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유행이 3년째 접어들면서 사람들도 어느 덧 인명의 희생에 점점 무감각해져 가고 있다. 하루 몇 백 명 씩 죽어 나간다는 소식에도 무덤덤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다. 그러나 재난이 닥쳤을 때 사회집단이 힘을 합쳐 약자를 함께 배에 태울지, 아니면 그들을 배에서 내밀치며 부담을 줄일지는 한 사회의 도덕적 마지노선을 시험하는 일이 된다. [번역자]

출처: 환구시보 사설 2022-05-04 09:37 (현지시각)

사진 : 뉴시스
사진 : 뉴시스

미국 <월간 애틀랜틱(The Atlantic Monthly)>은 최근 정부의 방역 부실로 약 20만 명의 미국 어린이들이 ‘코로나19 고아’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18세 이하 고아 중에서 12명 중 1명은 코로나19로 보호자를 잃었으며, 미국의 공립학교 1곳당 평균 2명의 아이가 코로나19로 보호자 1명을 잃었다고 전했다. 미 언론들은 설령 이 나라가 2년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살육에 태연하게 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이 정도의 피해는 여전히 놀랍고 납득하기 어렵다고 평했다.

통계 분석에 따르면, 저임금· 비백인 가정의 소수 종족의 아동이 ‘코로나 고아’의 65%를 차지한다. 미국 백인 아동 1명당 고아와 비교하면, 히스패닉계 (미국에 거주하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자들-주) 미국인 아동은 1.8명,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동은 2.4명, 인디언 원주민과 알래스카 원주민 아동은 4.5명이 이 같은 운명과 같이했다. 지역적으로는 코로나19 고아의 절반 가까이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뉴욕, 플로리다, 애리조나, 조지아 6개 주에 몰려 있다. 이는 미국에서 가장 빈곤층이 많은 주의 순위와 매우 겹친다.

이는 미국 빈곤의 세대 간 대물림과 사회적 불평등의 소리 없는 비가(悲歌)라 할 수 있다. 새로 증가한 20만 명의 고아들 중 대다수는 태어날 때부터 미국 사회의 밑바닥에 있었으며, 운명을 바꿀 기회는 본래부터 적었다. 부모까지 앗아간 코로나19는 앞으로 이들의 삶을 더욱 암울하고 무력하게 만들 것이며 학교 중퇴, 마약, 폭력이 그들 일생에 평생 따라다닐 가능성이 크다. 수전 힐리스 전 세계 코로나19 피해아동평가단 공동회장이 말한 대로, “고아로 전락하는 것은 2주 만에 회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이 미국에 일으키는 일반 생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오히려 점점 낮아지고 있다. 왜냐하면 워싱턴은 더 많은 관심을 월가의 데이터, 나아가 대외 지정학적 게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이미 종식되었다”고 선언하는 데 급급한 이익의 추동 하에서, 미국에선 코로나19의 고통에 갇혀 있는 이들 집단들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잊혀졌다”.

이는 미국 체제 하에서는 “이치적으로 볼 때 당연” 하다. 고아들은 정치적 대변자도 로비 자금도 없기 때문이다. 또 손에 투표권도 없는데 누가 평소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의원들에게 호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자본과 투표권이 없다고 당연히 버려져야 하나?

코로나19 사태 이후 미국 연방정부는 수조 달러의 구제 금융을 풀었다. 최상위 부자들은 코로나19 사태 와중에서 재산이 50%나 늘었다. 하지만 이들 ‘코로나 고아’를 도울 법적 행정 명령은 전무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애매모호한 비망록을 냈지만, “실제로는 어떤 계획이나 약속도 제출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밀스는 <파워엘리트>에서 “미국은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자에 의해 통치되는 ‘민주주의’로, 실제로는 대중을 호도하는 환상!”이라는 일침을 가했다.

지금 미국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100만 명에 육박했다. 이는 예상치 못한 생이별로 인간적 비극이 100만 번이나 반복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령 전란이 요동하는 가난하고 낙후된 곳에서도, 이것은 끔찍한 숫자이자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대가이다. 하물며 국가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의료 여건이 탁월한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회 다윈주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상황에서 사회 밑바닥, 노약자는 소리 없이 잔혹하게 도태되어 간다. 정책 결정자에게 있어선 경제를 살리는 것이 인명 보호보다 중시되며, 주식시장 구제는 전염병 사태의 수습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논리이지만, 수많은 하층 가정에게 있어선 그 차가운 숫자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붕괴를 의미할 수 있다.

약자와 강자의 동등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인류사회가 야만에서 벗어나서 문명시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잣대이다. 재난이 닥쳤을 때 사회집단이 힘을 합쳐 약자를 함께 배에 태울지, 아니면 전혀 망설임 없이 그들을 배에서 내밀치며 부담을 줄일지는 한 나라의 집권 엘리트의 도덕적 마지노선을 시험하는 일이 된다. 워싱턴은 늘 각종 장소에서 ‘인권 파수꾼’, ‘인권 재판관’ 임을 자처했다. 하지만 정작 진짜 시험을 치르게 되면 이 같은 종이 딱지는 물 한 바가지에 흐무러져 버리고 만다. ‘코로나19 고아’로 날개가 꺾인 아메리카 드림은 ‘초강대국’의 비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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