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필자의 회사생활 이야기다. 하루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말싸움을 벌였다. “CIA와 FBI가 미국 정보기관”이라고 하는 동료들을 상대로 “CIA는 미국 정보기관, FBI는 영국 정보기관”이라고 들이댔다. 그때 나는 한 나라에 정보기관이 어떻게 둘이나 있냐고 따졌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지만 나는 “여럿이 우기면 한 사람 바보 만드는 것 참 쉽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동료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옛날의 대화에는 이런 ‘우김’과 ‘구라(거짓말, 뻥)’가 많았다. 특히 조합원들끼리 술자리에서 언쟁하다가 밤늦은 시간에 노조 간부에게 전화해서 확인하는 일도 잦았다. 요즘은 이런 풍경을 상상할 수 없다. 노조 간부가 하는 얘기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스마트폰 검색 들어간다. 애매한 사실을 계속 우기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한국에 스마트폰이 대중화한 것은 2010년 이후다. 그전에는 실수해도 회복할 시간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려면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하니까. 그러나 스마트폰이 등장한 후에는 실수하면 그 자리에서 끝난다.

현재 한국 인구의 95%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을 들 힘이 있는 사람은 모두 사용한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4차 산업혁명 권위자인 성균관대학교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최재붕 교수는 “스마트폰은 이제 신체의 일부가 되었고, 현대인의 장기는 스마트폰을 추가해서 ‘오장육부’가 아니라 ‘오장칠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상의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며 스마트폰을 신체 일부처럼 활용하는 사람들, 이들을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 즉 스마트폰을 든 신인류”라고 명명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스마트폰을 어떻게 사용할까? 다 아시다시피 스마트폰은 수많은 앱을 내려받아 쓸 수 있어서 그 기능이 거의 무한대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의 모든 기능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사람들은 검색, SNS를 통한 소통, 기록(텍스트, 이미지, 녹음, 영상), 사무(일정 관리, 문서 편집), 게임, 음악, 영화, 유튜브 등은 기본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이런 기능을 일상생활에 활용한다. 그럼 보통 사람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보통 사람들이 바로 ‘민중’이다. 아직도 현장에는 2G폰을 들고 다니는 조합원이 있다. 그런 조합원 때문에 ‘단톡방’에 한 번만 올리면 될 내용을 별도로 전달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조합원은 이제 현장에서 무형문화재처럼 희귀한 존재가 되었다. 스마트폰을 든 인류를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한다면, 스마트폰을 든 노동자는 ‘포노레이버스(Phono Labor's)', 스마트폰을 든 민중은 ‘포노피플스(Phono People's)’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노동자’와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민중’이다.

물론, 스마트폰이 민중에게는 ‘자본과 권력이 씌우는 굴레’가 될 수도 있고 ‘해방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거대 정보기술기업들은 검색엔진, 플랫폼, 빅데이터, AI, SNS 등을 통해 민중을 스마트폰에 중독시키고, 개인정보와 온라인 활동 데이터를 수집하며, 위치정보 추적시스템으로 감시하며, 맞춤 광고로 물건을 사게 한다. 또한, 자본과 권력은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하여 경쟁 진영에 대한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스마트폰과 정보기술의 발달을 이용해 국내에서도 플랫폼노동이 활성화했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은 정보기술을 이용한 노동자 통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물류, 택배, 배달 등 유통산업에서는 PDA와 ‘배달앱’을 통한 위치추적과 업무독촉, 업무시간 외 주문 등으로 노동자들에게 갑질을 하고 있다. 퇴근한 야밤에 ‘배달원’ 위치추적으로 ‘쿠팡이츠’가 논란이 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퇴근 시간 이후에도 SNS를 통해 업무를 지시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를 명목으로 더 심해지고 있다.

