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정훈의 여명의 눈동자(2)

‘여명의 눈동자’ 긴 밤을 뚫고 나오는 희미한 빛. 아직은 어둠이 지배할 때 멀리 한줄기 밝음이 캄캄한 어두움을 서서히 밀어내는 황홀경. 전환의 시대 그 웅혼한 빛을 추적하는 까만 눈동자. 한국사회의 ‘전환기 여명’을 추적한다.[필자서문]

국내 여론조사의 부정확성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4.13총선 이전에 새누리당의 패배와 야권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중의 쌓인 불만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심판으로 드러났고 새누리당은 참패했다. 동시에 친박계가 주도한 영구집권전략도 심대한 타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러자 벌써 낙관론이 고개를 쳐든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폐쇄한 (보수)정부는 내년에 끝날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이해찬 당선자)." “내년 (대선에서)60, 70%(의 득표율)로 집권할 수 있을 것(천호선 전 정의당 대표)" 노무현 전 대통령 7주기 토크콘서트에서 나온 발언들이다.

▲김종인 비대위 대표 등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이 4.13총선 개표 결과를 지켜보면서 박수를 하고 있다.[사진출처: 더민주 홈페이지]

야권은 여소야대로 실로 오랜만에 과분한 승리를 맛보며 들떠있고, 분열된 진보진영도 깊은 패배주의 수렁에서 서서히 벗어나 새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언론은 이번 선거 결과를 ‘선거혁명’이라 예찬하고, 진보도 ‘민중은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선거혁명은 앞으로도 지속가능하고, 민중의 위대성은 과연 2017년 대선에서도 빛날 것인가?

민중은 ‘왜, 갑자기’ 위대해졌나?

그동안 새누리당의 반복된 실정에도 선거만하면 야권은 계속 졌다. 그런데 왜 민중은 2016년 봄에 들어서야 갑자기 위대해지기 시작한 걸까? 대중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일까?

이번 선거의 특징 중 하나는 야권뿐 아니라 정치권 전체가 각기 분열된 상태에서 치른 선거였다는 점이다. 수구보수정당, 중도야당, 진보정당이 모두 제각각 핵분열했다. 즉 중도야권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선거 직전 분리했고, 새누리당도 명목상 하나의 당이었지만 사실상 친박계와 비박계 2개의 당으로 분열했다. 이미 사분오열된 진보는 말할 것도 없다. 형식적으로는 야권이 분열했으나, 오히려 여권의 분열과 파문이 그에 못지않게 두드러져 근래 들어 가장 혼탁한 선거였다. 형식상 야권에게 불리한 선거구도 아래 전체 정치권의 혼돈과 분열 속에서 대중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안간힘을 다해 최선을 선택한 선거였다. 정치권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승리라 할만하다.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은 관권이 개입한 대선 부정 의혹에서 시작해 통합진보당 해산,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밀어붙이기, 한일 위안부 밀실합의, 사드 배치, 노동법 개악, 테러방지법 강행에 분노했다. 보수층도 경제 악화, 메르스 사태, 십상시 파문, 친박비박의 진흙탕 공천 분쟁과 친박의 오만방자에 눈을 돌렸다. 새누리당은 극한 권력투쟁에 혈안이 돼 현실을 보지 못했고, 중도야권은 분열과 패배주의로 민심을 읽지 못했고, 진보는 사분오열로 각자 생존에 급급했다. 어느 정치세력도 분노하고 변화하는 민심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 민중이 갑자기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한국정치 전체가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몰랐다.

민중은 위대한 게 아니라 여전히 위태롭다

결과는 이겼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이번 4.13총선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더 이상 후퇴시킬 수 없는 ‘불가역적 승리’를 얻은 것일까? 울산과 창원 등지에서 노동자들의 단결과 주체적 노력으로 이룬 성과는 차후 별도로 논하고, 야권이 얻은 ‘어부지리 승리’의 요인을 우선 분석해보자. 가설은 때로 현실을 명확히 진단하는데 유용할 수 있다.

첫째 가설은 만약 박 정권의 독선과 무능이 응축된 국정교과서 강행, 한일 위안부 밀실합의, 테러방지법 강행 등 선거 이전 시기 많은 국민이 공분한 연속된 실정의 누적이 없었다면 야권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둘째는 친박계 주도의 새누리당 내분과 권력투쟁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야권연대 없이도 이겼을까? 세 번째로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당세가 과거 DJ와 YS처럼 대등했다면 국민의 선택적 교차투표가 가능했을까?

