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콩고, 수단, 르완다, 앙골라

서구 제국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아프리카 국가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종족·종교·지역 분쟁의 대부분은 과거 제국들이 자의로 구획한 영토 문제에서 비롯한다. 여기에 식민 지배를 거부하는 세력과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세력의 대립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런 현상은 비단 아프리카 국가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 가디피식 리비아 사회주의 "자마히리아"를 기념하는 우표

리비아 : 모든 테러는 리비아를 통한다
▲리비아식 사회주의 : 16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은 리비아는 20세기 들어서는 오스만투르크를 몰아낸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다. 2차 대전 후에는 석유자원을 노린 미·영·프 등 서구 제국의 침탈에 시달렸다. 

1969년 9월, 가다피 대령은 무혈혁명을 일으켜 서방 제국의 허수아비인 국왕을 축출하고 왕정을 폐지했다. 이슬람 교리와 사회주의 이념이 혼합된 리비아식 사회주의를 채택했다. 외국기업이 독식해온 석유산업의 국유화에 착수했다. 외국 자본이 점유하던 은행 주식도 국유화했다. 대외적으로는 이란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지원하는 등 이슬람권의 주권 회복과 결속을 꾀었다.

▲미 제국이 날조한 테러 혐의 : 미국은 지난 30년 동안 리비아를 테러지원국가로 규정하여 경제봉쇄를 실시하고, 도시를 공습해왔다. 주요 사건을 몇 가지 추리면 다음과 같다.
-1986년 3월, 리비아 연안에 머물러 있던 미 해군 6함대에서 폭격기를 출격시켜 리비아 해안 순시선을 침몰시켰다. 이 일로 승무원 50여 명이 사망했다.
-1986년 4월,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와 뱅가지시를 폭격하여 민간인 100여 명을 살상했다.
-1992년 3월, 유엔 안보리는 리비아에 대한 항공기 운항금지와 무기금수 조치를 결의함으로써 리비아 봉쇄를 한층 더 강화했다.

노골적인 날조도 있었는데, 1986년 4월 서베를린 ‘라벨’ 디스코텍 폭파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미군 사병 2명이 사망하고, 약 20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팔레스타인 과격단체의 소행으로 결론지었다. 미국만이 이를 리비아 소행으로 몰아, 사건 발생 12일 만에 리비아 공습을 개시했다. 훗날 밝혀졌지만 실제 범인은 CIA의 지원을 받은 팔레스타인인이었다. 

1988년 12월에 발생한 민항기 팬암 103편 폭파사건도 대표적이다. 그해 7월 초 미 순양함 빈센스호가 이란 민항기를 격추시킨 데 대한 이란의 보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가다피 정부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미국은 군사보복을 운운하며 리비아인 용의자 신병을 요구했다. 물론 일반 재판이었다면 불기소 처분으로 끝날 만큼 빈약한 증거가 전부였다. 하지만 범아랍주의의 맹주이자 산유국인 리비아를 꺾는다는 정치적 고려가 사법적 판단보다 우선했다. 이란이 지원한 테러든, 팔레스타인 과격단체가 한 테러든, 미국이 사주한 테러든 여하튼 모든 테러의 원흉은 리비아였다. 

▲ DR콩고 민족주의 독립운동 영웅,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작성자 koica_drc

콩고 : “우리는 더 이상 백인의 원숭이가 아니다”
▲제국의 탐욕에서 비롯한 내전과 빈곤 : 제2차 세계대전 종전부터 일기 시작한 아프리카인들의 자주독립 움직임에 따라,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투쟁을 벌였다. 루뭄바는 “우리는 더 이상의 백인의 원숭이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해방투쟁을 벌였다. 1960년 6월 30일 콩고의 독립선포와 함께 루뭄바가 초대 수상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지하자원의 보고인 카탕가 지역 등은 여전히 과거 서구와 결탁한 군벌의 수중에 남아있었다. 

루뭄바는 서구의 자원 약탈에 맞서 소련에 경제·군사원조를 요청했다. 그러자 미국, 영국, 벨기에는 지방 토착 군벌들의 쿠데타를 사주했다. 자원의 보고인 카탕가주와 카사이주 분리 독립을 부추긴 것이다. 루뭄바는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콩고에 진입한 평화유지군은 오히려 카탕가 반군을 지원했다. 

▲미국 대통령의 루뭄바 암살 지령 : 루뭄바는 수상 자리에 오른 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실각했다. 이후 카탕가 어느 장소로 옮겨진 루뭄바는 1961년 1월 중순 불과 36세의 젊은 나이로 보좌관 두 명과 함께 빙초산에 담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국제사회에선 연금 중이던 그를 암살하도록 지시한 배후가 누구인지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던 중 1975년 미 상원 정보위원회를 통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0년 8월 안보 관계 회의에서 CIA 국장 덜레스에게 루뭄바를 제거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밝혀졌다. 영국 비밀 외교문서를 통해 영국 M16이 개입했다는 사실도 공개되었다. 실제 루뭄바 암살과 시신 유기는 벨기에 특수부대원들이 실행했다. 

