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의 고구려사] (6) 자주권 수호와 겨레 통합

고구려는 천자의 나라이다. 천자의 나라로서 나라의 자주권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이를 고수했다. 평화롭게 발전해가던 고구려에게 닥친 첫 시련은 기원전 108년에 있었던 한 무제의 고조선 침공이다. 당시 한 무제는 고구려와 고조선을 같은 나라로 봤다. 당연히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에도 한사군을 설치하려 했다. 바야흐로 고구려에도 전운이 감돌고 생사존망의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현도군 설치를 저지하기 위한 고구려 인민들의 투쟁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점령하면서 내친 김에 고구려까지 점령하려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아마도 고구려를 고조선의 한 후국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한 무제는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고 그곳에 현도군을 설치하려고 계획했다. 이것은 현도군의 수현(군소재지가 있는 현)을 ‘고구려’현으로 불렀다는 사실로서 알 수 있다. 한나라 군대는 이러한 계획에 따라 고구려 영토 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한나라 침략군은 고조선의 북부 영역을 강점한데 그치지 않고 고구려의 서북 변방에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양맥지방과 오늘의 신빈현 서변을 강점하고 혼하 중류지방(오늘의 청원현 서부)까지 침입했다.

이것은 고구려의 생사존망과 관련된 것으로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는 엄중한 사태였다. 고구려 인민들은 자기 땅에서 한나라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에 떨쳐나섰다. 고구려 인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한 무제는 고구려 땅 전체를 장악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고구려의 서북변(오늘의 청원현 서부)에 고구려현을 설치하고 그 서남쪽에 상은태현, 서개마현을 설치하고 요하 좌우지역에 망평현, 후성현, 요양현, 안시현, 평곽현, 문현 등을 포함해 현도군을 설치하고(기원전 107년), 그 수현으로 고구려현을 삼았다.

▲ 초기 한사군의 위치도(기원전 108년~82년)

 

처음에 오늘의 청원현 서쪽에 설치됐던 고구려현은 고구려 인민들의 반격으로 오래 버틸 수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으로 쫓겨났다. 이것은 처음 고구려현이 설치됐던 청원현 지역에 한식 고성이나 유물 등 한나라 때의 어떤 유적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한 무제의 한나라 군대는 고구려 인민들의 반격에 서쪽으로 쫓겨나, 오늘의 무순시 동쪽 7km지점인 동주하 서안 혼하의 합류지점에 있는 소갑방 고성에 고구려현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곳이 제2현도군치이며, 여기에서는 ‘천추만세’, ‘현’자 새김글이 있는 기와 막새, 토기 등과 오수전 같은 한나라 때 유물들이 출토됐다). 따라서 전한 시대에 현도군의 소재인인 ‘고구려현’은 사실상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소갑방 고성에 있었던 고구려현은 이후 기원 14년 고구려-신나라 전쟁 당시 고구려 군에 의해 점령됐다. 점령이후 고구려 군은 이곳에서 철수했지만 당시 중국의 신나라는 더는 소갑방 고성에 고구려현을 그냥 둘 수 없어, 그곳으로부터 서쪽으로 20리가량 떨어진 무순시 영안대(노동공원) 고성으로 옮겨졌다(제3현도군치). 이후 기원 105년경에 다시 서쪽 심양 부근으로 옮겼다(제4현도군치). 이처럼 한나라 침략군은 고구려의 줄기찬 반격에 밀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쫓겨났다. 한편 고구려가 한나라 침략군과 맞서 싸우고 있을 때, 고조선 유민들은 압록강 좌우 연안에서 한나라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완강하게 벌여 그곳에 황룡국, 안평국을 세웠다.

2군 폐합과 요동군의 동천

한 무제는 원래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과 고구려 땅에 한사군을 설치하려고 했다. 낙랑군은 평양을 중심으로 요동반도 지역에 설치하고, 현도군은 고구려 땅에 설치하며, 임둔군은 낙랑군 동쪽 강원도 일대에, 진번군은 진반소국이 있었던 함경남도 일대에 두려했다. 하지만 고조선 유민들과 고구려 인민들의 완강한 반침략투쟁으로 한 무제의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으며 도상계획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압록강 남쪽 한반도 지역과 고구려 지역으로는 진출할 수 없었다. 한나라 침략군들은 압록강 하구 북쪽지역과 본계 동쪽, 청원 서쪽, 철령 남쪽 지역밖에 장악할 수 없었으며, 이 지역에 3개군(낙랑, 현도, 임둔)밖에 설치할 수 없었고 진번군은 실제로는 설치되지 못한 채 이름만 있었던 상태였다.

