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의 일상(1)

시내 한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김영심 후원회원이 병원에서 생길 일과 간호사의 고충 등을 민플러스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간호사의 일상’을 비정기적으로 연재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편집자] 

 

불빛 환한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 시선은 눈부신 모니터에, 두 귀는 청각을 사로잡는 음악에 내맡긴다. 떨어진 혈당에 당분을 보충하듯 지친 몸으로 음악을 흡입한다. 축 늘어진 두 팔은 힘이 다 빠져나간 듯하다. 뻣뻣해진 목부터 척추를 지나 허리까지 맨손 체조를 하자 자연히 얼굴이 찡그려진다. 나흘 야근의 마지막 날 저녁. 드디어 내일은 오프(비번)다.

오늘은 중환자실 2번, 3번, 그리고 7번 자리 환자를 돌봤다. 2번 환자는 오늘 기관절개술을 했는데 별문제가 없으면 내일 일반병동으로 옮긴다. 환자가 중환자실에 들어올 때부터 보호자가 예민하다는 직전 근무자의 전언을 떠올리며 면회시간에 들어온 보호자와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환자상태를 브리핑하고 보호자가 궁금해 하는 검사결과 등을 화면을 열어 설명한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개의 의학용어를 익히고 온 보호자는 “보호자가 뭘 아나요…. 무식해서 잘 몰라요”라면서도 이것저것 묻고 또 묻는다. 면회시간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설명한 덕인지 보호자는 결국 환하게 웃으며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로 면회를 마쳤다.

하지만 오전에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 “2분이면 진단서 쓰는 거 아닌가요? 2분 후에 다시 전화할 테니 그때까지 해놓으세요.” 이렇게 진단서 발급을 요구한 보호자는 무려 열 차례 넘게 전화를 걸어왔다. 담당 주치의가 회진을 돈 다음 응급실 환자를 보느라 진단서 작성이 지체되자 담당 간호사는 보호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를 반복해야 했다. 시간이 없어 도저히 지금은 못 쓴다는 주치의에게도 “선생님, 죄송한데요, 보호자가 진단서 때문에 계속 전화하고 계세요”라고 애걸복걸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환자의 건강과 안위라는 목표가 같아 보호자와 의료진은 협력하는 관계 같아 보인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기까지는, 아니 우리나라 의료체계 안에서는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의료진은 ‘갑’이고 환자와 보호자는 ‘을’이다. 우리의 의료조건상 환자나 보호자가 좋은 의료진을 찾아다니기는 해도 거꾸로 의료진이 환자를 찾아가진 않아서다.

값비싼 병원비를 지불하고도 환자의 건강이 회복되면 본전이요, 그렇지 않으면 돈도 잃고 가족도 잃는다. 인터넷을 통해 많은 의료정보를 접할 수 있는 요즘 ‘을’들은 가족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고 돈도 잃지 않기 위해 긴장한다. 더욱이 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불안과 분노가 겹친 복잡한 감정상태이기 마련. 바로 이런 상태에서 면회시간에 담당간호사와 마주한다. 보호자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불안하고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특히 궁금한 것을 설명해주면서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일선에 있는 사람이 간호사다.

사실 간호사는 환자와 관련된 모든 일에서 민원창구이고 ‘만능키’ 역할을 하게 한다. 약이나 검사 처방이 잘못 되어도 모두 간호사실로 연락하고 간호사가 의사에게 다시 연락해 처방받는다. 담당의가 바쁘거나 해서 담당 인턴에게 처방을 지시하면 간호사는 다시 인턴을 찾아 이런저런 처방 넣어달라고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병원 주차장이 불편해도, 병원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와도, 주치의 면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도 보호자와 환자가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십상인 대상은 환자 옆에 붙어 있는 간호사다. 

면회시간이 끝나자 한 동료 간호사가 푸념하듯 말한다. 의사와 병원은 ‘갑’이고 환자와 보호자는 ‘을’, 그리고 병원의 모든 다른 부서들이 ‘병’이고, 뭐든 문제가 생길 때 다른 부서를 동분서주하며 “죄송합니다”라고 먼저 머릴 숙이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간호사는 ‘정’이라고…. 그렇다. 우리 간호사는 현실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갑’도, ‘을’도, ‘병’도, 아닌 ‘정’이다. 그리고 그건 정말이지 때때로 서글프다. 

하지만 갑이나 을이나 병이 ‘정’인 간호사만큼 알까? “간호사님 덕분에 잘 버텼어요. 고마워요”라고 환자 얼굴에 웃음이 번질 때 모든 것을 다 잊게 되는 기쁨을…. 그래, 이 맛에 나는 지금도 간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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