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00주년, 6월 항쟁 30주년 등 겹쳐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연초부터 대통령 탄핵과 조기대선, 개헌 등의 이슈로 시끄럽다. 2017년은 국내외적으로 기억할만한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몇년이 되는 해일까?

① 러시아 혁명 100주년

▲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2017년은 전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러시아는 1차 대전에 참전 중이었으나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에 연전연패 중이었고 국고탕진과 생산력 저하로 인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식량이 부족해 아사자가 속출하고 주부들은 식료품 가게를 약탈했으며 도시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마비된 상태였다.

시위진압을 위해 내보낸 병사들마저 귀족 출신 지휘관들을 사살하거나 쫓아내고 무기고를 열어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민중 편으로 돌아섰다. 버틸 재간이 없어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선언했으며 3월15일 모스크바 시내에 왕조를 상징하는 쌍두독수리 깃발이 사라지고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로 뒤덮였다. 이때가 러시아력으로는 아직 2월이었으므로 ‘2월 혁명’으로 부른다.

이 때 까지만 해도 혁명소식을 접하고 스위스에서 막 귀국한 레닌의 볼셰비키 세력은 보잘 것 없었다. 온건파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자유주의자들과 멘셰비키 그룹이 주도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됐지만 레닌은 노동자의 대표 기관인 소비에트가 권력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4월 테제’를 발표하며 맞섰다.

1917년 11월7일 무장봉기에 나선 볼셰비키는 케렌스키 정권을 축출하고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권 수립에 성공한다(10월 혁명). 레닌은 정권을 잡은 이후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한편으론 징병제를 실시해 ‘붉은 군대’를 창설해 내외의 적들에 맞서며 의회를 해산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확립한다.

작금의 우리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을 실패한 실험으로 규정하고 관심을 두지 않거나 조소를 보내지만 역사적으로 그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서구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한지 100년이 지나도록 노동자와 대다수 서민들은 여전히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열강과 약소국가를 가리지 않고 당시 노동자들에게는 한줄기 빛과도 같았으며 그래서 프랑스 혁명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레닌은 약소민족 해방운동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수립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동휘 국무총리가 레닌을 직접 만나 자금지원을 약속받는 등 러시아 혁명은 초기 임시정부 역사와도 연결돼 있다.

② 6월 항쟁 - 7, 8, 9월 노동자 대투쟁 30주년

▲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2017년은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쿠데타로 스스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대통령 임기만료가 다가오자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민주정부수립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1971년 제정된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단체가 체육관에서 전 국민을 대표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만적인 제도였다. 박정희 사후 등장한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간선제 방식은 바꾸지 않고 6년씩 무제한으로 연임이 가능하던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고쳤을 뿐이다.

1987년 초부터 사회 각계각층에서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요구가 끊이지 않자 전두환은 개헌논의 중지와 간선제에 의한 정부이양을 핵심으로 하는「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각계 인사들의 비난 성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5월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의 연대로 형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된다.

앞서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식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국민운동본부는 6월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에 이른다.

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24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이날 경찰은 6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표출되는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위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산발적인 야간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 명동성당 점거농성이 6월15일까지 계속되면서 전국적으로 투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국민운동본부는 산발적 시위투쟁을 다시 결집시키기 위해 6월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최루탄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날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150여만 명의 국민이 참여했다.

6월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되자 6월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한다. 전국 38개 지역에서 130여만 명의 국민들이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6.29 선언으로 직선제 투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불씨는 다시 노동자 대투쟁으로 옮겨 붙었다. 살인적인 근로시간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정치 민주화만큼이나 생활현장의 민주화가 절박한 현실이었다. 7월5일 현대엔진 노조 결성과 16일 현대 미포조선 노조결성 신고서류 탈취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7~9월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된다. 울산·마산·창원·거제·부산 등에서 격렬하게 전개되던 노동자대투쟁은 8월22일 이석규 노동자가 직격 최루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열사 정국으로 번져간다.

노태우 정권도 8월28일 이석규 열사 장례식 이후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한다. 9월4일 대우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파업농성장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강제해산과 대규모 구속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으론 좌경용공 등 여론 공세와 기업주는 휴폐업 조치로 이어졌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민주화운동은 수도권의 중소기업과 비제조업 현장으로 확산되고 운수, 광산, 사무, 판매, 서비스 등의 직종에서 파업투쟁이 지속되었다.

7~9월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주로 요구한 것은 8시간 노동, 노동3권 보장, 자유로운 노조결성 보장, 블랙리스트 철폐, 작업조건 개선, 저임금 개선 등이었다. 노동자대투쟁 직후 노동조합은 이전 2,600여개에서 4,100여개로 급격히 늘어난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한편, 더 이상 사측에 노예처럼 따르지 않고 처우개선을 위한 다양한 대응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대투쟁의 성과로 꼽힌다.

③ 체 게바라 사망 50주기

▲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2017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세르나, 일명 체 게바라가 사망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체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지방에서 진보적 성향을 가진 바스크-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난다.

체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지만 1951년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오토바이로 남미를 여행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남미 곳곳을 돌며 서민들의 비참한 삶을 목도한 체 게바라는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게 된다. 그는 1952년 해외자본의 유치와 산업민영화를 반대하는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혁명가의 길로 접어든다.

의대 졸업 이후 과테말라, 멕시코 등지에서 활동하던 체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체 게바라는 1956년 멕시코에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카스트로를 비롯한 82명의 동지들과 함께 보트를 타고 쿠바에 상륙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일행은 산맥 지대로 숨어들어 반정부 무장 세력을 키웠는데 체 게바라의 처음 직책은 군의관이었지만 후에 반군의 주요부대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으로 성장한다.

