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는 여전히 유효한가

2018년 찾아온 ‘한반도 평화의 봄’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 해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6월 싱가포르 북(조선)-미국(이하 조미) 정상회담,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주요 의제였다. 그러나 그 협상은 결국 실패했다. 따라서 비핵화의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졌다. 한반도 비핵화는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한반도 비핵화는 이제 미련의 언어가 되었다.

2018년에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의 위치와 정의

4.27 판문점 선언, 비핵화를 평화체제의 하위 카테고리에 배치

4.27 판문점 선언은 3번째 항목에서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을 합의했다. 한반도 비핵화는 3항의 네번째 절에 위치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남과 북은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단히 의의있고 중대한 조치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하였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 비핵화는 평화체제의 하위 카테고리에 존재한다. 비핵화보다 평화가 더 상위의 개념이고 상위의 목표이다. 둘째, 한반도 비핵화 협상과 비핵화 절차는 “핵없는 한반도”라는 목표를 실현하는 데 복무한다. 한반도 비핵화가 조선의 일방적인 핵무기 포기(혹은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 선 조미관계 정상화 후 비핵화 합의

6월 12일 조미 정상이 합의한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아래와 같은 문장이 핵심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이 조선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호상 신뢰구축이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조미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므로, 선 조미관계 후 한반도 평화를 의미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형성된 조미 신뢰가 비핵화를 추동한다고 했으니 비핵화는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다. 이를 정리하면 “새로운 조미관계 -> 한반도 평화 -> 한반도 비핵화”가 된다.

9.19 평양공동선언, 한반도 비핵화를 정의

9월 19일 합의한 평양공동선언은 5번째 항목에서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여기서는 한반도 비핵화가 정의되어 있다.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가 그것이다.

세 합의문에 담긴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위치는 다음과 같다.

1> 한반도 비핵화는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를 의미한다.

2> 한반도 비핵화는 조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의 뒤에 위치한다. 즉 조미관계 정상화가 되어야 완전한 비핵화가 가능하며, 한반도 평화체제가 수립되어야 완전한 비핵화가 가능하다.

2019년 하노이 회담의 실패 후 한미 동맹의 대조선 적대행위 재개

2019년 2월 하노이 조미 정상회담은 싱가포르 회담에서의 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세부 사항을 논의하는 회담이었다. 조선은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고, 미국은 민생 관련 대북 제재를 해제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조선의 영변 시설 폐기와 미국의 대조선제재 해제는 조미 관계 정상화에도, 한반도 평화에도, 비핵화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의제 선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담장에서 미국은 영변 핵시설 외에 추가적인 요구를 들고나왔다. 즉 ‘영변 + @‘를 제시한 것이다. 조선은 이를 부당한 요구이며 신뢰 파기 행위로 간주했다. 결국 하노이 회담은 결렬되었다. 미국의 ‘영변 + @‘ 요구가 회담을 파탄냈다.

그 후 2019년 3월과 8월 한미군사연습이 재개되었다. 특히 8월 한미군사연습은 ‘북한안정화작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안정화작전’은 북의 영토를 점령하고, 잔당을 소탕하고, 대량살상무기를 회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이는 명백한 정치적, 군사적 적대 행위였다.

날려버린 한반도 비핵화의 골든 타임

한반도 비핵화 실현의 마지막 기회였던 2018년의 시도는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 세 가지 점 때문에 2018년은 비핵화의 마지막 기회였다.

첫째, 2018년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골든 타임’이었다. 핵무기 보유는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를 거쳐 현실화된다. 1> 핵무기 개발 성공 2> 핵무기 다양화 3> 핵무기 운반 수단인 미사일 보유 4> 미사일의 다양화 5> 핵무기와 미사일의 대량생산이 그것이다.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제대로 이행되었다면 한반도 비핵화는 1단계에서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 기회를 방치했다. 클린턴 정부는 ‘3.3.3 붕괴설’(조선은 3일, 3개월 늦어도 3년 안에 망한다는 미국의 사고)을 믿고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이 제대로 이행되었다면 2단계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 역시 미국은 방치했다. 오바마의 정부는 ‘전략적 인내’(조선이 붕괴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미국의 사고) 정책을 추진하느라 9.19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2018년 조미 정상회담은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당사자인 조선과 미국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할 때 조선의 핵보유는 3단계에서 4단계로 넘어가는 국면이었다. 조선이 핵탄두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실어 미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4단계로 넘어가면 비핵화 협상은 더욱 어려워진다. 협상의 문턱이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5단계로 넘어가면 비핵화 협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조선이 수많은 핵탄두와 다양한 형태의 미사일을 상당량 보유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한반도 비핵화는 3단계에서 4단계로 넘어가는 2018년이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조선은 2020년 정면돌파전을 선택한 후 4단계와 5단계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둘째,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하게 협상에 임했다. 이는 조선이 한반도 비핵화 의제를 남북 회담에서 논의한 데서 확인된다. 조선의 핵개발은 미국 적대정책의 산물이므로, “철두철미” 조선과 미국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 조선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2018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처음으로 비핵화 문제가 논의되고 합의문에 담겼다.

