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금정굴 평화인권연구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11)

전재흥(全載興, 1927년생)은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인 서천등기소사건에 연루됐다며 서천경찰서로 연행됐다. 대전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갇혀 있던 중 1951년 3월 4일 총살당했고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 후 재심을 청구하여 62년만인 2012년 무죄가 선고됐다.

▲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재흥 선생의 사진. 얼굴의 오른쪽 부분이 찢겨져 사라진 것을 복원했다고 한다.

서천 시초면에서 태어나다

전재흥은 1927년 2월 18일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에서 부친 전봉준과 모친 구덕환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농이었던 전봉준은 마을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양식을 풀어 어려운 이웃을 도와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62년 그의 장례식 상여 행열이 끝이 없어 “죽은 군수보다 호상꾼들이 더 많았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모친 구덕환은 마을 대성이었던 구 씨 집안으로 서천에서 좌익으로 유명했던 구재극과 같은 집안이었다고 한다.

전재흥은 일제강점기 어려서부터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고 한다. 귀국할 때면 마을 청년들을 모아 산에서 나무를 했으며, 남편을 징용 보내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게 살아야 했던 이웃 아주머니들 집에 이 나무들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활동은 해방 후 항일운동가, 반일희생자와 그의 가족을 지원했던 ‘반일운동자 구원회’의 활동 내용과 비슷한 것이었다.

서천의 해방과 전재흥

해방이 되자 귀국한 전재흥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딸 전 씨는 어머니로부터 전재흥이 해방 직후 생긴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됐던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948년 분단 정부의 수립은 서천지역에서도 극단적인 갈등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경위는 파악되지 않지만 전재흥 역시 경찰에 쫓겨 다녔다고 한다. 딸 전 씨가 태어나던 1949년 1월 전재흥은 산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이미 두 자식을 잃은 전재흥은 셋째의 순산 소식을 듣고 3일 뒤 산에서 내려왔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남편이 시초지서로 잡혀가자 산후조리하던 아내 장 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지서로 찾아갔다. 남편은 의자에 묶인 채 매를 맞고 있었고 이를 본 장 씨가 두 팔로 가로 막았다. 출산 사실을 알고 있던 경찰은 장 씨를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장 씨는 굶은 채 그 자리에서 3일을 버텼다. 대소변도 그대로 서서 해결했으니 지서 경찰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남편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딸 전씨가 성인이 된 후 찾아 온 어머니 구 씨가 아버지에 대해 밤을 새우며 해 준 이야기였다.

풀려난 전재흥은 이날 이후 딸의 앞 날을 생각하며 반정부 활동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전재흥에게는 대전형무소로 가던가 아니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던가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체포 후 농사 일에만 전념하기로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뒤의 방안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동생 전재원(1929년생)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다가 경찰에 들어갔으나 좌익활동과 관련되어 사직당했다고 한다. 이후 지하활동을 하면서 숨어다녔는데 형수 장 씨에게 부탁해 늦은 밤 몰래 동료들의 밥을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좋은 세상에서 보답하겠습니다”, “형수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형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때까지도 동생을 비롯한 일부 청년들은 체포를 피해 산속에서 숨어 지냈을 수 있다.

한국전쟁과 서천

서천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서천경찰서로 소집됐다. 사찰계가 중심이 되어 심사를 한 뒤 이 중 20여 명의 주민들이 대전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들은 대전 산내면 낭월리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다. 남겨진 주민들 역시 경찰서 인근에서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서면 주민 일부가 보령의 이어니재에서 희생되었다는 것 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구체적인 경위는 파악되지 않지만 전재흥 형제는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인민군 후퇴 시기인 1950년 9월 27일 250여 명의 주민들이 불에 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서천등기소사건이다. 희생자 수에 대해 미군자료에는 280명, 서천경찰서 자료에는 189명으로 기록돼 있다. 직접 가해자는 정치보위부였다고 한다. 이 사건 관련자라며 서천군 노동당위원장 구재극 등 7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거나 그 전에 총살당했다고 한다.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선동리 이장 라권집이 희생됐는데 그는 면장이었던 사촌 라희집을 대신해 끌려가 학살당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국군 수복 후 전재흥에 의한 것으로 조작됐고 전재흥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웃 주민들은 라권집이 평소 전재흥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기억했다.