1959년 1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이 지휘하는 반군은 수도 아바나를 점령했으며 독재자 바티스타는 도미니카로 망명한다. 체 게바라는 혁명의 공로를 인정받아 쿠바 시민권을 받고 쿠바 국립은행 총재와 공업장관 등을 맡으며 쿠바정권의 기초를 다진다.

정권의 2인자로 안락하고 영예로운 삶을 누릴 수도 있었으나 체 게바라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혁명의 성공을 위해 1965년 편지 한 장을 남기고 홀연히 쿠바를 떠난다. 한때 행방이 묘연하던 그는 잠깐 콩고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남미로 돌아와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군의 조직에 몰두한다. 브라질,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 등 여러 국가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볼리비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면 남미 전체에 혁명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9일 미군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으며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④ IMF 구제금융 신청 20년

▲ 사진출처: MBC 유튜브 화면캡쳐

1997년 연말 국민들은 평소에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IMF(국제통화기금)이라는 국제기구의 이름을 매일같이 뉴스에서 듣고 살아야 했다. 당시 한국의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감했고 결국 그 해 한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1월 한보그룹이 최종 부도 처리되면서 연초부터 한국경제에 이상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진로, 한신공영, 기아자동차, 쌍방울, 해태 등이 연쇄적으로 부도 또는 법정관리 상황에 접어들면서 위기가 심화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11월부터 경제관료들 사이에서 IMF 구제금융 신청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고 16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 방한하기도 한다. 이 때 프랑스의 한 경제전문지가 "IMF가 한국에 400~600억 달러 규모의 긴급지원 검토 중“이라는 보도를 냈으나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한다. 그러나 정부는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11월21일 당초의 입장을 뒤집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한다. 12월3일 캉드쉬 총재가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방한해 정부세종청사에서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와 공식적인 구제금융합의서에 서명한다.

IMF 구제금융 사태의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가지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겠지만 역시 정부의 금융과 외환관리 정책 실패와 정경유착이 결정적 요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IMF 구제금융 한해 전 정부는 금응기관의 대외경쟁력 제고를 이유로 9%를 상회하던 지급준비율을 1~5% 수준으로 크게 낮췄다. 또한 국내 금융사들은 저리의 해외단기채를 끌어들여 동남아 국가들에 고금리의 장기채로 빌려주면서 이자차익을 노렸다. 그러나 동남아 연쇄 외환위기로 한국의 경제전망도 어두워지자 해외 투자자들이 단기채의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고 회수하기 시작했다. 상환위기에 빠진 금융사들이 국내자금을 이용해 만기가 도래한 해외단기채를 상환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급격한 자금해외유출현상을 가져왔다.

이렇게 부실한 금융과 외환시스템에 기름을 부은 것은 정경유착이었다. 당시 부도를 맞은 기업 중 상당수가 김영삼 정부와 신한국당과의 커넥션을 이용해 불법적인 대출을 받고 있었다. 특히 한보철강의 경우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씨가 막대한 액수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샀다. 한편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 등 국제금융세력이 일시에 단기 투자금을 회수하는 등의 방식으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금융시장을 공격한 결과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부분은 더 검증이 필요하다.

IMF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대신 새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살인적인 고금리 프로그램과 정리해고, 적대적 M&A 허용 등 가혹한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외국인 투자한도 확대와 채권시장 개방 등 자본시장 전면개방이 이뤄졌다. 결국 서민들은 실업 등으로 고통 받는 동안에 해외자본은 국내시장을 잠식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8월 IMF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을 전액상환하면서 공식적으로 IMF 관리체제가 종료됐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IMF로 인한 상처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⑤ 박정희 전 대통령 출생 100년

▲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1917년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이해 경상북도 선산군(1995년 구미시에 통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를 양성하는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성적우수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해 3등의 성적으로 졸업한다. 이후 만주군 8단에 소위로 임관하지만 1년 만에 일본은 패망하고 만주국도 사라졌으며 군대도 해산된다.

귀국해 잠깐 방황하던 박정희는 군사영어학교(현 육군사관학교) 2기를 졸업하고 한국군 장교가 된다. 이후 잠깐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다 발각되지만 동지들의 명단을 넘기고 살아남은 것으로 유명하다. 겨우 사형은 피했지만 파면되고 문관 신분으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6.25 전쟁을 계기로 소령으로 복직된다.

사실 박정희는 1952년 임시수도인 부산에서도 한 차례 쿠데타를 모의한 적이 있다. 당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이던 박정희는 일본 육사 선배인 이용문 등과 함께 이승만을 사살하고 장면을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장면 측의 단호한 거부로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4.19 혁명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예상보다 일찍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 또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욕을 포기할 수 없었던 박정희는 결국 1961년 5.16 쿠데타에 성공한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친 뒤 선거에서 윤보선을 이기고 1963년 12월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여러 차례 헌법을 개정하며 18년간 집권하지만 결국 심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사살당하고 만다.

박정희 출생 100주년 기념행사는 경상북도와 구미시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경북도와 구미시가 박정희 기념사업으로 올해 책정한 예산은 1,400억 원에 이른다. 기념사업은 추모관, 동상 건립과 기념공원 조성사업 등이 예정돼 있으며 28억 원을 들여 구미시가 28억 원을 들여 기념 뮤지컬을 제작하려다 시민사회 반발로 취소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우정사업본부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심지어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건립이 논의되는 등 기념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될 전망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방기와 각종 권력형 비리로 현재 국회의 탄핵을 받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박 대통령 일가와 관련한 비리가 어디까지 터져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이번 박근혜 게이트는 단순히 현 정권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아버지 박정희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출생 100년이 되는 해가 바로 박정희 신화 붕괴의 원년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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