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대군을 섬멸한 제3차 고려-거란 전쟁

수공과 매복전으로 적의 예봉을 꺾은 흥화진 전투

3차 고려-거란전쟁의 첫 전장인 흥화진으로 추정되는 평북 피현군 일대 위성사진
3차 고려-거란전쟁의 첫 전장인 흥화진으로 추정되는 평북 피현군 일대 위성사진

란장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정예 기병을 끌고 고려를 침략한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 조정은 1018 년 12월에 급히 방어대책을 강구했다.

이미 거란의 침략위협에 대처하여 10 월에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파견되어 가 있던 평장사 강감찬(姜邯瓚)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하여 방어군이 편성되었다. 그들이 거느린 고려 방어군의 수는 20만이 넘는 방대한 역량이었다.

강감찬은 영주(寧州, 평북 녕변군)에 지휘부를 두고 관문 요새인 흥화진(興化鎭)에까지 방어진을 폈다. 강감찬의 계획은 적의 정예기병의 예봉을 애초에 꺾어놓는 것이었다.

흥화진 인근 삼교천에 소가죽 제방을 쌓게 하는 강감찬. 『호랑이를 길들인 장수』(조선출판물수출입사, 2006) 중.
흥화진 인근 삼교천에 소가죽 제방을 쌓게 하는 강감찬. 『호랑이를 길들인 장수』(조선출판물수출입사, 2006) 중.

강감찬은 지세를 살펴보고 나서 흥화진 창고에 있는 소가죽을 있는 대로 다 가져오게 하여 긴 밧줄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삼교천(三橋川) 상류 한복판에 말뚝을 박고 그에 의지해 꿰맨 소가죽으로 물이 흐르지 못 하게 막아 놓았다. 소가죽 제방에 의해 물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소가죽 제방 위에는 큰 저수지가 생겨났다. 한편 강을 따라 골짜기와 나무 숲에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매복시켰다.

1018년 12월 드디어 거란장수 소배압의 지휘 아래 10만 명의 거란기병이 흥화진을 공격해 왔다. 소배압이라는 자는 993년 거란군의 재1차 침략전쟁 당시 침략군 대장이었던 소손녕(蕭遜寧)의 형이었다. 소배압은 1010년 거란군의 제2차 침략 때 북부 재상으로서 임금을 따라 고려를 침략했었다. 개경(開京)을 점령하고 크게 약탈하도록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자였다.

제법 지략이 많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다는 이 자는 자기의 적수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고 있었다. 놈들은 2차 침입 때 당한 수치를 어떻게 하나 만회하고 기어코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어리석은 망상을 하고 있었다. 전번 침입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흥화진에서의 싸움을 피하고 곧바로 고려수도를 향하여 진격할 예정이였다.

거란군은 흥화진에 이르자 일시에 성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삼교천을 건너 앞으로 진격해 나아갔다. 전투를 회피하려는 적들에게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강요하는 것도 중요한 전법에 속한다.

흥화진에서 고려군의 수공에 당한 거란군.
흥화진에서 고려군의 수공에 당한 거란군.

삼교천 하류는 거란 군사들의 함성소리, 말 울음소리로 들끓었다. 강감찬은 적의 군사가 강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일제히 소가죽 제방을 터뜨리게 했다. 저수지처럼 고여있던 큰 물이 일시에 밀려 내려오자 키를 넘는 물사태가 강 한복판에 들어섰던 거란 군사들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죽음을 면한 적들이 기슭에 올라 대오도 정비하기 전에 매복했던 1만 2천여 명의 고려 기병들이 놈들을 덮쳤다. 활로 쏜 다음 맹렬한 기세로 접근한 고려 기병들의 칼날이 번뜩이는 곳마다에서 거란 기병들은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뚝뚝 떨어졌다. 거란 기병은 혼비백산하여 병장기들을 버린 채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거란침략군과의 첫 전투인 흥화진에서의 승리는 거란 기병의 예봉을 꺾어 놓고 고려군이 싸움의 주도권을 쥐게 하는 데서 큰 작용을 했다.

역사에 기록된 구주(귀주)대첩

구주(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 강감찬
구주(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 강감찬

둘레가 천 미터도 못되는 자그마한 토성에 의거하여 수십, 수백 배가 넘는 대군을 맞받아 물리진 993년 안융진 방위자들의 투쟁, '몸이 비록 가루가 되더라도 나라의 천년 위업을 길이 받들 결심'을 안고 40만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굴함없이 싸워 성을 끝까지 지켜낸 1010년 1월 흥화진 군민들의 투쟁, 정예를 자랑하던 수만 명의 적 기병부대를 삽시에 녹여낸 1019년 2월의 구주(귀주)대첩은 고려 사람들이 나라를 지켜 얼마나 이악하게 싸웠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장 소배압은 첫 전투에서 고려군의 수공 작전과 매복공격에 걸려 패하자 자기들의 전통적인 전투방법인 벌판에서의 결전을 피하고 속전속절을 꾀하면서 태천-녕변-개천 등 서북면(오늘날 평안도지방) 산간지대를 통과하여 곧바로 개경을 향해 쳐들어 갔다.

제3차 고려-거란전쟁 전황도
제3차 고려-거란전쟁 전황도

돌변한 정세 하에서 강감찬은 곧 그에 맞는 전술을 세웠다. 그는 부원수 강민첨에게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의 뒤를 엄습하도록 했다.

