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사상 백문백답4

문 :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상적입니다. 사회주의 경제 즉 국유화는 그 장점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도 부분적으로 채택해 혼합경제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본다면 공산당, 소수 과두적인 당 관료, 심지어 개인이 독재를 펼쳐나간 것이 아닐까요? 그 때문에 90년대 몰락한 것이 아닌가요?

답 : 좋은 물음입니다. 나는 이미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대답하다>라는 책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를 분석했습니다. 그때 위의 물음에 어느 정도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곳에서 설명한 나의 견해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이제 다시 한 번 정리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서구 민주주의

우선 서구 민주주의 비판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서구’라는 말이 강조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서구 민주주의는 곧 자본주의 독재였습니다. 놀랐지요? 우리는 해방 이후 70년에 걸쳐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향해왔던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입니다.

이런 서구식 민주주의가 겨우 독재였다니, 어쩌면 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였나요? 그분들을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을 죄책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기서 우선 한 가지를 전제해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라면 ‘합의’입니다. 이런 합의가 그 자체로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주권이 존재하는 한 모든 일은 합의로 처리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서구식 민주주의라면 이런 합의의 방법 가운데 독특한 방법입니다. 이런 합의의 방법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방법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는 독재로 흘러갔습니다.

독재라고 하니 박정희식의 개인 독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아할 겁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독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계급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독재도 있지요.

여러분들은 집안일을 소수 어른들이 뚝딱 결정하는 것을 자주 보았을 겁니다. 이때 밑의 사람들은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지요. 실제 그 일을 실행해야 하는 당사자는 밑의 사람들인데 말이죠. 이걸 우리는 어른들의 독재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에도 일부 계급이 나머지 계급 집단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결정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걸 우리는 계급독재라 하죠.

2)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

개인의 독재에서 계급의 독재로 말을 바꾸더라도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대선으로 알고 그것을 향해 줄기차게 투쟁해온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이제 그 근거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한계를 들어보면 쉽게 이 계급독재라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일찍부터 서구 민주주의는 대표성의 위기를 겪어왔습니다.

한 사회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대다수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들을 대변하는 의원들은 몇 명입니까? 물론 간접적으로 노동자, 농민을 대변하겠다고 잠칭하는 당은 있지만 직접 자기를 대표하는 노동자, 농민은 거의 없습니다. 이걸 대표성의 위기라 하죠. 이건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너무나도 명약관화하기에 다시 설명드릴 필요도 없을 겁니다. 서구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로 또 한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서구 민주주의는 관료제와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실행하는 목적에 관해서는 민주적으로 결정하되, 그 실행은 전문가인 관료에게 맡긴다는 것이 서구 민주주의의 근본 형식입니다.

그런 관료를 믿을 수 있을까요? 관료는 행정적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것을 통해 관료는 과연 주인인 국민의 결정을 실행합니까? 관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요구를 따릅니다.

이 사실도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우리나라에서 교육관료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교육부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장관은 민주적인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취임한 이래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요? 사실 정부의 다른 부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료의 저항 때문이겠지요. 그 때문에 요즈음 관료제를 찬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3) 비판의 근거

분명 보통 민주주의 아래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대표성의 위기가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관료의 행정은 그대로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 이유를 철학자, 사회과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누구는 서구 민주주의에서 합의의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왜곡(언론에 의한 여론조작)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존 롤스는 합의 과정에 무지의 베일(자기가 받을 몫을 알지 못하도록 하자는 솔로몬 왕의 심판규칙)을 도입하자고 합니다. 누구는 대의제가 아니라 직접 민주제(참여론자)를 하자면서 인터넷 환경이 이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적 제안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에서 대의제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가 우리보다 발달되었다는 서구를 보면 오히려 더 절망적입니다. 우리는 서구식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위안을 삼지만 제대로 된 서구 민주주의도 여전히 그러니 절망적이라는 뜻입니다.

관료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많은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개선안에도 불구하고 관료제는 여전히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것도 유착을 통해서가 아니라 과학적이고 공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그렇다고 말합니다. 이런 비판에 관해서는 미셀 푸코의 관료적 권력 개념을 참조하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4) 선거라는 쇼

나는 그 때문에 서구 민주주의란 마치 무슨 시합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승패는 결정되고 이기나 지나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이 선거에 일생이 걸린 것처럼 열광합니다. 앞에 내세운 선수들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물어라 쉬쉬 하고 목이 쉬어라 떠들죠. 서로가 물고 뜯는 추악한 싸움일수록 사람들은 열광하죠. 수많은 판돈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죠.

그러고 승패가 결정되면 일주일간 승리한 사람들은 자기 선수를 무등 태워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고 패배한 사람들은 마치 고난당하는 그리스도 신자처럼 하나님을 부르짖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쇼였습니다. 승리의 열광이 사라진 일주일 뒤가 되면 세상이 여전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은 다시 절망하죠. 그리고 다음 선거가 올 때까지 지겨운 삶을 인내합니다.

결국 우리가 이상으로 삼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소수 지배계급의 독재를 위한 수단이라는 의심은 걷히지 않습니다. 이런 비판에 관해 자세한 설명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사회주의 아래서의 정치 체제를 살펴보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미 마르크스가 제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마르크스는 그런 비판 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이론을 전개했지요. 그게 바로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 이론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서구의 사회민주당을 연상할 여지가 있어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사회민주당은 서구적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정당입니다. 그냥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고 불러도 좋지만 나중에 중국과 북조선에서는 인민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부르니, 어폐가 있어요. 그래서 귀찮더라도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라고 길게 부르려고 합니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