왜 미국, 영국 그리고 벨기에는 실각한 지도자를 살해까지 했는가? 콩고 독립투쟁 때부터 범아프리카주의를 제창한 루뭄바를 살려두면 아프리카 전역에 민족주의가 확산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양질의 우라늄이 매장되어있는 콩고에 대한 지배권은 핵무기 개발에서도 중요했다. 실제 콩고는 전 세계 우라늄 수요의 절반 이상을 담당했다.

▲콩고 유혈분쟁의 확대 : 루뭄바가 살해된 뒤 콩고는 사분오열했다. 수도권은 카사부부가, 카탕카주는 모이세 촘베가, 동부는 기젱가가 장악했다. 1965년 11월 CIA등 서방진영의 전폭적 지원으로 군사반란에 성공한 모부투가 권좌를 잡았다. 그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세력과의 전쟁에서 최선봉을 맡았다. 모부투 정부가 반군과 내전뿐만 아니라 앙골라·우간다 반군을 지원함으로써 콩고 내분은 아프리카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루뭄바의 암살은 콩고의 유혈내분과 제1차 콩고전쟁을 불러왔다. 이후 일어난 제2차 콩고전쟁(1998~2003)은 아프리카 세계대전으로 불릴 정도였다. 최소 400만에서 최대 1000만 명이 사망했다. 제국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였다.

▲ 르완다 제노사이드 피해자들 인골

르완다 : 투치족과 후투족의 인종청소 
▲르완다 인종 학살의 전말 : 유럽 제국이 침입하기 전까지 목축업을 위주로 하던 투치족과 농사짓던 후투족은 한 왕조 아래서 같은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며 살아왔다. 두 종족의 갈등은 1885년 독일이 르완다를 자국 식민지로 선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독일과 이후 식민통치권을 양수한 벨기에는 소수의 투치족을 전면에 세워 다수의 후투족을 다스리게 했다. 또 투치족과 후투족에게 각기 다른 종족 신분증을 발급하고, 교육도 투치족 위주로 실시했다. 

1961년 수적으로 우세한 후투족이 선거로 집권하자 르완다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해오던 투치왕조는 르완다와 분리하여 부룬디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 두 나라의 충돌로 1961년에는 수천 명, 1963년에는 거의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2년에는 부룬디 정부군이 후투족 주민 20만 명을 학살했다. 르완다 정부군은 투치족 100만 명을 학살했다. 수많은 후투와 투치족 민간인들은 인종청소를 피해 인접한 우간다 등지로 집단이주함으로써 제2차 콩고전쟁을 비롯한 유혈 내분의 불씨가 되었다. 

▲르완다 인종 학살을 조장한 미 제국 : 미국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패권을 독점하고자 역내 소요와 내전을 조장해왔다. 미국은 투치족 군 지휘관들을 미군기지로 초청하여 훈련시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90년대 초 레벤워스 군사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한 뒤, 르완다 애국전선이라는 반군을 조직하여 후투족을 제압하고 2003년 르완다 대통령이 된 폴 카가메다. 그는 미국에게 지원받은 미사일로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 저격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미국은 인종청소를 예방하기 위한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건을 유엔 안보리를 통해 거부하는 등 르완다의 대학살을 방기·조장했다.

▲ 미국이 화학무기 생산 공장이라며 폭격한 수단의 알 쉬파 제약공장[사진 : 노동자연대 홈페이지 캡처]

수단 : 제국에 의한 남북분할
▲제국에 의한 남북분할 : 수단은 오랜 내전으로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 국가라는 오명을 얻고 있다. 국제사회는 이 원인을 마치 미개한 종족 충돌이나 전근대적인 종교분쟁, 그리고 질병 등에서 비롯한 양 선전해왔다. 하지만 끊이지 않는 수단의 내분은 기독교가 주류인 남부 수단과 이슬람이 주류를 이루는 북부 수단을 분할하여 차별적 관리를 해온 대영제국의 식민지 통치정책에서 기인한다. 이 때문에 시작된 남북갈등은 내전(제1차 수단내전)으로까지 이어졌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남부의 기독교 반군을 지원했다. 제2차 내전(1985~2005) 역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분리 독립하려는 남부 반군과 중앙정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200만 명이 사망하고 500만여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미국의 알 쉬파 제약공장 공습 : 1998년 8월 미국은 수단의 수도 카르튬에 있는 알쉬파 제약 공장에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이 공장이 화학무기를 생산하는 곳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폭격 후 유엔에 의한 정밀조사 결과 화학물질을 생산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치료제를 생산하는 순수한 제약공장이었던 것이다. 사실 미국이 치료제나 생필품 생산시설에 폭격을 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걸프전 때는 유아용 분유공장을 파괴하여 수많은 이라크 유아를 분유 부족으로 사망케 했다. 상수원 댐을 폭파하여 식수 공급도 차단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폭격 이유는 치료제 부족 사태를 유도함으로써 반미 자주노선을 주장하는 수단정부에 대한 수단 국민의 불만을 가중시키려는 비열한 간계에서 비롯한 것이다.

