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멕시코, 칠레

(글 내용은 절대적으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요약과 인용의 경우 모두 괄호에 페이지를 표기했습니다. 추가로 인용은 겹따옴표(“ ”)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텍스트를 참고한 경우에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들어가며 : 제국을 비추는 거울

1973년 칠레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 1976년 아르헨티나 비델라 장군의 쿠데타, 과테말라의 36년 군부독재, 그리고 소모사 부자의 니카라과 44년 지배 등 쿠데타와 군사독재로 점철된 것이 중남미의 정치사다. 도대체 왜 중남미는 이토록 잦은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겪게 되었나? 어쩌다가 자유나 인권, 민주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동네가 되었을까?

누군가가 한국 민주주의를 빗대 ‘후불제 민주주의’라 표현한 것처럼, 서구인들에게나 어울리는 민주주의 제도를 분수에도 맞지 않게 추구한 결과인가? 박정희가 ‘한국식 민주주의’를 말한 것처럼 중남미 민중들에게 서구식(?) 민주주의는 너무 벅찬 걸까? 하지만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는 식의 설명은 논리적 설명보단 운명론적 합리화에 가깝다.

이런 정치적 후진성에 대한 합리화와 더불어 중남미에 꼬리표처럼 붙는 설명이 있다. 바로 풍부한 자원이 되레 중남미를 후진적으로 만들었다는 ‘자원의 저주’다. 중남미 민중들은 자연의 축복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게을러지고 나태함에 빠졌고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원의 저주’보다 더 끔찍한 저주가 있다. 그것은 신이 중남미에 풍부한 자원을 주면서 잔인하게도 그것을 이용할 이들은 따로 정해두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 중남미를 개척, 정복했고 그 결과 번성했다. 20세기 들어 반복되는 쿠데타와 군부독재, 고질적인 가난은 ‘후진적 국민성’, ‘자원의 저주’ 같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 아니라 미국이 추구한 대외정책의 구체적 결과였다. 중남미의 비극은 곧 미국의 번영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쿠바 : 침략이 힘들면 테러라도

▲ 쿠바 해안에서 침몰한 메인호

우린 루시타니아호 사건, 진주만 공습 등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살펴보았다. 미국과 쿠바와의 인연도 전쟁 ‘자해극’으로 시작한다. 

▲메인호 사건 : 19세기 초부터 미국은 스페인 식민지인 쿠바를 눈여겨봤다. 쿠바에 무장게릴라를 침투시키거나 스페인에게 1억 달러에 팔라고 제안하는 등의 공작을 한다. 쿠바가 스페인을 상대로 벌이는 독립투쟁을 지원하기도 한다. 1898년 1월25일 미국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전함 메인호를 쿠바 아바나 항에 파견한다. 3주 뒤 메인호 기관실에서 원인 모를 폭발 사건이 발생한다. 

메인호 함장은 폭발 원인이 함선 내부에 있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스페인 정부는 원인 규명을 위한 합동조사를 하자고 공식 요청한다. 쿠바의 완전 자치도 보장하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미국은 모든 걸 무시하고 스페인에 선전포고한다. 덕분에 미국은 1898년 12월 파리강화조약을 통해 쿠바·필리핀·푸에르토리코·괌을 손에 넣는다. 이후 쿠바에는 1909년 고메즈 괴뢰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총독부가 들어서게 된다.(80~82) 

▲쿠바 전복 공작 :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 혁명정부가 들어선다. 1960년 3월 아이젠하워는 CIA에 쿠바 침공을 위한 반공 게릴라를 양성하도록 지시한다. 군사훈련을 거친 이들은 케네디의 최종 승인 후 1961년 4월15일 쿠바를 기습 침공한다. 하지만 침공은 혁명군의 저항으로 실패한다. 미군 사망자 100여 명, 포로 1200여 명, 그리고 국제사회의 비난, 침공의 초라한 결과는 곧 미국의 쿠바 전략을 변경시켰다. 물론 바뀐 전략은 인권,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직접적인 침략 말고 암살이나 테러 같은 비밀공작을 택한 것이다.(83~84) 

▲테러 및 비밀공작 : 1976년 10월6일 인도양 상공을 비행하던 쿠바 민항기가 폭파한다. 국제 펜싱대회에 참가한 쿠바 청소년 등 민간인 76명 전원이 사망한다. 배후는 미국이 육성한 ‘포사다(Posada)’ 테러단이었다. 테러단의 두목 포사다는 미국의 아메리카군사학교(SOA)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미 육군 소위를 지냈다. 1997년 9월 포사다는 아바나에 있는 식당을 폭파해 12명을 살상했다. 

