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기업 현금화 명령, 대법원 계류 만 1년
‘사법부가 제2의 사법농단 만드나’ 규탄
김성주 할머니 “우리가 죽기만을 바라는가?”

“대법원이 제2의 사법농단을 벌이려는 것인가?”

박석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대표가 대법원을 향해 호통쳤다. 대법원이 일제 강제동원 배상 관련 판결을 미루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다.

2018년 대법원의 현금화 명령(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전범기업의 재산을 현금화해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피고 일본기업들은 배상명령, 압류명령, 특별현금화 명령에 이르기까지 불복 절차를 제기해 왔다.

현재 대법원엔 피고 미쓰비시중공업 상표권과 특허권에 대한 특별현금화(매각)명령 재항고 사건, 피고 일본제철이 소유한 피엔알(PNR) 주식 19만 4,794주에 대한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 사건이 최종 판결만 남기고 각각 계류돼 있다.

이 중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1929년생)가 압류한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에 대한 재항고 사건의 경우, 지난해 4월19일 대법원에 접수된 이후 계류 기간만 만 1년을 꽉 채웠다. 이렇게 대법원에서 압류가 확정된 뒤 특별현금화명령까지 내려진 사건이 다시 대법원에 계류돼 1년이 흐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2018년 10월 대법원 최종 원고(피해자) 승소 판결일을 기준으로 하면, 피고 일본기업은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5년째 무시하고 있다.

▲ 19일 대법원 앞에서 열린 ‘대법원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심 사건 신속 판결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김성주 할머니. [사진 : 뉴시스]
▲ 19일 대법원 앞에서 열린 ‘대법원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심 사건 신속 판결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김성주 할머니. [사진 : 뉴시스]

“대법원이 제2의 사법농단 벌이는가?”

박석운 공동대표는 “현금화 명령 이행은 절차적 문제에 불과하다. 법리적으로 따지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1년이나 계류되어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법원이 ‘사법농단’을 벌이는 게 아니냐?”고 의구심을 드러냈다. 현금화 집행은 법원으로부터 이미 확정된 채권을 사법권을 통해 실현하는 단순한 절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법원판결에 대한 외교부의 개입 문제를 제기했다. “정부가 대책을 만들고 있으니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부탁했다. 행정부가 사법부에 부당하게 간섭한 제2의 ‘사법농단’”이라는 것.

외교부는 지난해 7월 26일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의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일본과 외교적으로 협의할 시간을 달라’며 사실상 판결을 보류해 달라는 취지였다.

박 공동대표는 “백번 양보해 정부 대책을 기다려 줬고, 정부가 내놓은 제3자 변제 방식(일본 전범기업이 아닌 국내 기업의 기부를 받아 지급)을 피해자들 모두가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젠 판결을 미룰 명분이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이날 참가자들은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사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과 역할만 수행하면 될 일이지, 행정부의 요청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며 최종 판단을 미루는 사법부를 규탄했다.

▲ ‘대법원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심 사건 신손 판결 촉구’ 기자회견.
▲ ‘대법원 특별현금화명령 재항고심 사건 신손 판결 촉구’ 기자회견.

김성주 할머니 “우리가 죽기만을 바라는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시기부터 따지면 미쓰비시 소송의 경우 11년, 일본제철 소송의 경우 18년이 흘렀다. 양금덕 할머니는 1992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이 기간을 감안하면 할머니는 장장 31년째 법정투쟁을 진행 중이다.

그사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사죄조차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소송의 원고 5명 중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를 제외하면 3명의 피해자가 그랬다.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낸 피해자 중엔 이춘식 할아버지만 살아생전 대법원 승소 판결의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도 대법원판결이 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판결이 이행되지 않을 거라고 상상이나 하셨겠는가?”라고 개탄했다.

휠체어에 노구를 의지한 채 회견에 참석한 김성주 할머니(95세)는 “양금덕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오지 못했다”라며, “우리가 죽기만을 바라는가”라고 울부짖었다.

김성주 할머니는 윤석열 정부와 대법원에 더 기대할 게 없다는 듯 피해자 지원에 나선 단체와 회원들을 향해 “30년 동안 고생해 주고 있어 정말 고맙다”고 인사했다.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생존 피해자 김성주‧양금덕 할머니, 이춘식 할아버지 등 5명의 피해자와 유족 측은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을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 피해자와 유족들은 향후 벌어질 법률적 다툼에 대비하기 위해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제3자 변제 거부 입장을 담은 내용증명까지 보냈다. ‘거부 입장’을 공식화한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지난 13일 제3자 변제를 거부한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판결금’ 수령을 부추겼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로 피해자를 훈계하기까지 했다.

▲ 일제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김성주 할머니가 대법원의 신속 판결을 촉구하는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일제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김성주 할머니가 대법원의 신속 판결을 촉구하는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 : 뉴시스]

1965년과 닮은 2023년

2018년 대법 판결 당시 피해자 법률대리인을 맡은 이상갑 변호사는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안 제출 배경과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시기가 닮아있다고 지적했다.

“1951년 한일 양국이 국교 정상화 논의를 시작했지만 10년 넘게 이뤄지지 못하다가 1965년 박정희의 방미를 시작으로 한일정상회담이 추진됐다.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피해자가 수용을 거부하는 제3자 변제 방법으로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해 한일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돼 있다는 뜻이다.

이 변호사는 또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됐지만 강제동원 사죄와 배상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았고, 30년이 지난 1990년대 피해자들의 소송이 시작됐다”면서 “이번에도 제3자 변제라는 미봉책으로 강제동원 문제를 덮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 벌어진 사법농단 사건엔 여러 ‘재판거래 의혹’이 포함됐다. 청와대와 당시 양승태 대법원은 강제동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재판을 지연시키려 했던 사실이 탄로 났다.

참가자들은 “제2의 사법농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다시 사법부의 시간이 왔다. 더 지체하지 말고 판단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망국적 외교의 시간을 끝내야 할 때”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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