또한 조선이 비핵화를 위한 선조치를 취한 데서도 확인된다. 조선은 싱가포르 조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인 2018년 5월 24일 풍계리 핵시험장을 폭파했다. 그 전까지 북은 ‘동시 행동 원칙’을 강조하며, 조선과 미국의 동시 행동을 강조해왔다. 따라서 2018년의 풍계리 핵시험장 폭파는 자신의 비핵화 의지를 미국과 한국 그리고 국제사회에 어필하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노이 회담에서도 조선의 유연한 협상 태도는 유지되었다. 미국의 핵전문가 헤커 박사도 당시 언급했던 것처럼 영변의 모든 핵시설을 폐기하는 것은 민생 관련 대조선 제재를 해제하는 것과 동급이 아니었다. 영변은 조선 핵시설의 90% 이상이 모인 지역이다. 영변 핵시설이 폐기되면 조선은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과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영변 핵시설의 폐기는 조선이 ‘핵무기 추가 생산 중단’을 의미한다. 당시 조선은 산술적으로, 정치적으로 손해보는 협상을 감내하려 했던 것이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후에도 조선의 유연한 행보는 계속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5월 판문점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문제인 대통령을 만나 회담 국면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 후 조미 실무급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기도 했다. 2019년에 이미 회담이 결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핵무력 증강 정책을 재개한 것은 2020년 이후였다.

셋째, 2018년과 2019년 과정을 통해 조미 사이의 신뢰는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특히 조선은 미국이 선 비핵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결론, 미국이 대조선적대정책을 추진할 시간을 벌기 위해 대화를 이용하고 있다는 결론 그래서 미국과의 대화는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가 간 모든 협상의 기본은 신뢰이다. 특히 조미 싱가포르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것처럼 조미 신뢰구축은 한반도 비핵화를 추동한다(promote). 신뢰의 상실은 비핵화 협상의 추동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조선과 미국처럼 적대관계에 있는 두 국가 관계에서 추동력이 사라지면 협상은 불가능하다.

마지막 협상의 기회가 사라진 한반도 비핵화는 철지난 레코드판이 되었다.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 역시 비핵화 무용론 역설

30년이 넘는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역사에서 리비아 모델, 우크라이나 모델 등 다양한 사례들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성공한 비핵화 사례는 없다. 핵을 포기한 국가들은 치명적인 국가 이익 손실을 겪어야 했다.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이 추구했던 사례는 리비아 모델이었다. 리비아는 미국이 강하게 비핵화를 요구하자 관계 개선과 경제 지원을 약속받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 그러나 미국은 경제 지원도, 관계 개선도 추진하지 않았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은 결국 붕괴했다. 그 이후 조선은 ‘선 조미관계 개선, 후 비핵화’를 일관하게 요구해왔다.

우크라이나 모델 역시 한반도 비핵화에서 종종 거론되어 왔다. 소련 해체 이후 핵보유국이 된 우크라이나는 미국, 러시아와 비핵화를 합의했다. ‘부다페스트 협정’으로 알려져있는 이 합의는 미국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를 지원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다시피 미국은 자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우크라이나를 대리전으로 내세웠고, 현재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국가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이 중국, 러시아, 조선을 적대국으로 명시하고 이 세 나라를 대상으로 신냉전 대결을 펼치고 있는 현 정세에서 조선에게 비핵화는 ‘투항’, ‘굴복’, ‘망국’의 언어로 각인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역시 비핵화 무용론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며, 한반도 비핵화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방증하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 현실을 망각한 미련의 언어

1990년대 이후 한반도 비핵화는 대화와 협상, 평화로 가는 상징의 언어였다. 조미 관계에서건, 남북 관계에서건 모든 대화와 협상, 평화적 국면은 한반도 비핵화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평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우리들에게 한반도 비핵화는 희망의 언어였다. 비핵화의 진전은 한반도 적대체제, 분단체제, 정전체제를 극복하는 노력을 상징하는 언어였다.

그래서 비핵화가 물 건너간, 철지난 레코드판이 되어버린 현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비핵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도 비핵화 협상이 가능해야 남북미 대화와 평화의 과정이 복원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미련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미련을 갖는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하루빨리 미련을 털고 변화된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끝났다는 현실을 인정했을 때 변화된 현실에 기반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비핵화라는 미련의 언어를 버려야 새로운 희망의 언어를 창조하거나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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