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한 전쟁범죄라는 사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의 좌익 척결은 실제 1950년 8월이면 모두 마친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만으로도 30만 명 가까이 살해했다. 그럼에도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처단 대상 55만 명을 만들어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실상을 추적해 본다.[편집자]

▲ 29세(1948년)의 이상규 소령 모습. 흑백사진을 칼라로 복원 했다. [사진제공 이동주 유족]

여순사건 당시 충무공호 등 7정을 이끌었던 임시 해군 진압책임자였던 소령 이상규(李相奎, 군번 80076)도 숙군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해안인민군’ 사건이었다. 앞의 전호극 소령이 연루된 사건은 ‘해상의용군.’ 명칭은 달랐지만 이번에도 주모자는 병조장 이항표였다. 그것도 진해 해군 영창에 갇혀 있는 몸으로 조직사건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 갇혀있던 이 소령은 1950년 7월24일 마산육군헌병대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소령의 생애, 사건의 전개과정에 대한 판결자료와 관련 회고록 등 귀한 자료는 이 소령의 아들 이동주씨가 제공한 것이다.

출생 성장

이상규는 1920년 10월14일 통영읍 항남동(옛 길야동) 131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병언, 모친 최우율이었다. 처남 김영호 증언에 따르면 여수와 부산을 오가는 배와 오사카 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선원으로 취직했다고 한다. 아들 이동주씨가 제공한 자료에서 일제강점기 이상규가 배를 조종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격증 여러 개를 확인할 수 있다.

▲ 이상규 선생이 1942년 딴 을종일등운전사면장. [사진제공 이동주 유족]

해군 입대

이상규 소령은 1946년 2월1일 입대했다. 앞에서 살펴 본 전호극 소령은 2월15일 입대했으니 그 보다 입대일이 빨랐다. 아들 이씨에 따르면, 해양경비대측에서 먼저 선생을 찾아 입대를 권유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함정을 운항하고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귀했기 때문이었다.

입대 직후 진해 해군기지에서 근무하면서 김영희씨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은 사건 당시 영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진해기지에 있던 중 1946년 9월15일 김구 선생의 방문을 받고 기념 촬영에 참여했다.

인사사령부에서 1946년 10월28일 중위로 진급, 1946년 11월11일 대구호(1372호)의 함장으로 임명, 1947년 3월1일 대위로 진급한 사실이 확인된다. 소령으로 진급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지만 통신학교 교장이었던 전호극 소령에 비해 진급이 1개월 정도 빨랐으므로 소령 진급 시기는 1948년 7월 즈음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47년 1월22일자 《조선일보》는 통위부장 유동열이 해안경비대에서 미국 배를 구입하고 배의 이름을 전주호로 고쳐 불렀다는 것과 함께 배의 사령관으로 이상규 부위(중위)를 임명했다고 보도했다. 아들 이씨는 진해 해군기지에서 이 소령이 맡았던 업무는 함정부장으로서 미국 등에서 들여온 중고 군함을 수리해서 진수시키는 책임자였다고 하며, 함정과 관련된 현장 실무 능력이 뛰어난 반면 손원일 등 관료화된 해군 지휘부와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했다.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을 지지했던 정치적 입장도 이 갈등을 증폭시키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라고 한다.

▲ 김구 선생이 1946년 9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 진해기지를 방문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상규 당시 중위는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섰다.[사진제공 이동주 유족]

여순사건과 임시정대 사령관 이상규 소령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은 물론 해군도 각 함정을 출동시켰다. 이미 14연대 군인들의 제주도 이송을 위해 여수에 정박해 있던 305정, 516정 두 척의 함정은 반란군의 총소리를 듣고 바다로 빠져나온 뒤였다고 했다. 모두 7척의 배를 묶어 임시정대를 꾸렸고 작전 지휘는 이상규 소령이 책임지게 되었다. 함대의 임무는 “반란군의 해상탈출을 봉쇄하고 육군부대를 지원하여 반도진압의 기일을 단축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국방부 《한국전쟁사》는 “여순반란사건(1948. 10. 19)을 진압함에 있어 상륙전을 전담하는 특수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으니 반란군의 진압을 위하여 육군은 제3, 제4, 제5, 제6, 제12, 제15의 각 연대를 급거 출동시켰고, 해군은 충무공, 제510, 제304, 제302, 제305, 제516, 제505의 각 정을 진해 및 목포기지에서 출동시켜 10월22일부터 해안봉쇄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 임시정대(사령관 이상규)의 작전보고에서 함정장비의 강화 및 해병대의 필요성을 중점적으로 지적하였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소령이 부산에서 5연대 군인들을 함정에 실었으나 공군 등 아무런 지원이 없는데다 반란군의 공격에 노출된 상태로 상륙정도 없이 항구에 상륙하는 일은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들 이씨에 따르면, 함대 사령관조차 날아오는 소총알이 귓전을 스치고 지났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육군의 여수 상륙 임무를 마친 뒤 해안에서 봉쇄작전을 하던 이 소령은 순천에서 잡혀 온 단순 어부들을 반란군과 무관하다고 판단하고 풀어준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해안경비대 상부에서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여수 진압 상황으로 보아 풀려나지 않았다면 순천의 어부들은 모두 총살당했을 것이다.

