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5

▲1871년 3월18일에서 5월28일에 파리 시민, 노동자들의 봉기로 세워졌던 혁명적 노동자 정권 ‘파리코뮌’ [사진 : 네이버 지식백과 <프랑스사>]

문 :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상적입니다. 사회주의 경제 즉 국유화는 그 장점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도 부분적으로 채택해 혼합경제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본다면 공산당, 소수 과두적인 당 관료, 심지어 개인이 독재를 펼쳐나간 것이 아닐까요? 그 때문에 90년대 몰락한 것이 아닌가요?

답 :

1) 민주주의의 가능성

사회주의 경제의 원리에 관하여 마르크스는 이미 일찍부터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사적 소유의 전면적인 폐기, 사회적 소유제였죠. 하지만 사회주의 정치의 원리에 관한한 마르크스는 끝까지 암중모색에 그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회주의 정치원리는 결코 단숨에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원리는 수많은 실천에서 피의 대가를 통해 얻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조급했고 때로는 미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정치원리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 얻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원리는 수많은 혁명가들의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 완성되었다고는 추호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전 세계 노동자와 민중의 해방이라는 염원이 사라지지 않는 한 새롭게 모색될 것이고 또 모색할 것입니다.

이제 사회주의 정치적 원리, 즉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우선 마르크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때 민주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 혁명에서 등장한 민주주의가 유일했고 다른 민주주의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때는 이게 서구식, 부르주아식이라는 생각조차 없었지요.

마르크스의 초기 정치원리는 1847년 말 <공산당 선언>을 작성할 때(발표는 48년) 그 초안으로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주의 원리>라는 문서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엥겔스가 작성했습니다만 이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상적으로 한 몸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문답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14번째 물음에서 새로운 사회질서는 사회적 소유제라는 것을 밝히고 있죠. 그리고 18번째 물음에서 이 사회는 “민주주의적 국가제도를 건설하는” 과정을 통해 수립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엥겔스는 이 문서에서 민주주의 형식에 관해 뚜렷한 규정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등장한 민주주의 형식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영국식과 프랑스식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영국식은 로크가 주장한 대로 삼권분립 체제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 체제입니다.

프랑스식은 루소가 주장한 대로 일원화되었습니다. 루소를 사숙한 로베스피에르가 실시했던 제도입니다. 즉 의회가 행정, 입법, 사법을 통괄하는 체제입니다. 흔히 입법부 일원제라 하기도 하죠. 요즈음은 자본제 아래서는 사라졌습니다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민대의체는 이런 모습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가운데 입법부 일원제를 지지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블랑키즘의 영향으로 봅니다.

2) 블랑키 

▲블랑키 [사진 : 네이버 <철학사전>]

당시 블랑키즘이 널리 퍼졌습니다. 블랑키즘은 로베스피에르의 입장을 지지하는 정파입니다.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1805-1881)은 1848년 2월 혁명 당시 노동의 권리를 주장한 루이 블랑과 자주 혼동됩니다만 명백히 다른 사람입니다.

블랑키는 이탈리아 접경지대(원래는 사르드니아 왕국의 땅이었는데 사르드니아가 프랑스에 양도한 땅, 지금 니스 지역)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이탈리아 비밀결사인 카보나리(‘숯검댕이 사람’이라는 뜻) 당원이었습니다.

그는 1830년 7월 혁명에도 참가하고 ‘인민의 친구’에 속하여 이 협회가 일으킨 1832년의 봉기에도 참가했지요. 이 봉기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혁명입니다. 장발장이 코제트의 애인 마리우스를 구하러 들어갔던 카페에 모인 친구들이 ‘인민의 친구’ 회원이었지요.

블랑키는 1839년에는 ‘의로운 자의 연맹’의 파리 봉기에도 가담했지요. 마르크스도 이 ‘의로운 자의 연맹’에 가입했고, 이 연맹이 1847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공산주의자 동맹’의 토대가 됩니다.

마르크스는 아마 여기서 블랑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블랑키는 1848년 2월 혁명 후 사회공화파(쁘띠부르주아 당파를 부르주아 공화파와 구별하여 그렇게 불렀습니다)의 1849년 5월15일 봉기에 가담해 체포된 후 재판을 받았지요.

그는 1865년 감옥에서 탈출했고 1870년 9월 보불전쟁 이후 제3공화국 수립에도 기여했으나 71년 3월 민중의 봉기를 두려워한 보수파 대통령 티에르가 그를 예비검속으로 체포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 자신은 1871년 파리코뮌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그의 당파는 이 파리코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때 파리코뮌에서 블랑키가 혁명적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을 적극 지지했지요.

그러고 보니 그의 한 생애는 봉기와 봉기로, 혁명에서 혁명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일보라면 아마 ‘봉기꾼’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는데 그의 사상은 루소, 로베스피에르, 자코뱅, 산악파를 이어가는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즉 국가의 일시적인 혁명적인 독재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지만 그러나 사회주의는 아니고 자유로운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나라 급진 민주주의자를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3) 보통선거제 

마르크스는 초기에 블랑키의 민주주의 국가와 혁명적 독재를 신봉했습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국가의 전제는 보통선거제이지요.

당시 유럽에는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아직 보통선거는 없었습니다. 영국에서 1830년대 노동자의 참정권 운동이 벌어져서 노동자도 참정권을 얻었습니다. 1848년 2월 혁명에서 프랑스 민중은 보통선거제(여성은 제외된 채)를 요구했고 일시 실시되었으나 1850년 5월3일 선거권은 다시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때부터 참정권이 확대되어 보통선거제가 실시된다면 프롤레타리아가 다수 대중이니 당연히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하면 사적 소유를 전면적으로, 또는 점차적으로 폐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보통선거제로 향하는 영국과 미국에서는 평화적 과정으로 사회주의가 실현된다고 믿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런 태도는 1864년 이후 1870년까지 인터내셔널을 주도할 때조차도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민주주의, 즉 보통선거제가 실시될 수 있을지 의심했습니다만 “그래도 어찌하면…”하며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특히 1869년 창립된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독일 사회민주당은 라살레라는 독일의 노동조합주의자가 세운 노동조합협회 가운데 일부 세력(칼 리프크네히트, 아우구스트 베벨 등)이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면서 새롭게 조직한 정당입니다. 독일에서 보통 선거제를 주장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그러나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점차 새로운 논쟁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한편으로는 바쿠닌의 무정부주의가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는 마르크스가 믿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우선회’하기 시작했지요. 그런 중에 마침내 1871년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고, 이런 여러 사건 때문에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정치적 원리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파리코뮌 후 마르크스의 주장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지요.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