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금 평양에선(3)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맞아 지금 평양에선 경축행사가 한창이다. 북한(조선)이 사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김정일 위원장을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편집자]

(1) 주체사상을 왜 ‘김일성‧김정일주의’라고 부를까?
(2) 김정일 시대, 밥 대신 총을 선택한 이유
(3) 김정일 열풍과 잠깐 맛 본 통일6.15

조국통일이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통일 문제를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며, 갈라진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는 문제”라고 정의했다.

다시 말해 통일은 70년 분단으로 발생한 남과 북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문제가 아니고,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마치 자석의 N극 S극처럼 걸림돌만 없으면 다시 이어진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통일운동은 둘을 억지로 하나로 합치는 운동이 아니라 분단의 원인이 된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제거하는 운동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또 통일은 “그 어떤 외세의 간섭도 없이 우리 민족이 주인이 되어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았다.

왜냐하면 통일된 부강한 국가는 오로지 우리 민족에만 좋을 뿐 그 어떤 나라도 바랄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오히려 위협으로 느낀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일찍이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남북이 공동성명으로 발표했던 것.(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런 김정일 위원장의 통일론은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구체화 되어 6.15통일시대를 개척할 수 있었다.

6.15시대의 배경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 ‘6.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선군정치에 기초한 우리의 주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역사적인 평양 상봉이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김정일 위원장이 선군정치가 6.15시대를 열었다고 한 이유는 1994년 제네바합의 이후 본격화한 북미 핵공방이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은 제네바합의 직후 퍼지기 시작한 일명 ‘333멸망설’(3일 아니면 3개월 내, 아무리 늦어도 3년 안에 북이 망한다)을 굳게 믿었다.

이 때문에 제네바 합의 사항(경수로 건설과 중유 공급)을 이행하지 않고 핵 위협과 경제 봉쇄를 강화하면 북이 망하거나 미국식 질서에 편입해 올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선군정치를 펼쳐 ‘고난의행군’을 이겨내고 사회주의를 끝까지 고수했다. 이어 1998년 인공위성 ‘광명성1호’를 발사함으로써 미 본토에 도달하는 미사일 능력을 시위한다.

이렇게 북미 1차 핵공방에서 패한 미국은 대북 적대 정책을 잠시 멈추고 대화 쪽으로 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미 관계가 개선된 틈을 타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전격 제안했고, 민중적 지지 속에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행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6.15선언은 통일의 이정표

민족 통일을 향한 김정일 위원장의 파격적인 행보는 정상회담 내내 이어졌다.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 직접 나가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맞이하고, 예정에 없던 차량 동승으로 두 정상만의 비밀 회담을 열었고, 60만 평양시민의 극진한 환영 인사에도 화답했다. 이런 파격적인 행보는 세계 외교역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던 전격적인 조치였다.

6월 14일 공식적인 첫 단독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분단 55년만에) 우리가 처음 상봉하는 것만큼 7천만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낙관을 주는 선언적인 문건을 하나 내놓는 것이 좋겠다”며 “민족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동의하는가”라고 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거기에 무슨 반대가 있겠는가”라고 동의를 표시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그러면 오늘 우리들 사이에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자는데 합의한 것으로 하자”고 말해 ‘우리민족끼리’가 6.15공동선언 1항에 새겨지게 되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또 통일방안과 관련해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로 다른 이념과 두 제도의 공존에 기초하여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연방제’를 대놓고 반대해 온 남측 여론 탓에 통일방안 합의가 복잡하게 흘러가자 “당장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통일방도에 대한 합의를 쉽게 하기 위해 우리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남측의 ‘남북연합제안’이 공통성이 있으므로 두 제안을 조절하여 공동의 통일방도를 만들어 통일을 지향해나가자”라고 제안해 민감한 통일방안에 절묘한 합의안을 도출했다.

이어 김정일 위원장은 이산가족 상봉문제와 비전향장기수 송환문제, 경제 교류 협력를 실현하는 문제, 남북 고위급 회담 개최문제들도 제의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동의함으로써 회담 4시간 만에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당시 대표적인 반통일 보수언론인 동아일보 조차 “단 한번의 만남으로 이런 정도의 합의를 도출해 낸 것은 정상회담의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라고 극찬했으며, 미국의 CNN방송은 “정상 외교사에 회담 하루 만에 구체적 의제 합의는 전례 없는 일”이라고 논평했다.

▲2000년 8월 언론사 사장단 46명이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으로 7박8일 간 방북했다. 
▲2000년 8월 언론사 사장단 46명이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으로 7박8일 간 방북했다. 

미국의 방해를 뚫고 개척한 6.15통일시대

남북정상회담 4개월 후인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에 이어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 미 대통령과 회담하고 ‘북미공동코뮤니케’를 발표했다.

마치 2018년 ‘4.27판문점선언’ 후 곧바로 6.12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해 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한국 정부의 입지를 강화시켜준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남북 통일을 결코 바라지 않는 미국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자 곧바로 북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더니 대북 적대 정책을 재개했다.

이에 김정일 위원장은 “우리는 조국통일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은 다 포섭하여 민족적 단합을 이룩해야 한다”며 6.15공동선언 이행을 계속 추동했다.

그 결과 2007년 6월까지 고위급회담만 20차례, 이산가족상봉도 15차례 진행했으며, 평양방문객 4만 명, 금강산 관광 200만 명이 다녀왔다.

또한 휴전선 일대 개성에 주둔한 군대를 뒤로 물러 개성공단을 개발했으며, 경의선과 동해선을 연결하고 바닷길 하늘길도 모두 이어놓았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정일 열풍’

소 떼를 몰고 방북해 여러번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은 제 나라, 제 동포들부터 생각하는 덕망 높은 분이기에 민족의 통일전망도 밝다.”라고 회고했다.

임동원 6.15 당시 국정원장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격식을 따지지 않는 합리적이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일단 결정을 내리면 정말 화끈하게 일을 처리하는 형의 지도자”라고 격찬했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방북한 김민하 중앙대총장은 “김정일 위원장은 판단력이 빠르고 유머 감각과 회의장을 주도해나가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방문 소감을 밝혔다.

2000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으로 7박 8일간 방북한 언론사 사장단 46명도 김정일 위원장과의 만찬에서 건배사로 “천하를 얻고 천하를 움직이는 멋진 지도자”라고 화답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입던 인민복이 추석빔으로 유행할 만큼 6.15시대 ‘김정일 열풍’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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