14연대의 반란은 10월27일 여수를 마지막으로 진압되었으므로 해상의 지원 임무가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이에 따라 해안경비대는 10월29일 임시정대 사령관을 이상규 소령에서 신현준 중령으로 교체했다. 충무공 정장으로 복귀한 이상규 소령은 10월30일 손원일과 함께 진해기지로 복귀했다. 희생자의 처는 여순사건 후 진해기지로 돌아온 이 소령이 가족들에게 “모자와 견장이 다 준비되어 있다”며 곧 중령으로 진급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 기분 좋아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해병대 창설을 제안한 이상규 소령

1948년 5월1일 중령으로 승진한 신현준은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이 되어 이상규 소령과 같은 기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신씨는 회고록에서 만주군 출신으로 1946년 5월 귀국하여 육군인 국방경비대로 가려했으나 이미 장교가 만원 상태이므로 해안경비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해군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고 함정이나 항해에 대한 전문성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0월19일 여순사건을 맞아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나는 해군 함정 4척(진해기지에 있던 충무공, 510호, 304호, 302호를 말하는 듯하다)을 이끌고 출동하여, 우선 여수항 주변 일대를 점령한 다음, 해상으로부터 반란군을 진압하는 임무에 종사하였다. 이 작전이 끝난 뒤 나는 해군의 상륙 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 즉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부기한 전투상보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해병대 창설을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첫걸음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 대위로 302호 정장이었던 공정식도 이에 대해 한마디 하고 있다. 그는 “(여순사건) 다음 날인 21일에는 임시정대를 편성해 진압작전에 참가하라는 손 제독의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이는 실행되지 않아 302정 단독으로 해상작전을 수행하였다”라고 했다. 본인이 정장으로 있는 302호만 작전을 했다는 주장인데 이는 신현준의 4척보다 축소된 것이었다. 그는 이어 “해병대 창설이 절실히 요청됨”이라는 전투상보를 신현준에게 올렸다고 한다. 해병대 창설 제안자가 자신이었다는 주장이다.

《한국전쟁사》의 이 내용을 통해 당시 일곱 척의 배를 지휘한 임시정대 사령관이 이상규 소령이었으며, 해병대의 필요성을 주장한 보고서를 작성한 주체는 신현준이나 공정식이 아니라 이상규 소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정보부의 《북한대남공작사》 263쪽에도 당시 사령관이 이상규 소령으로, 반란이 진압된 10월 29일 신현준 중령으로 교대되었고, 당시 육전대 즉 해병대의 필요성을 주장한 실전보고서를 이상규 소령이 제출했다고 적혀 있다. 1948년 10월30일자 《부산신문》은 여수해상에 있는 천안함에 타고 있던 특파원의 27일 기사를 실었는데 여기에는 당일 새벽 작전에서 이상규 소령이 충무공호 외 6척을 지휘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7일은 여수지역이 완전히 수복되는 날이므로 이 기사는 이 소령에 대한 《한국전쟁사》나 《북한대남공작사》의 기록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한편, 신현준이나 공정식 등 해병대 창설 멤버들의 회고록에서 이상규 소령의 존재는 마치 투명인간 같다. 신씨는 “한국 해병대는 (나)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지만 정직한 표현은 아니다.