▲미 제국의 수단 분열공작 : 남·북 수단 사이의 긴 내전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이번에는 수단의 수도 카르튬 서쪽에 위치한 다르푸르에서 또 내전이 발상했다. 최소 20만에서 4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태로 유엔은 수단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3만 명의 평화유지군을 현지에 파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 영국도 독자적인 개입을 시사했다. 즉 현지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중무장 병력을 파견하여 수단을 남북뿐만 아니라 북서로도 분열시키겠다는 것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사진 : 노동자연대 홈페이지 캡처]

소말리아 : 내전을 부추기는 유엔평화유지군
소말리아는 2차 대전 이전까지 서방진영의 식민지 분할정책에 따라 프랑스령과 이탈리아령, 그리고 영국령으로 나뉘어 지배당한 과거 역사 때문에 독립 이후에도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1969년에는 미국의 지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바레의 23년 군사독재로 소말리아는 더욱 황폐화되었다.

▲미 제국의 독재정권 지원과 내전 조장 : 1991년 쿠데타에 의해 바레 정권이 붕괴되면서 반미·친이슬람 계열의 아이디드 정권이 들어섰다. 이로써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서방계 반군과 이슬람권 정부 사이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특히 1993년 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소말리아에 파병된 약 3만 명의 유엔평화유지군은 소말리아 내전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들 평화유지군은 비무장 시위 군중을 학살하거나, 민간인 주거지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유엔군의 파병은 아이디드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미국의 공개적인 군사행동에 불과했다. 

9·11 이후 미국은 소말리아가 알카에다와 연루되어 있다며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는다. 미국은 직접 침공하는 대신에 친미 기독교 국가인 인근 에티오피아군이 소말리아를 침공하도록 했다. 수도 모가디슈를 포함해 소말리아 북부에 친미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이슬람 저항세력은 남부를 기반으로 지하드에 나섰다. 이런 사태에 대해 미국의 어느 칼럼니스트는 “전쟁에서 작은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은 당연하다”며 수십만 소말리아 민간인 몰살을 정당화했다. 

앙골라 : 해방대중운동(MPLA) VS 해방연합(UNITA) 
앙골라 독립투쟁은 종주국 포르투갈이 앙골라의 독립을 승인한 1975년까지 계속되었다. 독립 후에는 내전이 이어졌다. 좌익성향의 앙골라 해방대중운동(MPLA) 신생정부를 상대로 앙골라 해방연합(UNITA)이 게릴라전을 펼쳤다. 1986년 레이건 대통령은 앙골라 해방연합의 군벌 사령관인 사빔비를 백악관으로 불러 경제·군사지원을 약속했다. 1991년 유엔 중재로 앙골라 정부와 UNITA가 화해했다. 하지만 국제기구 감시 속에 실시된 총선에서 MPLA가 승리하자 UNITA는 평화협약을 깨고 다시 게릴라전에 돌입했다. 2002년까지 계속된 내전은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가며 
지금까지 우린 진짜 ‘야만’의 기원을 살펴봤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내전을 부추겼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탄생했다. 또 이란 혁명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부추겼다. 이란에게 피해만 준다면야 생화학무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라크가 생각보다 커지자 이번엔 이라크를 침공했다. 아프리카에선 내전을 조장했다. 독립 열풍을 막을 수 없다면야 아예 식물상태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형식적으로 독립은 할지언정 감히 제국에게 주권국 행세는 하지 못하게 했다. 아프리카에서 보인 유엔평화유지군의 의아한 행보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앞서 중남미와 마찬가지로 중동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자주노선은 미국의 주적이었다. 미국은 철없는 젊은 군인들이 범아랍주의를 떠들거나, 흑인 운동가가 백인에 맞서 범아프리카주의 따위를 주장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중동과 아프리카는 서구가 그들에게 씌운 ‘야만인’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려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민족주의 물결이 일었다. 하지만 제국이 그간 뿌려놓은 씨앗은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있었다. 씨앗은 각지에서 종교분쟁으로, 인종청소로, 영토갈등으로 피어났다. 

누군가 20세기는 전쟁의 세기라고 했다. 난 이 말을 조금 수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쟁 그리고 아프리카에 수많은 내전들까지 모든 전쟁은 제국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즉 20세기는 단순한 전쟁의 세기가 아니라, ‘미국의·미국에 의한·미국을 위한’ 전쟁의 세기였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자주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해 미 제국이 전쟁을 벌인 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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