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부터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전 세계의 변화 염원 대중을 짓밟아 온 국가가 있다. 바로 미국이다.

인도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워싱턴 불렛: CIA, 쿠데타, 암살의 기록>은 전 세계를 향한 미국의 공작과 쿠데타의 기록이다.

▲비자이 프라샤드. 『워싱턴 불렛: CIA, 쿠데타, 암살의 기록』 심태은 역, 국제전략센터 감수. 두번째테제, 2022.
▲비자이 프라샤드. 『워싱턴 불렛: CIA, 쿠데타, 암살의 기록』 심태은 역, 국제전략센터 감수. 두번째테제, 2022.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국제관계서 본질은 동일

민주당이 집권하든, 공화당이 집권하든 그 체질이 변한적은 없다. 1973년 칠레 쿠데타는 공화당의 닉슨이 뒷배를 봐준 한편, 2014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시리아에 대한 무력 개입은 민주당의 오바마와 바이든 하에서 추진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박정희 군사독재는 민주당 케네디와 린든 존슨 하에서 공식 승인되었고, 전두환 쿠데타 역시 민주당 카터 정부에 의해 인정되었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을 이유로 국제 사회의 여론을 몰아 이란, 북한 등에 극심한 제재를 가해 왔지만, 자국은 안보리 결의를 줄곧 무시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개입에서부터, 1983년 그라나다 침공, 1998년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에 대한 폭격, 1999년 유고슬라비아 폭격, 2003년 이라크전, 2014년 시리아 내전 참전까지 안보리 결의가 참작된 적은 없다.

법 위의 법...원시적 가부장으로서의 미국

이 같은 미국의 행태는 원시적 가부장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인류학적으로 원시적 가부장은 그 스스로가 법인 존재로서, 명문화된 법과 규범을 갖춘 문명 이전의 ‘법’을 체현한 대상이다.

원시적 가부장은 압도적인 힘으로 무리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따르게 한다는 점에서 ‘법’이지만, 자신 외에 어떤 합리적 규칙도 갖지 않는 순수한 폭력이기도 하다.

저자 프라샤드는 원시적 가부장으로서의 미국의 해부도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원시적 가부장은 직접적인 무력 발휘에서뿐만 아니라 막후에서의 권모술수에도 능했다.

미국은 냉전이 무르익던 1946년 그리스 공산당에 맞서 부패한 그리스 우파 정부를 지원했고, 일본에서는 1947년 총선에서 좌익 정당이었던 사회당이 승리하자 CIA를 통해 극우세력 자유당과 자유주의 세력 민주당을 규합해 민주자유당(현재 자민당)을 만들어 장기집권 시켰다. 진보개혁 세력에 맞설 통일전선을 막후 조종한 셈이다.

1954년 과테말라 정권교체 공작에서 나타나는 CIA 메뉴얼

CIA를 앞세운 미국의 공작이 얼마나 치밀한지는 1954년 과테말라의 정권교체 사례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미국이 지원한 부패한 독재자 호르헤 루비코를 재치고 1950년 대선에서 승리한 아르벤스 대통령은 토지개혁을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아르벤스 정부가 미국 다국적 기업 유나이티드프루트가 과테말라에 소유한 막대한 유휴지(809 제곱킬로미터)를 유상 환수하자, 미국은 즉각 행동에 나서 대통령을 교체했다.

여론조작에서 암살까지...‘워싱턴 불렛’의 민낯

과테말라 정권교체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뤄졌다.

1. 여론조작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에드워드 버네이스라는 홍보 전문가를 고용해 미국 의회에 공산주의 음모론을 퍼뜨렸다. 버네이스는 <뉴욕타임스>, <타임> 등 유수 언론에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자금을 뿌려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보도를 일제히 내보내도록 했다. 조작된 여론에 편승한 의회는 연일 ‘과테말라 공산주의자들’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언론이 뒤따라 과테말라를 물고 늘어졌음은 물론이다.

2. 현지 적임자 임명

미국은 과테말라 대사로 존 퓨리포이를 앉혔다. 그는 그리스에서 부패한 우파정부의 집권을 도왔던 베테랑이었다. 그는 아르벤스에게 뇌물 200만 달러를 제시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위협을 가했으며, 내각에 연줄을 만들어 반대파를 결집시키는 등 과테말라 정부를 안팎으로 흔들었다.