‘해상인민군’ 사건 이항표를 탈출시키려 했다며 숙군당하다

이 소령이 연행된 때는 1948년 12월 초였다. 가족들은 진해 통제부 관사에 있던 중 찾아온 방첩대에 의해 고무신을 신은 채 끌려가는 이 소령의 모습을 기억한다. 6개월이 지나서야 가족들은 이 소령이 마산형무소에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 그 누구도 이 소령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1949년 6월7일 해군고등군법회의가 열렸다. 이 소령을 포함해 같은 혐의로 함께 재판을 받은 사람은 심재항, 김상록, 김기현, 김형석, 노봉래, 민간인 견습기자 유점옥 등으로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일방적이지만 이 소령이 체포되기 전까지 진행과정에 대해 군검찰의 주장을 요약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 1948년 8월 이 소령은 진해읍 해군관사에서 병조장 이항표를 통하여 ‘해상인민군’에 가입했다.

- 1948년 9월경 이항표가 체포되어 진해 해군헌병대 영창에 감금되었다.

- 1948년 9월 하순 일등병조 심재항은 영창에 있던 이항표를 통해 구두로 ‘해상인민군’에 가입함과 동시에 이항표의 구출계획을 알게 되었다.

- 1948년 10월23일 새벽 1시 심재항은 진해 해군영창에 갇혀 있던 병조장 이항표로부터 받은 비밀서신을 이 소령에게 전달했다. 이 소령은 쪽지를 찢어 바다에 버렸다. 같은 날 저녁 8시 심재항과 김상록이 만나 이항표의 탈출계획을 진행시켰으며 심재항은 그 직후 체포되어 영창에 감금되었다. 이항표의 탈출여부는 모른다.

- 1948년 11월26일 새벽 1시 헌병대 영창에 갇혀있던 심재항이 탈영했다. 이항표가 이날 탈출했다면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규 소령에 대해 ‘해상인민군’에 가입하고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이항표의 비밀서신을 받은 행위로 징역 2년, 미결구금 산입일은 183일을 선고했다. 이항표를 두 번에 걸쳐 탈출시키려 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고, ‘해상인민군’을 ‘정당한 군권을 파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규정했지만 실체에 대해 소개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전쟁이 나자 진해해군헌병대에 끌려 나가다

이 소령의 처남이었던 김영호씨가 전쟁 전 마산형무소에서 면회했다. 곧 풀려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 소령은 풀려나면 포경선을 타고 남극에 가서 고래잡이를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 씨가 다시 찾아갔을 때는 전쟁 직후였고 석방된다는 사람은 풀려나지 않았다. 형무소 소장은 “김창룡이가 데리고 갔습니다”라고 했다고 기억했다. 이 소령의 감옥기록인 명적표에는 “출감일 및 사유”에 대해 “1950년 7월24일 군육군헌병대”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날 끌려 나간 재소자들은 마산육군헌병대에 의해 인근 산기슭 구덩이 속에서 총살당했다.

이 소령에게 병조장 이항표의 서신을 전달했다는 심재항은 진해해군헌병대에, 병조장 이항표의 탈출을 도왔다는 김상록은 마산육군헌병대에 끌려나가 총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심재항이 총살당한 날은 1950년 7월5일, 김상록은 7월24일로 추정된다.

의문점들

이 소령이 받았다는 혐의를 먼저 살펴보자.

쪽지를 받았다는 1948년 10월23일 새벽 1시는 반란군의 총탄을 받아가며 최초의 여수항 상륙작전을 시도할 때였다. 일등병조 심재항은 형무소 담당으로 진해 해군기지에 있었을 것이고 임시정대 사령관이었던 이 소령은 여수 앞바다에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쪽지 전달 사실의 증명에도 문제가 있다. 이 소령과 심재항이 저질렀던 가장 구체적인 범행인 쪽지는 찢겨져 바다에 버려졌으므로 이를 증명하려면 전달 당사자의 자백이나 목격자의 증언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전달자 심재항과 이 말을 전해 들었다는 김상록의 자백이 있다.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을 것이다. 희생자의 처도 쪽지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이는 사건 후 감시 목적으로 집에 드나들던 방첩대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였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쪽지를 전달했다는 심재항은 그 날로 체포되었으나 11월26일 새벽 1시 탈영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탈출이라고 표현했어야 옳을 듯한데 판결자료는 ‘근무지 이탈’ 정도로 보았던 것이다. 심재항은 1950년 7월5일 진해해군헌병대에 끌려나가 총살당한 사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확인되었다.