이 가설들을 뒤집어 놓고 보면 야권의 승리는 절대적 승리가 아니라 취약한 조건부 승리임을 알 수 있다. 새누리당이 정치방식의 변신을 꾀해 내분을 극복할 새로운 ‘정치개편’을 이루고, 야권이 양자 구도로 분열돼 내년 대선을 치른다면 양상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대선 승리의 안정성은 대중의 정치의식 수준과 직접적인 정치참여에 의해 확고히 담보되는데 4.13 ‘선거혁명’ 이후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

한국 민중은 불굴의 의지로 산전수전을 겪으며 과거 한나라당, 현 새누리당 등 수구보수정당을 넘어설 수준까지 전진해왔다. 수구정권이 ‘기울어진 운동장’과 편법, 부정선거 없이는 단일화된 야권을 이길 수 없는 수준에 접근했다. 이것은 분단과 독재라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 피로써 싸우며 이룩한 한국 민주주의와 민중의 위대한 성과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분단과 전쟁을 겪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이 보수 지배적인 사회이다. 지난 15년간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는 10% 안팎에 머물러 있으며, 여야에 대한 선택 기준은 유럽과 같은 좌우 개념이 아니다. 여당이 못하면 야당을, 야당이 못하면 보수여당을 선택하는 시계추 같은 보수양당 중심의 정치지형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11% 정도로 취약하며, 민주노총 조합원들조차 중도야당에 대한 지지가 더 많다. 권리의식은 확산되었지만 전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여전히 높지 않다.

대중에 대한 평가가 과도하다보면, 대중이 이번 총선에서 3자 구도를 넘어섰으므로, 앞으로 어떤 3자 구도도 대중은 극복할 수 있다는 견해로 발전한다. 실제 시사평론가 유창선씨는 ‘대선 3자 구도’에서도 야권 승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냥 3자 구도로 대선을 치르는 것도 이제는 고려해볼 법하다.” “야권이 3자 구도 아래에서도 정권교체를 이루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대선 패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친박 영구집권 시나리오 붕괴와 새 정계개편 모색

여권 내부의 권력을 둘러싼 분열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는 새누리당의 분열은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 교체시기와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현재 새누리당의 가장 큰 적은 새누리당 자신이다. 친박계가 차기 정권을 야당은 물론, 당내 다른 세력에게 내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본질이다. 이번 총선은 엄밀히 따지면 새누리당의 집권전략이 아니라 친박계 주도의 총선과 장기집권전략이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친박계의 차기 (영구)집권전략 중 하나는, 총선에서 승리한 다음 대통령선거 없이 내각제 개헌과 정계개편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관측됐다. 친박계 홍문종, 최경환 의원이 이를 언급한 적이 있고 요즘엔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주장하고 있다. 이는 잠재적 대권주자인 김무성 전 대표의 확장성에 한계가 있고 마땅한 친박계 대선주자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여야 대다수 의원들이 개헌의 목표는 다르지만 개헌 자체에 찬성하고 있어, 개헌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야권과 권력을 분점해 일본식 보수체제나 이원집정부형 내각제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 한국 정치구조의 전면적 개편이자 본질상 새누리당(친박계)의 영구집권전략이다.

