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러스] 엄미경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엄미경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은 자신의 ‘반골기질’이 지금 자신을 있게 한 시작이었다고 웃었다.

부산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한 그는, 민주노총 통일국장으로 오래 활동하며 노동자 통일운동에 힘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국 각지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건립하고, 2015년 평양에서 남북노동자통일축구를 성사하는 과정에 그가 있었다.

그는 이제 “통일운동이 곧 전선운동”이라고 말한다. 통일운동의 교훈을 자양분으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으로 ‘전선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다.

최근 ‘윤석열 퇴진 투쟁’에 앞장선 그는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까?

▲ 엄미경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 엄미경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한 중학생의 반골기질

‘노동운동’에 대해 알려주는 이 없었던 여중생 시절, 그는 ‘노동운동’에 꽂혔다.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라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둘째언니가 놓고 간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보게 됐다. 그리고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고등학교 때 길거리에 붙어있는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수배 전단지를 보고 화가 나서 찢다가 경찰서에 잡혀간 경험도 있다.

상업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부산 부두 컨테이너 관리보수 업체에 취업했다. 사무직이었지만 부두 현장에 나가 노동자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곳 노동자들과 ‘노조를 만들자’는 얘기도 겁 없이 했고, “노조 만들면 감옥 가”’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정작 노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몰랐다.

온통 ‘노동운동’, 노조 만들 생각만

그때 ‘부산민주청년회’를 만났다. 1994년 6월경, 8.15범민족대회 참가단을 모집하는 포스터를 보고 나서다.

“‘데모’하는 사람 중에 노조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사람이 어디 없을까 기웃거리던 때였어요. 그 포스터가 저에게는 ‘광명’이었어요. ‘여기랑 친해지면 되겠구나’ 생각해서 다짜고짜 청년회에 전화를 걸었죠.”

최루탄이 터지고, 대회장까지 침탈당했던 8.15대회(서울대)에 참가한 후 다시 부산에 내려와 청년회에 가입했다. 오로지 ‘노동운동’에만 관심이 쏠렸던 당시 ‘통일’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였다.

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1998년 신발공장을 거쳐, 2001년 중소병원의 간호조무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백의의 천사라는 별칭을 본떠 ‘천사동아리’ 활동을 하며 대중과 만났다. 엄 위원장 역시 3교대 근무를 하면서 노동조합을 일구기 위해 뛰었다. 당시 노조를 만들 수 없었던 개인병원 간호조무사들의 노동실태 조사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힘을 쏟기도 했다.

“간호사들을 어시스트하는 역할인 조무사들은 비정규직 차별, 막말, 굴욕감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간호과 부장의 면담 요청이 있어 찾아갔는데, ‘이회창 후보를 찍을 것’을 강요받았기도 했었죠.” 자본이 어떻게 노동자를 관리하는지 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다.

▲ 간호조무사 천사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맨 왼쪽이 엄미경 위원장이다.
▲ 간호조무사 천사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맨 왼쪽이 엄미경 위원장이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우다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면 일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을 위한 ‘양말’의 존재를 모르기란 쉽지 않다. 민주노총 통일국장이던 엄미경 위원장은 노동자상 건립을 위해 양말을 판매하는 모금 사업을 제안했고, 전국 각지의 조합원들이 양말 2만 세트를 구매했다.

그가 ‘통일’에 대해 처음 접하게 된 건 부산민주청년회를 하면서다. 그러나 당시엔 통일운동이 ‘나의 일, 내 일부가 될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는 “민족문제보다 노동해방에 꽂혀 20대를 보냈다”고 했다.

북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청년회 ‘통일반’에서 활동하며 ‘통일’을 접하면서, 노동자 통일사업을 담당하는 민주노총 통일국장으로 10여 년을 보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운동’이다.

2014년, 박근혜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물밑 협상으로 국민적 분노가 일어나던 때, ‘반일운동’은 막연하기만 했다. 강제징용노동자들의 삶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역사기행을 시작하면서 무릎을 ‘탁’ 쳤던 때가 있었다.

“일본 강제징용 현장에 가보니, 말 그대로 충격이었어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따로 해석할 필요도 없이 해명되더라고요. ‘노동자들이 나라를 잃으면 이렇게 살게 되는구나’ 알게 됐죠. 현장에서 보고 듣는 힘이 커요. 그래서 강제징용 기행을 확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년 만인 2015년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우자’고 마음먹었다. ‘소녀상’을 세우는 것처럼, 노동자 대중의 힘을 발동해 ‘노동자상’을 세우는 것.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노동자의 민족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겠다는 결심이었다. 그 과정 자체가 ‘노동자 통일운동’이었다.