국군 수복과 서천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서천등기소 사건에 이어 세 번째 대량학살이 국군 수복 후 벌어졌다. 시초면 주민들이 부역했다며 시초지서로 끌려갔으며, 끌려갔던 주민 100여 명이 10월경 한산면 돼지고개에서 집단학살당했다. 이때 학살을 피한 희생자의 동생 전재원이 경찰에게 쫓기게 됐다. 도민증이 나올 때였으니 아마 1950년 12월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별 다른 부역혐의를 받지 않았던 전재흥에게 도민증이 나왔지만 동생 전재원에게는 나오지 않았다. 희생자는 동생을 집 방구들 속에 숨겼다. 구들 위에는 어머니 구 씨가 돗자리를 깔고 세모시를 삼았다. 경찰과 치안대에서 몇 차례 왔으나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돌아가길 반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전재흥은 자신의 신분증을 주어 동생을 도망가게 했다. 동생을 피신시킨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이제 형이라도 체포하려 했고, 형은 이를 피해 가까운 산으로 도피 생활을 했다. 산에 굴을 파고 숨어야 했고 어머니 구 씨가 한 밤 중에 군용담요를 덮어 쓰고 밥을 날랐다고 한다.

그러던 1951년 1월 20일, 두 돌이 지나도록 걸음마도 못 걷는 딸을 비롯해 가족들이 보고 싶어 집에 내려왔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한 겨울이었으므로 오랜 동안 산 속의 추위를 견디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끌려가던 전재흥이 군용허리띠로 심하게 매질을 당하자 어머니 구 씨가 이를 말렸다. 이번에는 구 씨를 때렸다. 방망이로 맞은 구 씨는 빗장뼈가 부러졌고 주먹으로 맞아 귀 고막이 파열되었다. 남은 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했다.

시초지서로 연행된 전재흥은 얼마 뒤 서천경찰서로 이송됐다. 전재흥이 끌려간 뒤 치안대 활동에 관여하던 라씨네가 아버지 전봉준에게 석방해 준다며 제안을 했다. 전 씨네 재산을 전부 내놓으면 석방시키도록 해 주겠다는 것.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금만 참으면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며 재산을 모두 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죄 지은 것이 없으니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며 기다리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들었고 이것이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가장 큰 회한으로 남게 됐다.

살인자로 조작되다

시초지서에서 하룻밤을 보낸 전재흥은 서천경찰서로 넘어갔고 열흘 정도 뒤 대전으로 보내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내 장 씨가 새벽에 출발하여 서천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전재흥은 트럭에 실려 있었다. 준비해 간 아침 밥이라도 전해 주려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아내는 “죄 없으니까 아무 일 없을 거다. 빨리 돌아가라”는 말만 들은 채 떠나가는 트럭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희생자는 1951년 1월 29일 대전형무소에 미결수로 구금됐다. 며칠 뒤 부친 전봉준이 면회를 했다. 고문을 많이 당해선지 얼굴이 주먹만 해졌다고 했다. 3월 초 다시 면회하러 갔을 땐 끌려 나가고 없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야 했다. 이미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부모조차도 모르게.

전재흥은 2월 21일 이장 라권집을 서천등기소사건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의해 〈국방경비법〉 제32조 ‘이적행위’에 해당된다며 사형판결을 받았다. 대전형무소로 이송된 전재흥은 민간인 신분이었으므로 적어도 〈비상조치령〉에 의해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어야 하나 군법회의 재판을 받았다. 그가 받았던 혐의가 군사행동이나 무력행동과 관련이 없었으므로 이 역시 의문이다.