이번 총선을 통해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친박의 영구집권전략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내각제 정계개편은 시기와 동력을 잃어 정상적 방법으로는 사실상 어렵게 됐고, 다시 원점에서 마땅한 대선주자 없는 대선을 치러야할 궁지에 몰려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라도 불러와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선거 뒤에 보인 박대통령의 태도는 민심의 수용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그 반대이다. 야당 또는 이른바 비박계와의 타협과 새로운 모색이 아니라 여전히 유신독재식 ‘마이웨이’이다. 이번 ‘김용태 혁신위 파동’을 보면 여전히 친박계의 집권의지가 타협 없이 극단적임을 알 수 있다. 친박계가 이런 식으로 계속 정국을 운영해 간다면, ‘비정상적 방식’으로 정치적 돌파구를 여는 상황도 배제하지 못한다. 제3세계 후진정치의 전형적인 사례들을 반복할지 우려스럽다. 남북관계 악화 또는 인위적 비상사태 조성과 사회 불안 등을 이유로 대선 정치일정 자체를 미루고 계파 주도권을 확보해 정계개편을 시도할 가능성이다. 그저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별개로 새누리당 내 새 흐름도 포착되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싱크탱크 ‘새한국의 비전’ 설립과 개별적 비박계 인물들의 ‘탈 새누리당’ 언행들이다. “새누리당은 망한다”는 말은 이미 언론의 유행어가 됐다. 이는 ‘합리적 보수’를 자칭하는 새누리당 계파가 이후 대안세력화할 가능성을 예고한다. 민심은 친박을 떠났음이 확인되었다. 정의화, 유승민, 정두언, 원희룡, 안철수, 이태규, 정대철, 진영 당선자 등은 지금 소속 정당은 다르지만 유사한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다. 물론 크게 보면 친박계와 별다를 게 없는 보수노선이다. 그래도 새누리당 옷을 벗고 새롭게 이합집산하며 다양한 보수, 수구세력을 흡수해 정계개편을 시도할 경우 보수의 새 대안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사망한 (친박)새누리당에 새 대안이 생기면 과거를 버리고 정권 창출을 위해 하나로 모이는 것도 가능하다.

4.13 ‘선거혁명’의 한계

진보민주세력에게 대선 승리의 가능성은 분명히 열려있다. 그러나 아직 산 넘어 산이다. 대중의 정치의식은 차기 대선을 압도할 정도로 높지 않은데, 대선 앞에는 분열공작과 여권 주도의 정계개편, 편법 부정선거가 도사리고 있다. 여전히 2012년 대선 결과의 재현이 가능한 조건이다.

4.13총선에서 드러난 민중의 열망과 기대와는 다르게, 전반적 야당 지도부의 보수화는 정계개편이 민심과 역행하는 방향으로 갈 조건과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김종인, 안철수 등 현 중도야당의 대표들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비교할 것도 없이 사실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화해와는 거리가 멀다. 이태규 국민의당 당선자가 총선 직후 새누리당과 연정을 언급한 것이나 박지원 원내대표가 내각제를 들고 나오는 게 뜻하는 바는 사실 민생과 민주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정계개편과 보수대연합 합류이다.

선거 이후 여야가 모인 첫 청와대 회동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5.18민중항쟁 36주년을 맞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통령에게 겨우 허용해달라고 보채는 게 현 야당의 수준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부지리 4.13 ‘선거혁명’의 한계이기도 하다. 4.13민의를 계승하고 민중을 배반하는 정치를 막는 길은 대중이 직접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길뿐이다. 정당 지도자란 사람들이 말안장을 타고 편히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 등에 올라타게 하는 것뿐이다.

4.13이 진짜 혁명이라면 야권은 최소한 국민 분노의 근원인 국정교과서 폐기, 테러방지법 폐기, 한일 위안부 밀실합의 파기, 노동악법 폐기, 세월호특별법 개정을 전면에 내걸고 청와대와 싸워야 정상이다. 어부지리 선거혁명의 한계는 대기주의(待機主義)다. 야당이 진짜 정치개혁을 하려면 이런 법개정 요구를 전면에 내걸고 국민과 함께 직접 나서야한다.

민변 이재화 변호사의 지적처럼 테러방지법은 국정원의 공작정치와 편법 부정선거의 길을 합법적으로 열어주게 된다. 한국은 서구 유럽처럼 민주주의가 정착된 그런 나라가 아직 아니다. 선거에 이겨도 투표함을 지킬 힘이 없으면 지난 대선처럼 또 지는 것이다. 테러방지법도 폐기하지 못하면서 대선 승리를 자신하지 말아야한다.

민중은 원래 위대한 것이 아니라 투쟁과정을 통해 위대해진다.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통해 정치조직과 지도자를 만들어내면서 점차 불패의 세력으로 성장하며 위대해져간다. 방심은 금물이다.

* 이정훈 위원은 1985년 고려대 광주학살원흉 처단투쟁위원회 위원장, 삼민투 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3년 옥고를 치른 뒤 오산과 수원에서 노동자회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런던대 아시아태평양 지역학 석사과정, 민주노동당 중앙위원, 통합진보당 교육위원, 경실련 하이텔정보교육원 이사, 사람과 사상 소리클럽 출판사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민플러스 편집기획위원으로 국제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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