2015년 9월, 노동자상 건립 운동을 시작했고, 양말 세트를 판매해 종잣돈을 모았다.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팔렸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16년 8월, 일본 단바 망간 광산에 1호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민주노총 각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노동자상을 세우기 위한 모금 활동이 활발히 펼쳐졌다. 2017년 서울 용산을 시작으로 인천, 부산, 경남, 울산, 전남, 충남, 대전, 제주에 노동자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노동자상을 세우는 운동은 노동자들의 ‘반일운동’이며, 노동자의 민족의식이 자주의식으로 이어지는 거름이 되었다”고 말했다.

▲ 2018년 8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북측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가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설립된 강제징용노동자상에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뉴시스
▲ 2018년 8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북측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가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설립된 강제징용노동자상에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뉴시스

“통일운동이 곧 전선운동”

10여 년 넘게 노동자 통일운동에 매진한 엄미경 위원장은 지금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을 하며 ‘전선운동’ 최전선에 있다.

그는 “통일운동이 곧 전선운동”이라고 말한다. “민중이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정치적 목표’를 뚜렷히 하고 민중의 힘을 모으는 투쟁이 바로 전선운동이예요. 노동자, 농민, 빈민 등 각계각층 민중들의 힘을 모아 광범한 투쟁을 성사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죠.”

그렇다면 ‘통일운동이 전선운동’이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분단사회를 끝내겠다’는 공동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각계각층의 힘을 묶어내는 것이고, ‘분단’은 그 힘이 모이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투쟁이기 때문”이라고 엄 위원장은 말했다. 민주노총 통일위원회는, 노동계급이 이 정치적 목표에 복무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기에 곧 전선운동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한미FTA 투쟁과 광우병 투쟁

그가 한미FTA 투쟁,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투쟁을 떠올리며 전선투쟁을 돌아봤다.

“한미FTA 투쟁은 농민들로 시작해서 경제투쟁으로 이어졌어요. 여기에 노동자, 특히 자동차 관세 철폐 문제가 걸려있는 금속노동자 등이 기본 투쟁동력이 되었습니다. 주체들은 일찍이 이 투쟁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사업, 조직사업과 현장순회사업 등에 큰 공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광우병 투쟁이 범국민 투쟁으로 되는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어요. 민주노총이 냉동창고를 틀어막았고, 화물노동자들이 광우병 쇠고기 운송 거부 투쟁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죠. 광우병 쇠고기가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산발적 투쟁이 점화됐고, 이를 기점으로 정치적 쟁점화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법안에 대응한 투쟁이 심화되는 시기였다. “비정규 법안저지 전선이 형성되었지만, 광우병 의제는 민주노총 전체가 자기 의제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총노동전선’으로 대응하지 못한 아쉬움이다.

더 큰 파괴력 갖는 광장투쟁이 형성되지 못한 것과 함께, 진보정치세력이 힘을 발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있긴 했지만, 분열과 곡절을 겪고 있던 때였어요.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대변자가 존재했더라면 광장투쟁의 정치적 요구와 지향이 국회로 이어졌을 테고, 광장투쟁은 정치투쟁으로 더 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않았을까요… 민중의 정치권력은 결국은 정치세력에 의해 표현되잖아요. 그것이 바로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이죠.”

ⓒ노동과세계
ⓒ노동과세계

박근혜 퇴진 투쟁의 교훈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대변하는 당이 있었으면 전선운동도 달랐을 텐데…’ 하는 생각은 박근혜 퇴진 투쟁 이후 더 절실해졌다. 윤석열 정부 퇴진 투쟁의 앞자리에 서 있는 그가 한창 되새겨보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 당시, ‘정권 탄핵’이라는 가장 높은 수위의 정치투쟁이 벌어졌고, 아주 힘 있는 광장투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광장에서 뿜어져 나온 요구를 대변할 당이 없었죠…. 민주당이 새로운 사회를 바라는 민중의 절박한 요구와 이해를 관철해 주길 바랐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때 진보적 노동자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정치세력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거죠.”

‘윤석열 퇴진’이라는 정치적 목표 아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투쟁이 박근혜 퇴진 투쟁 때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도 자명하다.