보통 진격하는 군대의 후위(後衛, 뒷면 방위)는 전위(前衛, 앞면 방위)보다 약한 것이 특징이다. 앞에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배치해야 적의 저항을 분쇄하고 진격의 속도를 보장할 수 있기때문이다. 반대로 퇴각하는 군대의 후위에는 전위보다 강한 부대를 배치하는데, 그래야 적의 추격을 막고 퇴각을 성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감찬은 이러한 점을 노리고 추격을 조직했는데, 그의 예측은 면바로 들어가 맞았다. 부원수 강민첨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적군을 추격하다가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안남도 평성시)에서 적군의 뒤를 습격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했다. 시랑 조원(趙元)이 거느리는 고려군도 평양을 에돌아 강동(江東)을 거쳐 개경에 가려는 거란침략자들을 마탄(馬灘, 황해북도 승호군)에서 맞받아 싸워 1만 명이나 살상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연속되는 타격을 받으면서도 소배압은 상원(祥原), 수안(遂安)을 거쳐 개경을 향해 진격하는 최후의 발악을 감행했다. 이때 적들의 기도를 미리 간파하고 세운 시기적절한 대책에 의해 개경의 방비는 철통같이 강화되었다.

고려 개경의 외성인 개성 라성
고려 개경의 외성인 개성 라성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에게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개경에 들어가 지키도록 했으며, 동복면 병마사도 3천여 명의 정예병을 개경에 보냈다. 그리고 철저한 청야수성전술을 써서 개경 주위의 100리 안팎의 주민들을 성 안에 옮기고 한알의 낱알도 남겨두지 않게 했으며, 우물을 모조리 메워버렸다.

물 한 방울, 낱알 한 알, 마초(馬草) 한 단 얻을수 없게 된 적들은 극도로 피로해졌으며 적장 소배압은 그만 공포에 떨었다. 소배압은 마지막 시도로 300명의 척후병을 금교역(金郊驛, 황북 금천군)에 파견했으나 고려군의 야습에 의해 전멸했다.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거란침략군은 마침내 총퇴각을 개시했다.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개경 방어를 지원하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부대는 곧 추격으로 넘어가 적들에게 쉴 짬을 주지 않고 놈들의 행군서열을 위협하면서 뒤꼬리를 바싹 물었다. 퇴각하는 거란군에 대한 첫 타격전은 연주(連州, 개천군)와 위주(渭州, 녕변)사이에서 벌어졌다. 적들의 쫓겨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강감찬은 1월 23일 침략군을 불의에 기습하여 500여 명을 순식간에 소멸하였다.

구주/귀주대첩의 현장인 구주/귀주성 남문과 위성지도
구주/귀주대첩의 현장인 구주/귀주성 남문과 위성지도

강감찬은 방어군 주력을 구주/귀주(龜州, 평안북도 구성시) 계선에 집결시키고 철통같은 포위진을 쳤다. 적들은 고려군의 주력과 전투한 적이 아직 없었으므로 일정한 역량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패해 사기가 없어지고 고려 조정의 청야수성전술에 걸려들어 전투력이 심히 떨어진 상태였다.

1019년 2월 1일 구주/귀주 벌판에서 거란침략군을 물리치는 대포위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처음부터 치열했다. 적들은 어떻게 하나 포위를 뚫으려고 그중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북쪽에 집중했다. 막바지에 이른 적들은 기를 쓰며 출로를 열려고 했다.

이때 김종현의 부대가 도착하여 합세했다. 게다가 갑자기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고려군의 사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자, 된타격을 받은 거란군은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구주/귀주대첩 기록화
구주/귀주대첩 기록화

강감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들을 추격하게 헀다.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는 길 위에 적들의 시체가 널렸고 생포한 인원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과 투구, 병기 등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풍부한 지략과 용맹을 뽐내던 소배압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엎드려 기어 달아났다. 적병으로서 살아 돌아간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옛 기록에 의하면 "거란군은 지금까지 이렇게 비참한 패배를 당해본 예가 없었다."고 한다.

거란 성종은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면서 사람을 보내 소배압을 책망했다.

제3차 고려-거란전쟁에서 참패한 소배압을 보고 분노한 거란 성종과 파면되는 소배압. 『호랑이를 길들인 장수』(조선출판물수출입사, 2006) 중.
제3차 고려-거란전쟁에서 참패한 소배압을 보고 분노한 거란 성종과 파면되는 소배압. 『호랑이를 길들인 장수』(조선출판물수출입사, 2006) 중.

"그대가 적을 얕잡아보고 경솔하게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짐을 대하려는가? 짐은 그대의 얼굴가죽을 벗긴 후에 죽이겠노라."

소배압은 패전 책임을 지고 파면당했다.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해 적군을 몰살시킨 구주/귀주대첩은 고려군 장병들과 백성들의 용감한 투쟁과 함께 정확한 전법의 적용 결과로써 이룩한 승리였다.

고려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적 기병의 예봉을 꺾어 놓고 부단한 추격전과 요격전, 청야수성전술, 불의의 습격전으로 적을 부단히 소모, 약화시키고 피로하고 지치게 했으며, 이러한 성과에 토대하여 구주/귀주에서 포위공격전을 벌여 10만 대군을 소멸하였다.

제3차 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끈 애국명장 강감찬과 고려 백성들. 『호랑이를 길들인 장수』(조선출판물수출입사, 2006) 중.
제3차 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끈 애국명장 강감찬과 고려 백성들. 『호랑이를 길들인 장수』(조선출판물수출입사, 2006) 중.

구주/귀주대첩은 전술적 우세로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우리 민족의 불굴의 기개와 용감성, 슬기와 지략을 시위하였으며, 적들이 다시는 고려에 쳐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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