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마르크스의 사상은 사회주의인지, 공산주의인지 헷갈립니다. 예를 들어 나라이름에는 사회주의가 들어가고 당의 이름에는 공산주의가 들어갑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같은 말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말인지 궁금합니다.

답 :

1) 인터내셔널

앞에서 1847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연맹’을 주도하면서 공산주의란 말을 사회주의라는 말보다 선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사회주의라는 말을 주로 생시몽, 오원, 푸리에 등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자기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주의라는 말은 이성적이지만 지식인 냄새가 나고 공산주의라는 말은 종교적이지만 민중적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852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연맹은 해체됩니다. 이 조직은 직인과 혁명가 중심의 비밀조직이었으며 도시 폭동에 몰두하는 등 대체로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수준이며 근대 초기 자본주의 현실을 반영하였기에 이미 1850년 경제부흥 이후 현실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그 이후 개인적으로는 15년간에 걸쳐 참담한 시기를 거쳤어요. 귀족 가문 출신 아내 예니의 친정이나 친구인 영국 공장주 아들 엥겔스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런 시기를 견뎠다고 해요. 사회적으로도 마르크스는 이미 잊혔다고 합니다. 그 시대는 아직 부르주아 공화파의 혁명시대였으니까요. 그러나 1860년대 초 <자본론>을 완성한 이후 마르크스는 부활합니다.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죠.

그것이 1864년 출발한 국제노동자협회 즉 제1차 인터내셔널입니다. 세계의 노동자라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인터내셔널의 노래’로 유명한 그 인터내셔널이지요.

억압받은 민중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세상은 바야흐로 밑바닥부터 뒤바뀌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들이 전부가 되리라

2) 대중노선

이때부터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보다 사회주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 1890년 서문에서 마르크스가 왜 자신의 깃발을 바꾸었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협회의 목적은 유럽과 미국의 전투적인 노동자계급 전체를 하나의 대군으로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협회는 <공산당 선언>에 수록된 원리(곧 공산주의)로부터 출발할 수는 없었다. 협회는 영국의 노동조합들이나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및 스페인의 프루동주의자들, 그리고 독일의 라살레파까지 모두 포용하는 강령(곧 사회주의)을 가져야만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회주의라는 말은 이런 다양한 노동자 조직이 공동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말이기에 이 말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엥겔스의 이 주장은 다양한 노동자 조직의 고유성을 인정하며, 노동자 대중의 참여를 우선시하고 노동자의 국제적인 단결을 강조하려는 마르크스의 입장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포용성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인간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이겠지요. 무엇이 그를 이렇게 성숙하게 했을까요?

마르크스는 가난과 무시 속에서 그 자신의 활동에 대한 철저하게 반성했어요. 그는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자신의 사회 원리가 잘못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런 원리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데서 그는 자신이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당시 영국에서 이미 대공장이 들어서고, 밀집한 육체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대중적인 조직, 즉 노동조합을 건설했어요. 노동자들은 참정권을 획득하고, 부르주아 정부로부터 ‘공장법’을 획득해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스스로 의회에 진출해 부르주아 정치가들과 대결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영국 노동자의 투쟁하는 모습에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연맹 같은 조직과 활동이 이미 시대착오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습니다. 그는 이제 실천의 방법을 대중적 조직과 합법적 투쟁, 의회 진출 노선으로 잡았어요. 이렇게 생각이 길을 열어주었기에 그는 대중적 합법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겁니다.

사유의 역할은 독선과 자만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방이 벽으로 막힌 궁지에서 길을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게 철학과 사상가의 역할입니다.

▲<공산당 선언> 표지 [사진 : 구글 검색]

3) 실천을 통한 학습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적 소유를 확립하는 공산주의의 원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는 다만 노동자들이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서 점차 자기의 원리가 옳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자신의 주장을 일단 뒤로 물렸던 것입니다.

학자로서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는 겁니다만, 이론적으로 논쟁을 통해서 상대의 주장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조급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삶의 긴 호흡과 자주적 정신이 필요하죠.

“<공산당 선언>에 제시된 명제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 마르크스는 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지적 발전에 기대를 걸었다. 통일된 행동과 토론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지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자본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승패의 교차, 특히 승리보다 패배를 지켜보면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그때까지 써오던 자신들의 만병통치약이 전혀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으며…”(<공산당 선언> 서문)

간단히 말하자면 이론적 논쟁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사람은 배운다는 겁니다. 실천, 특히 실패가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마르크스의 인식론이에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며, 그러나 실패를 통해 배우라.

역사는 실패의 연속입니다. 실패는 역사적 투쟁에 참여하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이 실패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면 의미 있는 실패가 됩니다. 우선 그가 추구하는 이념이 역사의 미래를 지향하는 이념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 경우 역사의 이념은 실패하더라도 다시 더 큰 규모로 반복하게 됩니다.

어떤 사상도 그토록 많은 실패 끝에 다시 부활하곤 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러나 그렇게 부활했지요. 여기에는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수천만, 수억 명의 노동자, 일하는 사람 민중의 고통과 눈물, 갈망과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실패를 통해 새로운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죠. 그저 과거 실패한 방법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모하고 허망한 짓에 불과합니다. 마르크스 또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위대한 것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철저하게 패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매번 그런 처절한 실패를 겪으면서 그런 실패를 통해 새롭게 배우고 이렇게 새롭게 탄생해 왔습니다.

4)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역할 분담

마르크스가 주도한 인터내셔널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70년경에는 회원이 무려 2백만에 달할 정도였다니, 그 규모의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지요.

인터내셔널은 유럽에 노동운동의 씨를 뿌렸습니다. 이런 씨앗은 혁명적 정당의 조직으로 나갔습니다. 그 최초의 결실이 1869년 창립된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어요. 곧 이어 유럽의 여러 국가에도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의 정당이 출현했습니다.

노동운동이 국제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라는 말과 공산주의라는 말에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이런 역할 분담은 다음번에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너무 길어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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