다음, 군법회의가 판단한 ‘해상인민군’이 실제 있었는지 의문이다. 정당한 군권을 파괴할 목적으로 1948년 8월 만들어져 12월까지 활동한 조직이고 수괴는 병조장 이항표였다. 전호극 소령 관련 ‘해상의용군’의 활동기간은 1946년 11월부터 1948년 8월까지였음을 돌이켜보면 수괴가 같았던 두 조직이 명칭만 바뀐 채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포되어 헌병대 영창에 갇혀 있던 수괴가 영창에서도 또 대원을 조직했다는 주장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같은 시기 조작된 최능진, 오동기 소령의 조직 이름이 ‘혁명의용군’이었음도 기억하자.

연행 후 6개월 동안 가족들이 면회를 할 수 없었는데 면회 요청 때마다 해군측은 이 소령이 함정 침몰로 행방불명되었다든가 월북하던 함정에 납치되었다고 했다. 이로 인해 가족들은 심한 고통을 받았다. 면회가 허용될 즈음 병조장 이항표의 편지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해군 군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조작된 사실을 믿게 만들려고 일부러 조작된 정보를 흘리는 것이 느껴졌었다고 한다.

그럼 ‘해상의용군’, ‘해상인민군’의 수괴였다는 병조장 이항표는 누구였을까?

김성은은 1946년부터 이항표를 알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김성은은 소대장이었던 이항표가 만주군 특설부대 준위 출신으로 좌익사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고 하며, 1949년 5월 508호의 월북 이후 ‘해상인민군’ 사건으로 체포되어 1949년 늦가을 해군 신병교육대 사격장 산기슭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1948년 5월7일 통천호와 고원호의 월북에서 비롯된 것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항표는 1948년 5월 체포를 피해 잠적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 판결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1965년 박성환 기자는 1948년 5.10선거 투표함과 용지 수송을 반대하는 활동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해군 내 이항표 세포망이 발각되었고 이때 이항표가 잠적한 것이라고 한다. 사건 후 조직의 핵심이었던 이항표의 행방이 묘연했다는 박성환 기자의 주장도 특이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보낸 장문의 편지, 1미터 길이가 넘는다는 장문의 두루마리 편지로 인해 해군 내 세포들이 일망타진되었다는 주장이다. 정작 이항표 본인은 잠적한 뒤였다고 하는 걸 보면 그의 역할이 프락션은 아니었는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마치 박정희가 김창룡에게 제출했다는 200명 명부의 결과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미결구금 기간과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법률가들은 미결구금의 기간에 대해 재판에 필요한 기간에 국한되어야 하며 도주를 방지하거나 증거인멸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군법회의에서 결정한 이상규 소령의 미결구금 산입일은 183일이었다. 심재항은 157일, 김상록은 157일, 김기현은 120일, 김형석은 157일이었다. 앞의 전호극 소령은 86일이었다. 유족들의 기억에 따르면 이날은 희생자들이 끌려간 뒤 면회를 하지 못한 기간, 어디로 끌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어 애를 끓이던 기간과 일치한다. 다음 기회에 보겠지만 일제강점기 체포된 항일운동가들의 미결구금 산입일은 500일에 이른다. 일제 검찰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 아니면 증거를 만들어낼 때까지, 조직을 조작할 수 있을 때까지 석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즉, 한번 잡혀가면 반드시 범죄자가 되어야 풀려나오게 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명예회복의 기회를

이상규 소령은 역사에서, 해군의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이다. 해병대 창설 제안자였음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좌익사건과 관련해서 숙청된 군인이었기 때문이라면 그에 대해서도 합당한 기록이 남겨져야 했을 것인데 그것도 아니다. 좌익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의 공적을 남길 수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판결자료에 따르면, 쪽지를 받아 바다에 버린 행위 때문에 ‘해상인민군’에 가입했으며 사건을 알면서도 은폐한 범죄자가 되었고 어마어마한 반국가단체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선고된 징역형은 고작 2년이었다. 그러나 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을 빌미로 자신의 억울함을 변명할 틈도 없이 학살당했다. 당시 군 지휘부 인사들은 ‘해상인민군’ 사건을 돌아보려하지 않는다. 부당했던 숙군의 일면이 드러날까 우려하는 것일까? 70년이 되어가는 지금 조작된 사건의 희생자들은 아니었는지 더 늦기 전에 그 진실을 밝혀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