3. 현지 군 장성 매수

미 정부는 그야말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고국을 해방할 적임자라며 별생각이 없던 아르마스를 꼬드겼다. 동시에 유나이티드푸르트는 해외 체류 중이던 카스티요 아르마스 대령을 매수하여 매월 3만 달러씩을 지급했다. 이어 CIA는 300만 달러를 투입해 아르마스의 용병을 훈련시켰으며, 군 수뇌부가 아르마스를 지지하도록 했다.

4. 경제 제재

CIA는 과테말라에 대한 경제 제재를 위해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석유공급과 해운업, 커피 등 과테말라의 주요 수출입 물품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를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 CIA는 라틴 아메리카에 빠삭한 미국인 사업가와 과테말라 산업계 임원 3명에 접촉해 실무단을 꾸려 ‘과테말라 제재 TF’를 운영했다.

5. 외교적 고립

미국주도의 중남미 통합 수단이었던 제 10차 국제미주대륙회의(Inter-American Conference)에서 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과테말라를 겨냥해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추진했고, 과테말라를 제외한 다른 국가 모두가 이에 동조하게 만들어 국제무대에서 아르벤스 민주 정부를 고립시켰다.

6. 대규모 시위 조직

과테말라 미 대사 퓨리포이는 CIA 현지요원과 합작하여 반정부 시위대를 조직했다. 수백만 달러를 뿌려 집회자금을 대고 그들의 일상활동을 지원하는 식이었다. CIA에 고용된 시위대는 온 거리에 반공 슬로건과 더불어 아르벤스 대통령과 과테말라공산당 지도자 포르투니의 목숨을 위협하는 문구를 채워 넣었다.

7. 암살

CIA는 과테말라 군부에게 받은 좌파인사 명단을 토대로 살생부를 만들었다. 반공산주의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즉시 제거해야 할 대상을 추려낸 것이다. 더불어 CIA는 현지 좌파지도자들에게 지속적인 살인 예고장을 보내는 심리전을 진행하며, 암살팀과 파괴공작팀을 운영했다. CIA의 대 과테말라 파일로 공개된 ‘암살 지침’ 보고서는 “암살 지시는 기록으로 남겨선 안 되며(...) 경부의 척수를 끊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제언하고 있다.

8. 직접행동

결국 CIA는 현지 군부와 함께 대대적인 폭격과 라디오 방송 공세를 펼치며 직접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별도 훈련받은 카스티요 아르마스의 용병들이 진격하는 가운데, CIA의 파일럿들은 폭격기를 타고 수도로 날아가 기관총과 세열폭탄을 뿌려댔다.

이 과정을 거쳐 1954년 아르벤스 대통령은 망명했고, 과테말라에는 CIA가 후원하는 군정이 자리 잡는다.

유나이티드프루트 최대주주였던 미 관료들

이 모든 잔혹극이 발생한 이유가 당시 미국 고위 관료들이 유나이티드프루트의 최대주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점은 놀라움을 더한다. 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CIA 국장 앨런 덜레스, 국무부 차관보 존 무어스 캐벗, 국제안보국장 토머스 더들리 캐벗 등이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유나이티드프루트의 핵심 이해당사자였다.

온건 개혁을 표방한 과테말라의 민주 정부는 미국 내 독점기업/관료의 이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교체되어야 했던 것이다.

미국은 위 매뉴얼으로 과테말라 체제 전복에 성공한 뒤 비슷한 수법을 즐겨 사용했다. 1961년 콩고 총리, 1963년 이라크 총리, 1964년 브라질 대통령, 1965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1971년 볼리비아 대통령, 1973년 칠레 대통령, 2019년 볼리비아 대통령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축출되었다.

빛좋은 ‘아메리칸 드림’...‘아메리칸 나이트메어’를 직시해야

그러나 아르벤스 정부의 몰락 이후 과테말라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군부 지도자에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각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테말라 내전은 게릴라로 찢어진 군벌들과 더불어 1996년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10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 이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후세인을 제거한 직후 이라크에서 내전이 창궐한 것과 같다.

당시 과테말라의 체제 전복에 미국이 관여했다는 주장은 음모론 취급을 받으며 조롱당했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 공개된 CIA 기밀문서는 현실이 음모론 이상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과테말라 차원에서는 2011년에야 아르벤스 대통령 유족들에게 사과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미국에선 어떤 사과도 없었다.

프라샤드가 지적하듯, CIA의 기밀문서 해제는 30-50년 주기로 이뤄진다. 공산주의와 대적한다는 명분이 사라지자 마약밀매와의 싸움, 테러리즘과의 싸움을 내걸었을 뿐, 미국 독점자본을 위한 CIA의 공작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아메리칸 드림’ 이면의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를 발견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와 선진 자본주의 제국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워싱턴 불렛>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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