했다. 5월14일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 협상대표단에게 “미국은 평화협정에 동의할 수 없으며, 프랑스 연합군이 인도차이나에 주둔하지 않는 한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전문을 보냈다.  

이후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자 지역분쟁을 지속시킴으로써 이 협정이 파기되도록 테러공작에 착수했다. 교량·항만·상수도 등 주요시설 파괴, 요인 암살, 사보타지 공작 그리고 제네바협정에 의해 명백히 금지된 살상무기 밀반입이 바로 그것이다. 

■ 미국의 베트남 분단공작
북베트남이 제네바협정에 따라 1956년 7월에 실시키로 한 총선을 준비하자, 미국은 제네바협정이 베트남 주민의 뜻을 반하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1955년 10월 북위 17도선 이남에서 단독선거를 강행했다. 아이젠하워는 남북 베트남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면 80% 이상의 주민이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을 지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베트남 고 딘 디엠 정부는 선거에서 98.2%의 지지를 받았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선거는 엉터리였다. 당시 사이공 지역의 선거사무소에 등록된 총유권자는 약 45만 명이었는데 이 지역 유효득표수는 60만5000표였다. 고 딘 디엠은 당선 뒤 분단 고착화를 위해 공산주의자는 물론 민족주의자 등 반체제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그 수는 1957년 한 해에만 1000여 명에 달했다. 이에 맞서 학생, 지식인 여기에 승려들까지 격렬히 저항했다. 1960년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본격적인 무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남베트남 정부가 위태로워지자 미국은 공개적인 무력개입으로 정책을 변경했다. 남베트남 주둔 미국 병력은 1962년에 1만2000명으로 늘었다. 이듬해에는 1만5000명으로 증원되었다. 또 핵무기를 사용하는 사안을 검토하면서, 미국이 핵무기를 쓰더라도 소련이 맞대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잠정 결론까지 내려놓고 있었다. 다만 예상되는 국제적 비난과 베트남의 자연 조건상 핵무기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재래식 전쟁을 택했다. 

■ 미 제국의 통킹만 사건 날조
케네디 암살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 행정부는 군사적 압박을 더욱 가중시켰다. 1964년 8월5일 존슨 행정부는 미 의회에 교서를 통해 이렇게 강변했다. “북부베트남군이 통킹만 근해의 공해에서 통상적인 정보수집 업무를 수행하던 미 해군 함정 매독스호에 어뢰를 발사하여 피해를 입혔다. (중략)따라서 북부베트남을 응징하지 않고는 이 지역의 자유와 안보를 유지할 수 없다. 이는 결코 군사적·정치적·영토적 탐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미 의회는 상·하 양원 합동 결의안 제1145호(1964년 8월7일)를 통과시킴으로써 존슨 행정부에게 무제한적 무력 사용을 승인했다. 

그러나 통킹만 사건은 미국에 의한 날조였다. 간단히 살펴보면, 
- 1964년 8월2일, 매독스호는 통킹만 부근에서 통상적 활동이 아닌 남베트남군 특공대의 해상침투공격을 지원하는 비밀작전(34A 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을 벌이던 중 북베트남 소형 선박들과 전투를 벌여 선체에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북베트남쪽은 상당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 8월4일, 34A 작전을 수행하던 매독스호는 적의 어뢰정으로 추정되는 미확인 물체를 포착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주변 해역을 샅샅이 뒤진 결과 적함은 커녕 어선 한 척 발견하지 못했다. 매독스호의 존 헤릭 함장은 과민반응에서 야기된 해프닝이었다며, 사실 자신이 들은 것은 매독스호의 프로펠러 소리였다고 털어놓았다. 
- 8월4일 밤, 존슨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함정을 공격함에 따라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베트남 주요 군사시설과 정유기지를 폭격하도록 명령했다고 말했다.

훗날 비밀이 해제된 문서를 보면, 존슨 정부의 국무차관 조지 볼은 통킹만 사건 발생 두 달 전부터 전쟁도발 각본을 준비했다. 북베트남의 보복 공격을 유인한 뒤 이를 빌미로 베트남을 침공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북베트남이 반격하지 않자 이를 날조한 것이다. 

