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간 경선이 가열되고 있다. 
선거에서 프레임이 중요하다고 한다. 선거구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선거 승리를 위한 정치적 고지를 먼저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레이코프 교수의 프레임 이론에 따르면, '코끼리를 떠올리지 마라'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머릿 속에는 '코끼리'라는 프레임이 작동해서 반박하려면 할수록 코끼리가 저절로 떠오른다는 딜레마를 표현한 개념이다. 

한국사회 최대 화두는 이견없이 ‘불평등’의 해소이다. 그러나 20대 대선에서 선거프레임은 ‘공정’으로 가고 있다. 모든 대선후보가 한결같이 '공정'에 대해서 말한다.
윤석열은 대선출마선언에서 '공정의 가치'를 말했고, 이재명 역시 '공정 성장'을 언급했다.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 역시 '공정'을 능력주의로 해석했다. 이제 공정을 말하지 않는 대선후보는 없다. 

왜 공정담론이 득세하는 것일까?
'공정'이란 기회가 균등하고, 절차가 공정하다면 그 결과는 불평등이 있더라도 정의롭다는 주장으로서 포괄적으로는 ‘정의’ 담론이다. 이러한 담론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에서 ‘정의론’에서 시작되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한국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이제 대선후보들의 입을 통해 차기 대선의 주요 선거프레임으로 자리잡았다.

’정의‘라는 담론은 ’평등‘담론에 대한 역사적 축소의 산물이다.
프랑스 대혁명기를 거친 시민혁명의 핵심가치는 ’자유와 평등‘이었다. 그런데 이후 자본주의가 정착하면서 자유는 우선가치로 자리잡고, 평등은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으로 갈리게 된다. 이로써 자본주의에서 평등은 ’법 앞의 평등‘, ’기회의 균등‘이라는 형식적 평등사상으로 축소되고, 그 결과는 심각한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실질적 평등에 대한 지향은 자본주의 질서안에서 추방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에 따라 평등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평등의 가치를 보완적으로나마 실현할 수 있는 가치로 ’정의‘라는 담론이 ’평등‘ 담론을 대체하게 된다. 이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이며, 정치철학, 정치학 영역에서의 케인즈주의라 할 수 있다. 결국 ’정의‘란 사적 소유와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인정한데 기초해서, ’기회가 균등하고‘, ’절차가 공정‘하다면, ’결과적인 불평등은 정의롭다‘는 담론이다. 
그러나 결과적 불평등을 인정할 수 있는 전제가 되는 기회균등과 공정한 절차는 소수 독점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회균등과 공정한 절차는 자본가들에 의한 부의 독점적 소유구조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기회균등과 공정한 절차를 확립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지만 결국 부익부빈익빈,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 담론이 ’분배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창한 점에서는 자유주의에 비해 진보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기회균등과 공정절차를 내세우며, ’결과적 불평등‘을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한 점에서는 진정한 ’평등‘에 대한 왜곡축소이기도 하다. 

정의 담론은 다시 한국적 왜곡과정을 거친다.
정의론에 관한 한국적 왜곡은 첫째로 ’결과적 평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대전제로 한다. 정의론의 그나마 진보적 측면이 ’분배정의‘에 있는 것인데, 헬조선이라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쟁터에 살다보니 국가정책 차원에서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해 ’무임승차‘라고 비판하게 된다. 
둘째로 기회균등도 배제하고 ’공정한 절차‘ 일면에 집중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경기장에 입장할 수도 없는 수많은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들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개선 노력은 배제된다. 오직 경기장에 들어선 자들 사이에서 ’공정한 절차‘문제만을 다루고, ’반칙‘이 있으면 안된다는 담론이 대세를 이룬다. 이 리그란 바로, 대기업 시험, 공무원 시험, 의사되기 등 사다리 올라타기가 가능한 매우 비좁은 시장을 놓고 벌이는 전쟁터 안에서의 ’공정‘을 말한다. 이 전쟁에는 자식을 이 좁은 문으로 들여보내야 하는 부모세대들까지 참여하는 전국민적 전쟁이다. 상황이 이러니 뜻있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공정담론이 선별적, 차등적 공정담론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제 전쟁의 양상은 갑과 을의 전쟁이 아니라 을들의 전쟁으로 변질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정규직과 취준생이 반대하고, 최저임금인상을 자영업자가 반대하며 비싼 임대료와 비싼 납품가를 받는 재벌과 건물주들은 다 빠져 나간다.
셋째로 결국 남은 것은 ’능력주의‘ 하나이다. 성공하려면 능력을 키우라는 것이고, 시험을 잘 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준석이 움켜쥐고 국민의 힘 대표자리에까지 올랐다. 평등론을 정의론으로 왜곡축소한 미국식 담론을 수입하고, 다시 이 정의론의 진보적 측면을 한국적으로 축소하고, 우익적으로 왜곡하는 과정이 완성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준석은 우리 사회에서 SKY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어느 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 어느 학군과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 중3 성적으로 이미 고1 반편성에서 결정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정치입문 과정에서 아빠찬스를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의 해법이 아니라 오히려 원인이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상한 것은 ’공정‘을 말하는 모든 대선 주자들이 그 원인을 ’불평등‘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진단은 불평등을 말하면서 해법은 공정을 말한다. 진단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놓고 처방은 바르는 약을 주는 격이다. 왜인가?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의사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불평등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원래 한국사회에 정의 담론을 수입한 것은 개혁론자들이었고, 정부여당지지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이 조국사태와 부동산정책 실패, 개혁실패과정을 거치면서 부메랑이 되어, 반정부, 반개혁론의 주도담론이 되어버렸다. 이러니 대선판은 '공정'이라는 가치를 두고 대선 후보간 서로 '반칙'을 하고 있다고 싸우는 판으로, ‘내로남불식’ 이전투구판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민중진보진영안에서 ’공정‘담론에 대해 뭔가 대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무엇이 올바른 공정이고, 무엇이 틀린 공정인가에 대해서 민중진보진영이 강하게 질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조급함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보수정치권의 프레임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민중진보진영이 공정담론의 이전투구장에 가담하는 순간 불평등 문제가 가려지고 공정담론만 커지게 된다. 민중진보진영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려다 오히려 자기 목소리가 묻히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