자본과 권력이 무엇을 의도했든, 이 모든 것은 민중의 손에 스마트폰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반면 스마트폰을 장착한 민중의 힘은 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민중의 지적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구라’가 통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내 손안에 있다. 모르는 것은 검색하면 되고, 배우고 싶은 것은 유튜브로 배울 수 있다.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내고 배우던 요리, 음악, 피트니스, 미술, 기술 등 각종 학원강좌도 영상으로 보고 즐기면서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오프라인 학원들이 망하고 있고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물론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 등으로 지식의 확장에 법적, 사회적 제약이 있다. 따라서 사회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콘텐츠는 제한을 받을 수도 있지만, SNS는 이미 국경을 뛰어넘고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민중의 ‘지적능력의 마비’, ‘정치적 각성의 차단’을 목적으로 했던 과거 지배자들의 ‘우민화 정책’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창조적 능력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전문가만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은 평범한 사람들이 거뜬히 해낸다. 우리 노조 지부에서 아침 홍보 활동으로 피케팅을 한다. 그런데 끝나고 잠시 쉴 틈에 벌써 활동 영상이 올라온다. 영상 제작은 책상에 앉아서 ‘프리미어 프로그램’으로만 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결과도 기대 이상이다.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창조적 도구들이 디지털화해 스마트폰에 쌓여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구들이 생겨나고 발전한다. 이 모든 기능이 스마트폰에 집적되어 민중의 창의성을 무한대로 끌어올리고 있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새로운 형태가 발생하고 관계를 확장·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문자를 보내 서로 소통하는 것은 옛날얘기가 되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인스타그램, 밴드 등 SNS로 시간과 공간, 더 나아가 언어와 국경의 제약을 뛰어넘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정보공유, 인맥 확대 등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생성, 유지, 확장, 강화해 나간다. 사람들의 관계가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단선적 관계에서 그물망 관계로 진화한다.

스마트폰을 장착한 민중은 어제의 그 민중이 아니다. 민중은 업그레이드되었고 날마다 업데이트된다. 또한, 민중에게서 스마트폰을 빼앗기는 불가능하니 ‘역진불가(逆進不可)’다. 그렇게 업그레이드된 민중의 활약상을 보자.

스마트폰이 대중화하면서 자본의 내부비리와 갑질들이 생생하게 고발되고 있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직원에게 막말을 퍼붓는 현장을 녹취한 오디오 파일,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호텔 공사장에서 여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 파일 등은 모두 스마트폰이 있었기에 보도될 수 있었다.

권력 사회 내부도 예외가 아니다.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부실한 급식을 제공한 사실을 폭로, 경찰의 백신 강제 접종 관련 내부 지침 폭로, 공직사회에서 내부 보고와 소원 수리 등의 절차를 건너뛰고 익명의 블라인드를 통한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내부에서 묻어두고 갈 일’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개인을 ‘1인 미디어’로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이젠 꼭 언론을 통하지 않고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과거에는 몇몇 주요 언론사를 회유, 설득하면 비리와 갑질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권력 기관들과의 결탁 속에 모종의 거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바로 스마트폰과 SNS로 사람들이 무장했고, 사회적 관계가 온·오프라인 영역에서 확장, 다층화했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은 스마트폰을 통제하려고 한다. 지난 6월 17일 이천 물류창고 화재 시 불이 난 것을 발견한 직원이 스마트폰이 없어서 119에 즉시 신고를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쿠팡’에서 작업장에 스마트폰 반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작업장의 열악한 상황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용자 측의 장치다. 또한, ‘철도기관사의 운전시간 중 스마트폰 금지’를 포함해 많은 작업장에서 노동자의 스마트폰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다수 기업의 각종 회의에도 스마트폰 소지를 금지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진보·노동진영은 어떤가? 아날로그 시대의 오프라인 활동과 대면 중심의 활동이라는 과거 조직문화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마트폰과 SNS는 오프라인 활동의 보조적 수단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가?

노조에서 조합원에게 문자를 자주 보내면 ‘노조 간부들이 현장 순회는 하지 않고 문자만 보낸다’라고 비판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는 문자로 조직사업을 대체한다는 비판이다. 물론, 대면 조직사업이 가장 위력적인 방식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면 조직사업은 그것대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 대상에 한계가 있다.

청년 사업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선배 노동자들은 오늘의 30대 이하 청년노동자들이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꼴’을 보고 참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의 20대는 뼛속까지 스마트폰 세대이고, 30대는 뼛속까지 ‘인터넷+스마트폰’ 세대다.

발상의 과감한 전환이 필요하다. 민중의 지적·의식적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창조적 능력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새로운 형태가 발생하고 유지, 확장, 강화되고 있다. 이 폭발적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적 힘으로 만들어낼 것인가? 오늘의 시대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늘 만나는 노동자와 민중은 이미 Phono Labor's, Phono People's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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