군법회의 판결자료에는 “1950년 7월 10일 민청원으로서 우익인사 라권집을 체포 살해케 하고”라고 적혀 있다. 이 표현대로라면 군법회의는 전재흥이 라권집을 직접 체포하거나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익인사 라권집은 1950년 9월 27일 서천등기소에서 정치보위부에 의해 살해당했으므로 희생자와는 무관했다. 희생자가 인민군 점령기에 조선민주청년동맹에 가입했을 수는 있으나 이것만으로 라권집의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은 선동리에 살았던 주민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마녀사냥식 억지 주장이었다.

대전형무소 1951년 〈재소자인명부〉에 전재흥은 3월 4일 “군에 인도”됐다고 적혀 있다. 대전형무소에 전재흥과 함께 있었던 같은 마을 노희선은 사형집행 전날인 3월 3일 밤에 조용히 끌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끌려 나간 날 총살당했을 것이라고 본 노희선은 출소한 뒤 고향에 있는 전재흥의 가족들에게 3월 2일 제사를 지내라고 전했다. 기록으로 보아 희생자는 1950년 3월 4일 새벽 대전형무소의 총살터로 쓰였던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에서 학살당했을 것이다. 판결 후 불과 2주만이었다.

▲ 2015년 2월 대전 산내면 낭월리에서 발굴 중인 희생자 유골.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 확인사살 총탄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보인다. 이 희생자가 전재흥 선생일 가능성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여성 유족들의 이중 고통에 연좌제까지

아내 장 씨는 어린 딸과 함께 살고자 했으나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시아버지에게는 집안에 스물 여섯의 청상과부 며느리 말고도 징용에서 잃은 동생의 처 등 셋이 더 있었으니 그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친정아버지는 재가할 곳을 알아 놓았으며 시아버지는 손녀를 빼앗고 재가를 강요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장 씨는 마지막 밤을 딸과 보낸 뒤 사라졌다. 모녀는 십 수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강제로 이산가족이 된 아픔이 있었지만 재가한 장 씨는 일단 연좌제의 피해를 벗어났을 지 모른다. 남은 가족들은 전재흥, 전재원이 어디 갔느냐며 서천경찰서의 시달림을 받았다.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지 친구라는 사람이 학교에 찾아 와 얼음과자를 사주면서 아버지와 삼촌이 왔다갔냐는 말과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 먼 곳에 다녀온 적 없느냐고 물었다. 며칠 전 두 분이 된장과 고추장 등을 가지고 정말 먼 곳에 다녀온 일이 있었으므로 딸 전 씨는 그랬다고 대답했다. 놀랍게도 자신의 이 말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경찰서에 잡혀갔다. 두 분은 일제 때 징용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가 다쳐서 굶고 있었으므로 먹을 거리를 전해 주고 돌아 온 것이었다. 할머니는 다친 사람이 과부라 남자인 할아버지 혼자 다녀올 수 없어서 따라갔던 것. 조부모는 곧 풀려났지만 딸 전 씨는 이 일을 겪은 뒤로 말하는 것에 공포증을 느꼈고 특히 성인 남자들이라면 무조건 피하는 증세가 생겼다고 했다.