고조선 유민들과 고구려 인민들은 이후에도 완강한 투쟁을 펼쳐, 한나라 침략세력들의 낙랑, 임둔, 현도군의 통치 질서를 뒤흔들었다. 한나라 지배층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낙랑, 임둔, 현도군의 통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특단의 조처로서 임둔, 진번 2개군을 폐지하고 이를 낙랑, 현도군에 통폐합했다. 이것이 기원전 82년에 있었던 이른바 ‘2군 폐합’ 조치이다. 이 조치로 폐지된 임둔군에 속해 있던 현들 중에 요동반도 동남쪽 7개현은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서안평, 무차현은 현도군에 넘겼다.

2군 폐합 조치에도 불구하고 낙랑, 현도군의 지배질서가 잡히지 않자, 후속조치로서 대릉하(고조선과 한의 국경이었던 패수) 서쪽지역에 있었던 요동군을 이 지역(낙랑군, 현도군이 있었던 대릉하 이동지역)으로 옮기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기원전 70년대초). 이것은 요동군이 연나라 때 이래로 오랫동안 동북변방의 최전방에 있으면서 인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정한 기초를 쌓았고, 또 북방민족과의 싸움에서 일정한 경험을 축적한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요동군이 대릉하 이동으로 옮김에 따라 낙랑, 현도군은 자기에게 소속돼 있던 넓은 지역을 요동군에게 넘겨줘야만 했다. 그 결과 요동군은 대릉하 이동, 요하 이서지역, 요동반도 해성 이북지역, 그리고 거취, 서안평, 무차현, 북으로는 철령 이남 지역을 관할하였고, 낙랑군은 해성 이남 소자하 이서지역을 차지했으며, 현도군은 상은태현, 서개마현, 고구려현만 남게 됐다.

▲ 요동군 동천 이후 한사군의 위치도, 기원전 75년

한나라 지배층은 이런 지배체제의 변경과 함께 고구려를 무마하기 위한 회유책도 썼다. 한 소제(기원전 86년~74년) 때에 고구려에 의책(옷가지와 머리쓰개), 고취(북 나팔 등 고취악기)와 기인(악공) 등을 보내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받지 않자 현도군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하나 쌓고 거기에 물품 등을 갖다 놓았다(〈후한서〉, 〈삼국지〉, 〈북사〉고구려전). 그러나 고구려는 자기의 서변 땅 일부와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신나라 전쟁(기원 12~14년)

기원 9년 한나라는 신나라(기원 8년~25년)로 나라 이름이 바뀌었다. 그것은 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정권을 찬탈해 스스로 황제가 되면서 나라 이름을 신나라로 바꾼 것이다. 왕망은 나라 이름을 신나라로 바꾼데 그치지 않고 하, 은, 주 초기의 옛 제도를 회복한다는 미명 아래 황제의 칭호를 왕으로 바꾸면서, 그 아래에는 여러 ‘후’들을 두기로 하고, 전한 때 주변 나라들에게 주었던 ‘왕새’를 모두 ‘후장’으로 교체하도록 했다. 왕망의 행태에 분격한 흉노가 신나라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왕망은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전쟁에 나섰고, 현도군 안에 살고 있던 고구려 사람들을 징발해 흉노와의 전쟁에 내몰았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전쟁에 동원되기를 거부하면서 새(변방에 설치해 놓은 요새)를 넘어 동족의 나라 고구려로 간 뒤, 대오를 지어 현도군 안의 각지를 공격했다. 신나라의 유주 산하 관리들은 이런 사태에 무력을 동원에 진압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요서 대윤(태수)이 맞아죽기까지 했다. 그러자 유주 관리들은 왕망에게 고구려왕이 폭동군을 지원했다고 허위로 보고했다. 이에 왕망은 분노에 차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신나라 전쟁이 발발했다.

고구려-신나라 전쟁은 기원 12년에 시작되어 기원 14년까지 계속됐다. 신나라 군사들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자 신나라 장수 엄우는 패배를 감추기 위해 간계를 꾸며 고구려 장수 연비를 유인 살해해 고구려왕을 죽인 것처럼 허위보고를 했다. 이 보고를 받은 왕망은 껄껄 웃으면서 이제부터는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로 부르라고 신하들에게 지시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 인민들은 분격해 신나라 군대에 대한 전면적인 일제 공격을 단행했다. 이 공격에서 현도군치가 있던 소갑방 고성을 점령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고구려군의 격렬한 공격으로 서개마현은 북쪽으로 쫓겨 갔으며, 그 서쪽에 있던 요동군 거취현도 폐지되고 말았다. 또한 요동군 동남부 지역에도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요동군 동부도위가 자리 잡고 있었던 무차현을 점령한데 이어 그 서남쪽에 있던 서안평현도 점령했다.

