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시보 사설] 매사에 중국 시비 걸기가 이미 ‘미국병’이 되었다

중국을 의식하는 미국의 경계심이 지나치다. 자국 글로벌 기업가 머스크가 최근 트위터를 인수한 것까지 배후에 중국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럴 경우 자칫 대국이 지녀야할 기본적인 균형감각을 상실할 것이 우려된다는 환구시보의 논평이다.)

원제목: 매사에 중국 시비 걸기가 이미 ‘미국병’이 되었다

출처: 환구시보 사설 2022-04-27 23:19 (현지시각)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가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일부 논의의 방향은 분명하게 빗나가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테슬라가 중국과 비즈니스 관계가 긴밀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트위터가 향후 베이징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플랫폼 중 하나가 되지 않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 트윗은 아마존 설립자인 베이조스가 리트윗하여 논평했다. 또 다른 목소리는 머스크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그의 지지와 그의 중국 내 비즈니스 활동 사이에 균형을 맞출 수밖에 없다”고 하며, “중국이 머스크를 통해 트위터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많은 미국 언론은 머스크가 일찍이 중국을 ‘찬미’한 적이 있으며, 또 “중국에 가서 직접 보라고 독려했다”는 ‘알림’도 잊지 않았다. 2019년 중미 무역전쟁의 결정적 순간에 머스크는 상하이의 슈퍼팩토리 가동에 들어갔다. 단 1년여 만에 상하이 공장은 테슬라의 글로벌 공급 물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머스크가 중국과 왕래가 많아 중국경제에 대해 몇 마디 말한 것이 일부 미국인들의 눈에는 ‘원죄’가 되었다. 트위터 인수까지 중국과 결부시켜 ‘위험’ 혹은 ‘위협’으로 몰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현재 미국 내에서 중국에 대한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공간이 얼마나 좁은지를 알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에서 이런 일들이 속출하면서, 무슨 일이든 중국에 고의로 시비를 걸려는 것은 이미 ‘미국병’이 됐다. 중미 간 종합 국력의 격차가 계속해서 좁혀지는 현실에 적지 않은 워싱턴 정치 엘리트들의 자신감은 심각하게 추락하고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중국 위협론’을 과장할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고 중국에 대한 불안과 과도한 예민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한 후 어떤 미국 언론인은 뜻밖에도 머스크에게 중국과의 경제적 연결고리를 끊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외쳤다. 그들에겐 이런 극단적인 횡포와 허약함이 우스꽝스럽게 교차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중국 안보’와 관련된 많은 논의가 자세히 보면 온갖 사적인 관점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지 소로스 같은 비즈니스계 인사는 과거 중국 투자에서 자신이 실패한 기억 때문에, “중국은 안 돼”라는 식으로 변명한다. 어떤 이는 이런 기회를 빌려 ‘귀순 문서’를 내놓는데, 예를 들어 아마존의 베이조스는 늘 높은 톤으로 ‘애국적’ 태도와 ‘안보’를 강조하지만, 그가 실제 노리는 것은 펜타곤(국방부)의 고액 수주라는 살찐 비계 덩어리다. 반면 더 많은 의원과 정치인은 대량의 과장과 억지로 중국에 고의로 시비를 걸려 한다. 이처럼 미국에서 중국이란 이슈는 경쟁 상대의 ‘유약함’을 비방하는 도구가 됐다. ‘중국 위협’론이 지금 일종의 이심전심의 ‘상술’이자, ‘트래픽 코드’(유동량 코드 traffic code)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보면, 오늘날 미국 사회에 팽배한 ‘중국 공포증’은 1980~1990년대 한때 만연했던 ‘일본 공포증’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모두 미국이 ‘추격자’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압함으로써 자신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점은 이야기의 결말에 있다. 당시 워싱턴이 일본을 윽박질러 ‘플라자 합의’를 체결한 것처럼, 그렇게 중국을 굴복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은 사악한 것을 믿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에, 절대 협박 공갈 같은 수법이 통할 수 없다. 중국에 대해 고의로 시비를 건 언행에 대해 사람들은 옛 시 두 구절을 떠올린다. “강기슭 원숭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날렵한 배는 벌써 만 겹 산을 지났다”(“两岸猿声啼不住,轻舟已过万重山)

(※당나라 이백의 <万重山>에 나오는 시 귀다. 이백이 먼 백제성으로 유배 길을 가던 중 유배가 취소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되돌아 갈 때의 기쁜 마음을 표현한 시다.)

반드시 지적할 것은 중국을 건드려 미국을 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미국의 국내외 각종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며, 앞으로 이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지를 좁힐 뿐이다. 미국 내 일부 지식인조차도 對중국 우위 약화에 대한 과도한 의식이 미국 본국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소홀하게 하며, 대내외 정책 편향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컨대 미국 학자 조지프 나이(<강대국의 흥망성쇠> 저자-주)는 공포를 과장하는 것은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며, 과잉 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미·중이 신 냉전이나 열전을 초래할 수 있는 공포를 지나치게 증폭시키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이성적인 목소리는 중국에 대한 적개심의 소란 속에 묻혀 버리기가 일쑤다. 보아하니 병자가 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중국과 관련되면 무조건 반대한다”는 것은, 반중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미국 내 현실주의에 대한 무지막지한 압박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 또한 시시각각으로 이데올로기 압력에 저항한다. 이런 꼬임새는 미국 일부 정치 엘리트들의 내면을 왜곡시켜 자주 그들로 하여금 “이 보 후퇴, 반 보 전진”의 망설임과 분열에 빠지게끔 만든다. 그러나 ‘중국의 위협’이 미국의 내외 문제를 야기하는 화근은 아니다. 따라서 현실은 조만간 그들로 하여금 협력과 상생만이 자신의 병을 고치는 양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할 것이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