11살 때 인구조사가 있었다. 보통 집들은 면 사무소 직원만 나왔지만 이 집은 달랐다. 경찰관이 반드시 따라와서 형제의 소식을 물었다. 할아버지 전봉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으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네 놈들이 죽여 놓고 왜 나더러 물어보느냐?” 이 날 이후 할아버지는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손녀 전 씨 외에는 모두 손녀를 잡으러 온 경찰이나 치안대로 보았고 사람이 보이는 대로 낫을 휘둘렀다. 할머니 구 씨도 이를 피해 따로 살아야 할 정도였으니 결국 할아버지 수발은 모두 딸 전 씨의 몫이 됐다. 열 네 살되던 1962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4년 동안 집안 살림과 할아버지 수발을 하느라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정신에 이상이 왔을 때에도 서천경찰서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경찰서에서 오라는 편지를 받고 40리 길을 걸어서 가면 아무런 말도 없이 문 한 쪽에 세워 놓았으며 어쩌다 기껏 물어본다는 것이 “삼촌 안 왔느냐? 편지 안 왔느냐? 누구 왔다가 가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꿀밤을 때렸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면 한 밤 중이었다. 딸 전 씨에겐 이런 일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망했던 둘째삼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미 경찰서에서 읽어본 뒤 보낸 것이었는데 내용은 놀라웠다. “내가 잠깐 (북에서) 내려왔다가 볼 일 보고 올라가니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 알아라”하는 내용이었다. 늦둥이 막내동생 전재완 역시 극심한 연좌제 피해를 입었다. 똑똑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느꼈던 그는 마흔 여섯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인이 된 딸 전 씨의 삶도 어머니처럼 유족으로서의 고통과 여성으로서의 고통을 이중으로 겪어야 했다. 18세에 강제 결혼을 해야 했다. 쥐약과 수면제를 먹고 정신을 잃었으나 누군가 위 세척을 하여 살아났다. 하지만 세 달 가까이 혼미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 사이에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 버렸다.

도박에 빠져 세 남매와 시부모 시동생 등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남편 대신 갖은 일을 다 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남편의 폭력과 무능력은 극에 달했다. 백마강변에서 땅콩 농사를 짓던 무렵 움막을 지키는 일조차 못하겠다며 잠든 아기까지 버려두고 돌아 온 남편을 보고 좌절해 강물에 몸을 던졌다. 두 번째 자살 시도였다. 깊은 강물에 빠진 뒤 떠올라 물길 따라 내려가던 몸이 강가에 걸렸고 본능적으로 물 밖으로 기어 나왔다. 다시 죽으려고 깊은 물로 들어갔지만 이번에 가로막은 것은 산발한 물귀신이었다. 놀라서 도망나와 정신없이 움막까지 돌아왔다. 움막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전 씨는 자기처럼 불행해 질 아이를 보고 더 이상의 자살을 포기했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히 생각하니 산발한 물귀신은 달빛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움막 옆에는 커다른 전신철탑이 있었고 그 위에는 쌀을 켜는 키마냥 커다란 부엉이가 내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영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힘들게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던 중 일본에 살던 남편의 사촌이 한일협정 체결로 잠시 귀국한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 철거업을 하고 있었는데 무기력한 남편의 모습을 보고 일본에 데리고 가서 일을 시키고 월급은 송금해 주겠다고 했다. 전 씨는 물론 시어머니 등 다른 가족들도 크게 환영했다. 그런데 출국을 준비하던 중 장인 전재흥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남편이 떠날 수 없게 됐다. 결국 빨갱이의 자식이라며 모든 비난을 딸 전 씨가 받았다. 이 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했지만 또 다시 살아났다. 죽다 살아나기 세 번째였다.

이제 이 지옥같은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남은 방법은 자신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 씨는 세 남매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별거를 선언했던 것이다. 서울 평화시장을 오가며 옷 장사를 했지만 아이들과 먹고 사느라 원금만 줄어들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장사를 하면서 틈을 내 미용기술을 배웠고 방이 딸려 있는 작은 가게를 얻어 미장원을 차렸다.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짱구머리”가 전 씨의 작품이었으니 세 아이를 공부시킬 정도의 돈벌이는 됐다. 틈만 나면 남편이 가게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지만 이도 1987년 정식으로 이혼하면서 서서히 정리가 되었다.