이밖에도 전염병을 퍼뜨려 돼지 수십만 마리가 폐사하거나 생화학무기를 살포해 200여 명이 죽는 일도 있었다. 특히 1962년에 작성된 ‘노드우드 작전’은 미국이 얼마나 쿠바 전복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준다. 선전포고 구실을 위해 미그기 모형을 만들어 미국 도시를 폭격한다거나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폭파한 뒤 쿠바 소행으로 몬다는 등의 계획이었다. 다행히 이런 계획은 실행단계에서 거부된다. 쿠바 정부는 40여 년간 이어진 미국의 이런 테러와 침공이 국제법을 위반하는 범죄라며 배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UN은 이에 대해 아무런 조사나 조처도 하지 않았다.(85~90) 

멕시코 : 영토 확장의 희생양

▲미국의 영토 확장 :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에게서 독립하고부터 미국은 멕시코 영토를 빼앗기 위해 멕시코 내부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한다. 그 예로 미국은 텍사스 내부의 반군을 지원·육성한다. 1836년 미국의 지원을 업은 이들은 멕시코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미국은 이들 반군과 함께 멕시코를 침공하여 텍사스를 빼앗는다. 이후 텍사스는 ‘텍사스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거처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된다.

미국의 영토 욕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46년 4월 텍사스와 멕시코 사이 국경분쟁으로 미군 11명이 사망한다. 미국은 이를 영토침공으로 규정하고 선전포고를 한다. 멕시코 정부는 분쟁지역은 엄연히 멕시코 영토이고 먼저 침공한 쪽은 미국이라며 현장조사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미 미국은 멕시코 영토를 빼앗기로 결심했다. 1848년 2월, 당시 멕시코 영토의 3분의 1이 넘는 현재의 텍사스·콜로라도·애리조나·뉴멕시코·와이오밍·캘리포니아·네바다·유타를 차지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이 난다.(91~92) 

앞서 메인호 사건부터 세계대전 참전까지 보듯이, 미국에게 중요한 건 과정이야 어떻든 일단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싸우면 힘센 놈이 이긴다. 명쾌하다. 제국에게 전쟁은 언제나 매력적인 옵션일 수밖에 없다. 

칠레 : “대량학살은 어찌 보면 좋은 것”

▲영화 <칠레 전투> 장면 갈무리

▲아옌데 정부 전복 공작 : 1970년 선거에서 인민연합의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아옌데 정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미국 기업들이 소유하던 구리광산 등에 국유화를 단행한다. 의료, 교육 등 공공서비스도 확대한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이라며 아옌데 정부 전복을 지시한다. 1970년 9월15일 미국 정부는 ‘푸벨트 작전’을 수립한다. 비밀리에 칠레 군부에 상당한 현금과 무기가 공급된다. “아옌데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목표다.” 1970년 10월16일 키신저 보좌관이 산티아고 주재 CIA 칠레지부장에게 보낸 전문이다. 

1973년 9월8일 쿠데타 3일 전, 산티아고 주재 CIA지부는 본부에 쿠데타 실행계획을 보낸다.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발파라이소 항에서 거사하기로 결정…(중략)…거사 일은 9월10일, 늦어도 9월11일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미 해군 전함들은 발파라이소 항에 정박한다. 성공적 쿠데타를 위한 일종의 엄호였다. 아옌데 정부는 결국 붕괴되었다. “칠레 만세! 칠레 국민 만세! 칠레 노동자 만세!” 죽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연설이었다.(95~97) 

▲CIA의 민간인 학살 주도 : 쿠데타 직후 칠레 피노체트 군부는 민간인 학살을 시작한다. 피노체트는 1주일 동안 모든 공항과 항만을 봉쇄한 채 킬링필드를 재연한다. 쿠데타 발생 3개월 동안에만 산티아고 국립경기장에는 4만여 명의 시민이 끌려온다. 시민들은 노랑·검정·붉은 카드로 분류됐다. 붉은 카드는 즉결 처형을 뜻했다. 피노체트 독재 기간 동안 최소 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문, 강간 등의 희생자도 20만 명에 달했다. 

불로 지지기, 집게로 손톱 뽑기, 물고문, 전기고문, 소음으로 고막 터뜨리기, 성폭행 등 온갖 고문이 자행됐다. 또 반체제 민간인을 헬기에 실어 호수·강·바다에 던져 살해하거나 학살된 시신을 산이나 길거리에 버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1973년 9월10일 쿠데타 하루 전, 미국은 민중운동가, 학생, 소작농 등 총 2만여 명의 살생부를 쿠데타 세력에게 넘겨준다. 9월15일 키신저 국무장관은 닉슨에게 “(민간인 학살이)우리가 한 짓은 아니나 도와준 것은 사실이다”라고 보고한다. 1974년 12월 키신저는 칠레의 인권유린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 말한다. 미 하원 비공개 청문회에서 CIA 국장 윌리엄 콜비는 “칠레의 내전을 막기 위해 자행된 대량 학살은 어찌 보면 좋은 것이기도 하다”고 답한다.(98~101) 

쿠바에서 자행된 무력침공과 테러공작, 멕시코에서의 분리주의 선동과 침략전쟁, 그리고 칠레에서 일어난 우익쿠데타와 대량학살은 미국이 중남미에서 행한 만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황에 따라서는 대량 학살도 ‘좋은 것’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제국의 대외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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