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6

▲파리코뮌 당시의 바리케이드. [사진 출처 : https://www.jacobinmag.com/]

앞에서 서구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여야가 나뉘어 싸우지만 일종의 레슬링 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어서 마르크스 초기 정치원리, 즉 블랑키주의의 흔적을 살펴보았어요. 이때 마르크스는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1871년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겪고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원리를 찾아냈지요. 아직은 모색단계입니다.

1) 바쿠닌

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원리에 이르는 데 두 가지 계기와 한 가지 사건이 있었어요. 하나의 계기는 무정부주의의 등장입니다. 원래 생시몽 등이 제시한 사회주의 사상을 프루동이 이론적으로 확립합니다. 그는 새로운 사회는 자치적인 코뮌이 연합해서 형성되는 코뮌연합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즉 공동체 소유는 자연의 진화처럼 자본주의 내에서 저절로 발생해서 마침내 자본주의를 뒤덮고 끝내 새로운 사회를 발생한다고 보았죠.

하지만 세상이 기대대로 되지 않자 이런 공동체 소유의 자연 진화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혁명사상으로 발전합니다. 이런 방해요소의 최종 결정판은 폭력적 국가입니다. 바쿠닌은 혁명적 폭력으로 이 불의의 폭력 국가를 제거하자고 했지요. 모든 국가는 폭력적이니 앞으로 사회에는 어떤 국가도 필요 없다고 봅니다. 이게 무정부주의이죠.

▲바쿠닌

이런 무정부주의를 전개한 바쿠닌은 원래 러시아 귀족 출신입니다. 그는 헤르첸(Herzen)을 통해 생시몽 등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죠. 그는 유럽으로 망명해서 특히 라틴 지역(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라틴계열의 언어 사용지역)에 활발하게 활동해 무정부주의의 씨앗을 뿌렸죠. 그는 파리코뮌 직전 1870년 리용에서 노동자의 봉기를 주도하여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쿠닌은 1867년부터 스위스에 산재한 무정부주의자 조직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비밀동맹을 조직한 다음 마르크스가 이끌던 인터내셔널에 가입을 요구했지요. 1869년 마르크스는 비밀 동맹이 존재하는지 모른 채 바쿠닌의 조직이 지역 조직 단위로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이제 인터내셔널 내부에 마르크스를 견제할 능력을 지닌 강력한 적수가 나타났죠. 마르크스파와 바쿠닌파 사이의 갈등은 점차 에스컬레이트됩니다.

2) 노동조합의 현실안주

한편 그동안 인터내셔널의 대중적 기반이었던 각 나라의 노동조합도 점차 현실주의적으로 변질됩니다. 영국의 노동조합은 노동당을 결성해 현실정치에 참여합니다. 이때 아일랜드에서 농민을 지반으로 영국으로부터 해방하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마르크스는 당연히 국제주의(internationalsim)에 입각해서 영국 노동자가 아일랜드 농민을 지지하기를 바랐습니다.(중요!!) 하지만 영국 노동당은 이런 국제주의를 거부했지요. 쇼비니즘(배외주의)에 빠진 겁니다.

게다가 독일에서 마르크스에게 협조하던 라살레파도 유사하게 변질되었습니다. 라살레는 독일 노동조합운동의 대부인데 점차 프러시아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게 협조하는 노선으로 전환했습니다. 독일 노동자들은 프러시아 국가의 복지정책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인터내셔널은 자중지란에 빠졌습니다. 바쿠닌파, 노동조합파는 서로 협력해서 당시 총평의회를 주도하던 마르크스를 공격했어요. 이 세 가지 세력 사이의 논쟁은 주로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났습니다. 노동자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3) 관료제의 폐지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의 자중지란 속에서 새로운 정치원리를 고민할 때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871년 파리코뮌이라는 사건이지요.