진실규명 활동을 시작하다

생활이 안정되던 2001년 아버지를 찾기 위한 딸 전 씨의 활동이 시작됐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려야겠다는 뜻을 세 남매에게 밝혔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둘째아들은 알고 있던 택배회사 직원들을 통해 수소문했고 1950년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이 대전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둘째아들이 알려 준 산내면 골령골에 도착하자 산새 한 마리가 딸 전 씨의 머리 위를 맴돌며 떠나지 않았고 손을 내밀자 내려앉았다. 함께 갔던 아들이 사진을 찍었다. 전 씨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혼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므로 명절에 현장을 지키고 있으면 누군가를 꼭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만나지지 않았다. 성묘를 다니기 시작한 지 3년 되던 해 위령제가 열린다는 플래카드를 보았지만 이미 행사가 지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적힌 연락처를 통해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와 대전유족회를 만날 수 있었다.

진실규명과 재심

2010년 기각과 이의신청이라는 우여곡절 끝에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결정을 받았고, 2013년 1월 31일 홍성지원은 희생자가 당했던 군법회의 재판과정에서 희생자가 인정한 혐의 사실이 “임의성없는 자백”에 근거한 것으로 인정하고 무죄로 판결했다. 이 역사적인 판결은 한국전쟁 전후 시기 만연되어 있었던 고문과 폭력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국방경비법〉의 제정 근거나 1심 재판에 의해 판결이 확정되는 위헌성을 고려한 재판결과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좌익에 의한 서천등기소 집단학살사건〉을 조사한 결과 1951년 군법회의 판결문의 우익인사 라권집이 1950년 9월 27일 서천등기소에서 학살당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번 재심 법원의 판결은 1950년 7월 10일 민청원으로서 라권집을 살해케 했다는 기존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국방경비법, 비상조치령의 위헌 판결

한국전쟁 당시 1심만으로 피고를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법령은 〈국방경비법〉과 〈비상조치령〉뿐이었다.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은 사람은 2만여 명이었고 이 중 상당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는 이에 대해 ‘대법원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헌법상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여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미 재판을 받아 처벌된 2만여 명은 헌법을 어긴 법률에 의해 부당하게 처벌받았던 것이었다.〈국가보안법〉은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야 재판결과가 확정되는 3심제가 적용되었으므로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정부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나 검찰은 이 법의 적용을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재정권 하에서조차 〈국가보안법〉이 이렇게 천대받던 때는 한국전쟁 시기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

딸 전 씨의 끈질긴 노력으로 아버지 전재흥의 무죄가 확인됐고 억울한 살인 누명을 벗어나게 됐다. 하지만 고문으로 조작된 재판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조작된 진술서만 남기고 경찰서장의 판단만으로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경찰재판’ 전쟁범죄였지만 아무도 이에 항의할 수 없었다.

유족 전미경 씨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 전재흥처럼 억울하게 학살당한 전국 곳곳 희생자들의 안식을 염원하며 시를 짓고 있다. 계간 문학잡지 《백두산 문학》에 어머니 외 4편의 시로 2006년 등단했으며 《백두산 문학》 제14회 단편소설 〈전쟁과 상처〉로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강제 결혼, 연좌제로 인한 남편의 출국 정지 등 세 차례에 걸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았다. 2010년, 그 동안 죽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전미경

스산한 가을 바람

앙상한 가로수 휘몰아쳐

마지막 잎새 떨처 버리던

2010년 10월 29일

계룡대 육군 본부 민원실

 

아비 죽어 오십팔 년 가슴 저린 세월

고등군법회 사형이란 판결문 받아들고

망연자실

하늘인지 땅인지

깜깜절벽

피눈물 뚝뚝 흘리며

돌아서는 불효 여식

 

인권은 간 곳 없고

일 열은 사형, 이 열은 무기

사형은 무엇이고

무기는 무엇인지

뜻이나 알고

한일자로 찢어진

그것을 놀렸더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한반도 골짜기마다 유골밭으로 만들어 놓고

동작동에서 현충원에서

저들은 저리도 당당한가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죽은 자 뼈를 갈아

아버님 영전에 바치고

산 자 정의와 진실이란 이름 앞에

두 무릎 굴리지 않고는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위 시는 2016년 6월 2일 《충남일보》 ‘아침을 여는 시’에 실렸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