▲ 베트남 전쟁 학살[사진 : 호치민 전쟁 박물관 캡처]

■ 피닉스 작전과 미라이 학살
1967년부터 CIA의 지휘 아래 베트남 분단 고착화를 위한 피닉스 작전이 전개되었다. 공산세력을 색출한다는 미명 아래 민간인을 강제로 납치·고문했다. 고문방법이 특히나 잔혹했는데, 6인치 나사못을 한쪽 귀에 삽입한 뒤 반대편 귀를 향해 죽을 때까지 뇌를 관통시키는 고문(?)을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작전에 관여했던 CIA 간부 오스본은 1971년 7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들(피닉스 작전으로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베트콩과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들 대다수는 고문으로 죽거나 산 채로 헬기에 실려 태평양에 던져졌다.” 

초급 장교의 단순한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진 미라이 대학살도 피닉스 작전의 일환이었다. 미 11여단 소속 한 소대가 인구 700명의 작은 농촌인 광나이성 손아미촌 미라이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베트콩을 색출한다며 기관총으로 노인, 부녀자, 어린이를 막론하고 무차별 학살했다. 

미라이 대학살은 사건 발생 1년 반 만인 1969년 11월, 「라이프」의 허시 기자가 사진과 함께 그 전말을 폭로하여 세간에 공개되었다.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던 1970년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이 피닉스 작전의 일환이었음을 폭로했다. 광나이성 CIA 조정관 랜스데일은 미라이 주변 일대에 베트콩 동조자가 많았기 때문에 섬멸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었다고 진술했다. 한편 현장에서 학살을 지휘한 칼리 중위는 “나는 단지 임무를 수행했기에 그 일이 잘못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 미 제국의 패배
북베트남군과 베트남 해방전사(베트콩)의 끈질긴 공세와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 그리고 국내 반전 여론으로 미국은 전쟁을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워졌다. 존슨의 뒤를 이은 닉슨 정부는 베트남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외교적 절충을 모색한다. 그 결과가 바로 1971년에 이루어진 키신저의 역사적인 베이징 방문이다. 키신저는 미국이 타이완 독립을 고집할 의향이 없다고 하면서, 전쟁 종식을 위해 중국 정부가 호찌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1973년 1월 미국은 남베트남, 북베트남,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함께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외국군 전면 철수는 협정 내용에 포함되었지만, 17도선 이남의 10만 북베트남군 철수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아울러 미국은 북베트남 재건 명목으로 32억5000만 달러의 전쟁배상금까지 물기로 했다. 사실상의 항복선언이었다. 결국 미국은 프랑스를 내세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패한 지 20년 만에 또다시 같은 적에게 패했다. 미국이 완전히 손을 뗀 1975년 4월 남베트남도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한국전쟁과 맞먹는 사상자를 냈다. 미군 사망자 5만8721명, 남베트남군 사망자 18만3523명, 북베트남 정규군 사망자 약 92만5000명 여기에 민간인 사망자는 300만 명에 육박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퍼부은 폭탄은 800만 톤에 달했다. 이는 당시 베트남 국민 1인당 약 150kg의 폭탄을 퍼부은 셈이었다.

■ 우리는 떳떳한가?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베트남의 자주통일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침략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나라가 한국이라는 사실이다. 한국군이 자행한 무차별적 학살은 결코 미군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린 이 전쟁을 두고 뭐라고 말해야 할까?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말처럼, “동맹국인 미국의 수고를 덜기 위해 자원한 뜻있는 전쟁이었으며, 이를 통해 국군의 전투력이 향상되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베트남 인민에게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인가? 

▲ 남베트남 응 엔 응쿠 론 장군이 1968년 2월1일 사이공 거리에서 베트콩 간부 응우 엔 반 렘에게 권총을 발사해 총살하는 장면[사진 : AP / Eddie Aadams]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