1870년 9월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배하자,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의 제국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처음에는 독일군에 항전을 계속하고자 했지만 곧 부르주아 보수파는 항복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면서 베르사유로 정부를 이동하죠. 정부의 의도를 간파한 파리 시민들 중 주로 쁘띠부르주아와 노동자 세력이 1871년 3월 봉기를 일으켜 파리 시청을 장악하고 독일군에 항전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게 파리코뮌이죠.

베르사유 국민정부는 독일군의 허락을 받아 독일군에 포로가 된 프랑스군을 이용해 5월27 파리코뮌을 무력으로 진압합니다. 코뮌 군은 파리 서부의 페르 라쉐즈 묘지에서 끝까지 저항했습니다만 진압되고 맙니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이 실패한 후 이 사건을 분석하여 <프랑스에서의 내전>이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파리코뮌 정부의 독특한 특징을 분석합니다. 그 가운데 경제적 측면은 생략하겠습니다. 주로 정치적 측면만 살펴보기로 하죠.

우선 파리코뮌에서 각 구의 인민 대표들은 자기 인민에 ➀“책임지고 항상 소환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면 굳이 4년 만에 한번 전국적으로 선거를 하지 않고, 각 지역에 그때그때 필요하면 선거를 하는 체제가 됩니다. 한마디로 ‘4년 뒤에 보자’가 아니라 즉각 책임을 묻겠다는 거죠.

인민의 대표가 직접 행정을 담당합니다. 즉 자치이죠. 그래서 국가는 ➁“활동하는 행정부인 동시에 입법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법귀족의 손에 장악되었던 사법부는 다시 인민의 손에 장악되었습니다. 즉 사법부를 폐지하고 코뮌 내 ➂사법위원회로 대체했습니다.

과거 ➃관료제 국가의 중추를 이루던 기관들이 파기되거나 개혁되었습니다. 상비군은 전 인민의 무장부대(방위군)로, 경찰은 인민이 선출한 코뮌집행인으로, 교회는 강제적인 교회세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금에 의해 유지되며 학교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➄관료의 월급은 절대 노동자의 봉급 수준을 넘지 못하고 관료들이 착복하던 기득권과 판공비는 폐지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파리코뮌은 민주제를 넘어서 자치제를 지향하고 있었어요. 즉 관료제를 폐지 또는 약화했던 것이죠.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이 “기존 국가를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려 했다고 평가합니다.

4) 마르크스와 노동조합주의 및 무정부주의의 차이

마르크스는 심지어 파리코뮌이 은행을 국유화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한탄합니다. 이른바 자본주의적 소유권 개념에 사로잡혀서 은행을 자본가의 수중에 남겨두었다는 겁니다.

당시 은행은 개인적인 소유였지만 실제 그 역할은 국가기관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재정을 충당하곤 했지요. 파리코뮌 당시 부르주아 정부는 이 은행의 돈을 이용해 국채를 발행해서 정부군을 무장시켜 파리코뮌을 공격했던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노동조합주의자는 기존의 민주적 관료국가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것을 선거를 통해 장악하자는 주장입니다. 무정부주의자는 코뮌의 연합으로 기존의 국가를 대체하자는 주장입니다. 코뮌은 자치적으로 관리되며 전 사회도 이런 코뮌이 자치적으로 관리하면 된다는 주장이죠.

그러나 마르크스의 입장은 이 두 가지와 달랐습니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국가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정부주의와 달랐지요. 그렇지만 이 국가는 과거 관료제 국가는 아닙니다. 국가는 새롭게 개조됩니다. 자치의 요소가 확대되고 기존의 관료제는 폐지되거나 대체되었죠. 그런 점에서 노동조합주의자와 달랐습니다.

마르크스는 코뮌 속에서 새로운 사회주의의 국가의 맹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인민은 이제 관료제에 대해 지긋지긋하게 싫어한다는 판단입니다. 국가는 유지하되 관료제는 폐지 또는 축소해야한다는 생각이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라 봅니다.

마르크스의 이런 생각은 아직은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의 맹아에 불과합니다. 나중에 레닌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소비에트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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