엄 위원장은 “2015년, 당시 퇴진 투쟁과 퇴진 이후 과제에 대해 전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퇴진운동본부’가 건설돼 있었다면 퇴진 이후 한국사회는 지금과는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박근혜 퇴진 투쟁 이후 상설적 공동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민중공동행동’이 출범했다. 그 후 더 큰 질적 발전을 지향하며 2022년 1월 ‘전국민중행동’이 출범한다. 전국민중행동은 각계각층 공동의 정치투쟁 거점이 되었고, 그 성과는 지난해 ‘윤석열 정부 퇴진운동본부’ 출범으로 이어졌다.

“‘윤석열 퇴진’이라는 정치적 목표 아래 노동자, 농민, 빈민 등 기본 계급계층이 완강한 투쟁의 주력으로 나서면서 전열을 정비했고, 퇴진 투쟁의 속도를 다그치고 있습니다.” 퇴진 요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새로운 사회를 향한 토론, 한국사회 체제 전환을 위한 고민도 활발해지고 있다.

▲ 지난해 8월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투기 방조한 윤석열 정권 규탄 촛불집회 사회를 보는 엄미경 위원장 ⓒ노동과세계
▲ 지난해 8월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투기 방조한 윤석열 정권 규탄 촛불집회 사회를 보는 엄미경 위원장 ⓒ노동과세계

윤석열 퇴진 투쟁과 ‘전선운동’의 상관관계

올해 윤석열 퇴진 투쟁은 ‘달라야 한다’는 게 엄 위원장의 고민이다. 그는 “지난해 퇴진운동본부 건설의 성과를 토대로 올해 퇴진 투쟁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다”고 말했다.

퇴진 투쟁의 전략적 방향을 고민하고,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정권 퇴진, 정권 심판 투쟁을 ‘퇴진운동본부’로 묶어내는 역할이 그에게 주어졌다. 전국민중행동 조직강화특별위원장의 역할이다.

그는 민주노총과 지역본부가 앞장서서 지역마다 퇴진운동본부를 건설하는 것을 그려본다. 퇴진 투쟁의 전선을 촘촘하게 꾸리고 확장하는 것이다. 그는 “민주노총 모든 투쟁의 정치적 목표가 ‘윤석열 퇴진’으로 정조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노동자 통일운동을 해왔고, 전선운동에 나서 있는 그에게 한반도 정세와 윤석열 퇴진 투쟁의 상관관계를 물었다.

“지금의 반미투쟁과 통일투쟁은 ‘대정부’ 투쟁과 일치되어 있어요. 지금 미국의 신냉전 전략, 한반도 안에서의 전쟁 책동을 첨예화시키고 나아가 선봉장 역할을 하는 게 윤석열 대통령이잖아요. 윤석열 퇴진 투쟁은 결국은 반민생 정권이자 반평화 반통일 정권의 퇴진을 의미하는 것이자,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드는 투쟁, 그리고 동시에 미국에 의한 전쟁 책동과 수구보수세력 재집권 전략을 파괴하는 정치적, 상징적인 투쟁입니다.”

그는 “퇴진운동본부가 ‘한국사회 체제 전환’이라는 지향을 명확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퇴진 투쟁이 확대될수록, 각계각층 민중들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투쟁인 ‘전선운동’ 역시 한 발 더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지난해 6월 27일, 37개 제시민사회단체가 ‘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동과세계
▲ 지난해 6월 27일, 37개 제시민사회단체가 ‘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동과세계

“정세를 돌파하는 힘은 ‘준비’에 있다”

엄미경 위원장이 민주노총 활동을 시작한 초창기 남북관계는 엄혹했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거까지…. 남북노동자통일축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세였다.

남북 간 ‘통일축구’에 대한 합의도 없었던 때에, 민주노총은 전국 각지에서 예선전과 응원전을 펼쳤다. “엄혹한 정세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도 필요했고, 이런 정세일수록 대중이 주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염원이 북에 전달되면서 통일축구 개최를 합의했다. 그는 “정세가 아무리 엄혹해도, 투쟁과 사업을 결심하고 기층과 주체의 힘을 강화하는 등 준비가 되었을 때, 자신감 있게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다고 했다.

전선운동에 나서 있는 그는 ‘올해는 달라야 할’ 윤석열 퇴진 투쟁을 앞두고, 노농빈을 비롯한 퇴진 투쟁의 주체, 대중의 힘을 어떻게 모으고 강화해 나갈지를 고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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