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출 항목 내역 공개 끝내 거부
건전하지 않은 건전재정 속임수
민생 없는 민생예산

윤석열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자당 대통령의 최고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거짓말과 아집은 이명박 대통령을 능가했고, 유체이탈 화법이 쏟아내는 자가당착은 박근혜 대통령을 뛰어넘었다.

시정연설 내내 건전하지 않은 건전재정을 떠들었고, 민생이 빠진 민생예산을 노래했다. 특히 항목 공개를 거부한 지출 축소 자랑은 가히 압권이라 할만하다.

윤 대통령은 건전재정을 위해 지출예산 23조 원을 줄였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어떤 항목을 얼마나 줄였는지, 내역을 공개하라는 국회의 거듭된 요청에는 묵묵부답이다. 줄인 지출 항목을 모르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검증한단 말인가.

윤 대통령은 검증 따위는 하지 말고, 그저 정부를 믿으란다.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축복이라도 내릴 기세다.

윤 대통령은 ‘건전재정’을 무려 6번 반복했다. 내년 총지출이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폭(2.8%)이라며 콕 찍어 자랑했다. 내년도 물가 3% 인상 전망과 비교하면 지출은 분명 축소한 것이 맞다.

하지만 내년 예산은 건전재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총지출은 2.8% 증가했지만, 총수입이 2.2% 감소했기 때문이다. 줄인 지출보다 줄어든 수입이 훨씬 많은, 이런 적자재정이 어떻게 건전재정으로 둔갑한단 말인가.

마치 “이번 시험 1등 했어”라고 자랑한 학생이 알고보니 “뒤에서”라는 말을 빼먹은 것과 같지 않은가.

윤 대통령은 사회복지 예산을 늘여 서민과 취약계층을 더욱 두텁게 지원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실제 사회복지 예산이 늘어난 건 맞다. 하지만 사회복지 예산 중 공적연금이 왕창 늘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문제는 공적연금(국민연금, 노인기초연금 등) 관련 법은 하나도 개정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법이 개정되지 않았는데 공적연금 예산이 올랐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는 정부가 복지예산을 늘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기 보다, 노령인구 증가와 물가인상에 따른 자연증가분의 영향으로 해석해야 옳다.

결국 윤 대통령은 최저 생계급여 지급액 등을 늘려 민생예산을 확보했다고 큰소리쳤지만, 증가분은 극히 미미하다. 특히 물가 인상률을 고려하면 늘었다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연구개발(R&D) 예산도 그렇다. 단지 예산이 준 것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어떤 R&D 예산을 줄였고, 어떤 R&D 예산을 늘렸냐는 데 있다.

윤 대통령은 첨단 AI 디지털, 우주, 차세대 원자력 등에 대한 R&D 지원을 대폭 확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탄소 중립, 미세먼지, 중소기업, 지방정부 관련 R&D 예산은 줄어들었다.

R&D 예산 편승을 두고 따지려고 치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탄소 중립 예산만은 줄여선 안 된다.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 문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미래가 달린 심각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노동을 여전히 개혁 대상으로 설정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불법이냐, 합법이냐로만 구분하는 검찰 시각을 버리지 못했다. 노동조합 회계를 들여다보고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시정연설은 대통령이 정부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원안 통과를 부탁하는 자리다. 그렇다면 국가 예산 마련을 위해 세금을 내준 국민에게 감사의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긴 납세자 70%에 달하는 노동자를 응징하겠다는 대통령에게 기대할 말은 아니긴 하다.

그래서일까.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듣는 내내 강성희 의원이 든 손피켓 “줄일 건 예산이 아니라 윤의 임기”라는 문구에 마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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