민중진보진영이 대선판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평등에 저항하는 총파업총궐기‘를 성사시키는 것이다.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면서 불평등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용, 소득분배율, 부동산, 금융, 교육, 복지 모든 면에서 한국사회 시스템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향후 부동산, 주식 버블이 붕괴하고, 가계부채라는 뇌관이 폭발하면, IMF 보다 더한 위기가 올 것이 확실하다. 그럼 결국 죽어나가는 것은 노동자민중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이 ’한국사회대전환‘을 내걸고 ’불평등에 저항하는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 올바른 조치이다. 여기에 온 민중이 가세하여 이 기회에 한국사회 불평등한 시스템 전체를 뜯어고치자는 담론을 주류담론으로 형성해야 한다.

불평등에 저항하는 총파업총궐기는 노동자민중의 단결을 배가하는 위력한 방도이기도 하다.
공정담론으로는 민중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없다. 누군가 ’공정‘담론과 싸우지 말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사다리 올라타기 전쟁이 살벌하다는 뜻이며, 공연히 말 잘못 꺼냈다가는 본전도 못 뽑는다는 두려움이 배여 있다. 이 과정에서 을들의 전쟁도 발생한다. 그러나 민중진보진영이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면 ’공정‘담론이 야기하는 내부충돌적 입장을 극복하고 통큰 단결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대선판에 민중진보진영이 개입력을 발휘하고 목소리를 내는 방법은 강력한 투쟁밖에 없다.
민중진보진영은 현재 한국정치에서 운동장밖에 존재한다. 따라서 언론과 정치적 쟁점에서 배제되어 있고, 미디어 파워, 지지율 등이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민중진보진영이 제일 잘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속에서 들어가 민중에게 헌신하며 그들을 교육하고 조직하여 불평등을 혁파하는 투쟁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민중진보진영은 자신이 잘 하지 못하고, 잘 할 수 없는 여의도 정치를 흉내낼 것이 아니라 민중의 바다에서 민중들과 함께 투쟁으로 대선정국을 흔들어야 한다. 대선 후보도 정치게임이 아니라 민중투쟁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불평등 문제가 대선에서 최대쟁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의 민중들의 저항과 투쟁에 의해서 19대 대선에서 모든 대선 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원 공약에 동의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민중진보진영은 선거주의에 빠져 투쟁을 외면하고 미디어 전략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총파업총궐기를 전면적으로 조직하면서 부족한 미디어전략을 보완 강화하는 방법으로 완강하게 불평등 문제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하고, 국민적으로 담론화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담론투쟁도 잘해야 한다.
지금 위험한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도 있지만 불평등 바이러스가 더 위험하다. IMF 시기에도 노동자민중은 위기앞에서 그대로 모든 재난을 떠 안았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가 장기화되는 조건에서 또 그대로 당할 수는 없다. 코로나 방역상황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겠지만 위축되어서는 안된다. 더욱더 과감하게 불평등 바이러스와 투쟁하는 정당성을 확산시켜내는 담론투쟁에도 응당한 주의를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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