▲ 제3현도군치(무순시 노동공원)

이처럼 고구려는 신나라 군대에게 참패를 안겨주고 빛나는 승리를 연이어 쟁취했다. 그 결과 서북쪽으로는 그리 많이 나가지 못했지만 중서부로는 오늘의 본계시 부근 마천령 계선까지 진출했으며 서남쪽으로는 소자하 계선까지 나갔다. 이처럼 고구려는 고구려, 고조선의 옛 땅 가운데서 많은 부분을 되찾고, 서쪽 서남쪽으로 수십~수백 리나 전진하는 성과를 거뒀다.

황룡국과 안평국의 통합

한 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고조선 전 지역을 차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한 무제의 고조선 침공과 고조선 땅을 장악하려는 시도에 대해 고조선 유민들은 완강하게 반대해 투쟁에 나섰다. 고조선 유민들의 완강한 투쟁으로 한나라 군대는 압록강 하류 북쪽 지역까지 진출하는데 그쳤다. 한나라 군대가 장악하지 못한 고조선 땅에서는 각 지역별 중심세력들이 독자적인 소국들을 세웠다. 대표적인 나라들이 낙랑국, 황룡국, 안평국, 예맥 소국들이다. 그밖에 동옥저처럼 소국을 형성하지 못한 지역도 있었다.

황룡국은 고조선 유민이 세운 나라의 하나로서,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유리명왕 27~28년조에 나온다. 고구려의 유리왕은 기원 3년 수도를 졸본(환인)에서 국내성(집안)으로 옮긴다. 하지만 졸본은 연나부의 중심지역으로 여전히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리왕은 기원 8년 정월에 태자 해명에게 옛 수도 졸본을 지키도록 했다. 황룡국왕은 해명이 힘이 세고 용맹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강궁을 선물로 보냈는데, 해명은 사신이 보는 앞에서 활을 휘어잡아 꺾어버리면서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라 활이 굳세지 못할 뿐이다”라고 야유했다. 황룡국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 사실을 안 유리왕은 황룡국왕에게 해명을 죽여 달라고 요청했지만 황룡국왕은 해명의 인물됨을 보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 유리왕은 결국 해명에게 자결하도록 명을 내리고 해명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상이 삼국사기에 나온 황룡국 관련 기사 요약이다. 이 기사로 볼 때 황룡국은 졸본지역 근처에 있었던 소국임이 분명하며, 그로 볼 때 중국 관전현과 창성 삭주 대관군 등지를 영역으로 한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안평국은 애하 하구를 중심으로 북쪽에서는 봉성현 동부, 남쪽에서는 평북, 의주, 신의주, 용천, 피현 등지를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 그것은 오나라 사신이 235년에 고구려에 왔을 때 안평구(압록강 하구)에 도착했다는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다. 안평국의 존재에 대해 역사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나, 그것을 입증하는 유적 유물로서 확인된다. 압록강의 지류인 애하 어구에 있는 애하 첨성터에서 ‘안평미락’이라는 새김글이 있는 기와 막새, ‘안평성’이란 새김글이 있는 토기가 출토됐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안평국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안평국의 존재를 간접 증거하고 있는 것은 한나라의 요동군 서안평현이다. 서안평현은 안평의 서쪽에 있는 현이라는 의미로서 안평국의 존재를 기초로 하고 있다.

고구려는 기원 12년~14년 신나라와의 전쟁 당시 요동군 동부도위가 있었던 무차현을 점령하고, 연이어 그 서남쪽에 있는 서안평을 점령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고구려가 요동반도 동남부로 진격할 때 진격로상에 있었던 황룡국과 안평국 역시 통합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삼국사기〉 등에 이에 관한 전쟁 기사들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아마 황룡국, 안평국의 통합은 전쟁의 방식이 아닌 스스로 투항하는 형태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처럼 부여를 비롯한 주변 소국 통합을 통해 큰 나라로 발전해 나가던 고구려는 한 무제의 동방침략으로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주몽의 겨레통합이라는 건국이념을 견결히 고수해 한나라 침략세력들과 비타협적 투쟁을 벌어 나라의 자주권을 튼튼히 수호했다. 단순히 자기나라의 자주권만을 수호한 게 아니라 침략세력들이 빼앗아간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고조선 유민들이 세웠던 소국들도 통합해 나갔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이전에는 주몽의 겨레통합 이념은 주로 구려의 옛 땅에 분립해 있던 소국들과 부여를 통합하는 것이었다면, 기원전 108년~기원 370년까지 480여 년간은 주로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고 통합하는 데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370년대에 이르러 고구려는 중국 침략세력들과 비타협적 투쟁을 벌여 고조선의 옛 땅을 모두 되찾았을 뿐 아니라 고조선 유민들이 세웠던 소국들 역시 모두 통합하는 민족사적 대업을 완수하고, 동방의 대국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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