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제동맹론

앞에서 설명했듯이 마오의 만리장정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마오는 만리장정 도중 섬서에서 장국도를 따라 되돌아가지 않고, 연안으로 북상항일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대중이 있는 새로운 근거지를 발견했어요. 그게 반제동맹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레닌의 노농동맹론에서 마오의 반제동맹으로 나갔어요. 레닌은 도시 봉기와 전격전을, 마오는 농촌 근거지에서 지구전을 전개했지요.

마오의 만리장정은 국제 마르크스주의운동에 거꾸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레닌 사후 코민테른에서 내부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요컨대 민족주의자와 연대를 계속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어요.

이 갈등의 발단은 중국에서 국공합작과 연관됩니다. 1927년 4월 장개석의 상해 쿠데타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의 배반에 분노했죠. 더구나 1929년 서구에서 대공황이 발생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곧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죠.

코민테른에서는 수정주의자를 배제하고, 민족주의자와 결별하자는 주장이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던 중국의 공산당도 여러 가지 오류를 범했습니다.

마오의 농촌 근거지 전략의 성공은 점차 국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스탈린 역시 초기의 혼란을 넘어서서 마오의 투쟁을 지지했습니다. 스탈린의 비호 덕분에 마오는 구추백, 이립삼, 왕명과 박고의 계속된 압박 가운데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거꾸로 마오의 승리는 스탈린의 헤게모니를 강화했죠. 나는 이것을 마오와 스탈린의 신뢰관계라 규정하고 싶습니다.

마침내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스탈린-디미트로프의 통일전선론이 승리하게 됩니다. 다시금 유럽에서 반파쇼 인민의 단결과 식민지에서 민족주의자와의 연대가 확인되었던 거죠.

사람들은 국제적으로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는 정세가 이런 전략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오의 농촌 근거지 전략의 성공과 마오와 스탈린의 신뢰관계가 그런 전략 변화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2) 주요 모순

마오의 반제동맹론은 코민테른 내에서 통일전선론의 영향도 있지만 만리장정을 통해 스스로 깨닫기도 했습니다. 이런 반제동맹론은 국민당에 대해 내전을 중단하고, 단결해 항일투쟁을 하자는 제안으로 이어집니다.

마오가 국민당과 다시 공동으로 투쟁하자는 주장을 하니, 국민당으로부터 그토록 집요하게 박해받았던 공산당원이 처음에 아연실색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당내에서 반대여론이 들끓었겠죠. 이 반대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마오는 철학을 제시합니다. 그게 <모순론>이죠. 원래는 연안에서 마오가 당 정치학교에서 강의했던 내용이라 합니다.

마오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바로 이 모순론입니다. 그는 기본 모순과 주요모순을 구분합니다. 시대가 바뀌면 기본 모순은 동일하더라도, 주요 모순이 바뀌니, 각 시대의 주 타격 방향은 이 주요 모순을 향하여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고답적이라 잘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여 들어왔습니다. 일제의 배후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전을 통해 일제가 들어올 여지를 열어놓은 탓이 아닙니까? 내전을 제거하면 일제는 배후를 상실합니다. 적을 막으려면 적의 배후를 쳐라, 적의 배후, 그게 적의 급소이고, 철학적으로 이걸 주요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 국공합작 당시 장개석(왼쪽)과 모택동.[사진 : 구글검색]

3) 2차 국공합작

마오는 반제동맹을 위해 적극적으로 장개석과의 합작을 모색합니다. 기회는 주어졌습니다. 중국내 항일 여론은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압박했습니다. 장개석은 요지부동으로 연안에 고립된 중국 공산당을 공략하기 위해 장학량이 주둔한 연안 인근 서안으로 왔습니다.

장학량은 만주의 군벌 장작림의 아들입니다. 일제가 장작림을 폭살하고 1931년 9.18사변으로 동북만주를 장악한 이후, 장학량은 울분에 차있었습니다. 들끓는 여론을 배경으로 그는 장개석을 감금하고 내전 중지, 일체 항일이라는 요구를 강요했습니다. 이를 소위 병간(兵諫)이라 합니다.

장개석은 여론을 마침내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공산당은 다시 국민당과 합작했지요. 과거 1차 합작이 국민당 내로 공산당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국민당의 지도를 받더라도, 공산당이 독자적으로 활동한다는 방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공산당의 군대는 장개석 군대의 팔로군으로 편입되고, 연안의 소비에트 정부는 변경지대의 특별정부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런 변화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연안지방의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변화죠. 이 내부적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이 마오의 <신민주주의론>입니다.

4) 신민주주의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립하여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제시했습니다. 그 특징은 한마디로 계급, 계층 대표제입니다. 이런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레닌은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대변하는 계급계층을 노동자, 농민으로 제한했습니다. 소위 노농동맹에 기초한 거죠.

마오는 이제 노농동맹에서 반제동맹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는 내용적으로는 노동자, 소작농에 더하여 애국 지주, 민족부르주아와 연대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토지몰수라는 농촌혁명을 중단했어요. 소지주, 애국지주를 위해 소작료 3·7제 획득으로 투쟁을 완화했지요. 민족부르주아의 활동을 위해 산업 국유화를 주요산업에 한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의 형태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인민민주주의 정부라는 건데, 한마디로 소비에트의 계급계층 대표제에서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핵심인 지역 대표제를 다시 도입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소위 정치협상을 제도적으로 설치했어요.

즉 다양한 계급, 계층을 대변하는 정당, 단체가 협상해서, 공동의 투쟁목표를 세웁니다. 그리고 인구 비례에 따라서 대의원의 수를 나누고, 공동으로 입후보한다는 제도죠. 우리가 흔히 아는 선거연합과 유사한 것이라 보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5) 결론 

모순론, 통일전선론, 그리고 신민주주의론, 이 세 가지가 마오의 마르크주의 즉 아시아 마르크스주의 주요 내용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발전해왔습니다. 각기 자신의 사회에 적절한 정치적 투쟁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에서 객관적 조건(생산력과 생산관계)과 집단적 실천(계급투쟁)이라는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죠.

이것으로 레닌와 마오의 비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회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무려 150년을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제 과거를 넘어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로 돌아와 보죠. 마르크스주의는 이 시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오래 우회했습니다만 막상 여기에 부딪히니, 말문이 막히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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