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연합군사훈련 언제, 왜 시작됐나?

지난 7월1일, 더불어민주당, 열린민주당, 정의당 등 국회의원 76명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연기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존 서플(John Supple) 미 국방부 동아태 담당 대변인은 답변을 통해 "계획된 훈련 일정엔 어떠한 변경도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면서 "이런 훈련은 비도발적이자 방어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오늘밤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도록 한미동맹의 준비태세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고 협박했다.

한반도 평화대화를 위해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자고 말하면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군대라면 으레 하는 <연례적이고, 방어적인 훈련>이란 답변이다.

하지만, 한미연합군사훈련은 양국이 진행하는 훈련 중 세계 최대 규모의 훈련이며, 그 성격도 도발적이고 공격적이다. 지금의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포커스레티나(1969년)’훈련이 바로 그랬다.

이 글은 최초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어떤 정세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행했는지를 통해 이 훈련은 군대라면 하게 되는 통상적인 훈련이 아니며, 방어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밝히고, 훈련중단이라는 결단을 촉구하려 한다. [저자주]

한미연합군사훈련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시작된게 아니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다.

국방부는 1954년 포커스렌즈 지휘소 연습이 최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주한미군과 유엔사의 주관으로 실시된 것이었고, 한 해 동안 10만 명 정도가 철수하는 상황에 안정적인 군사훈련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해는 터키, 태국이 참가하기도 했고, 1960년대 초반에 진행한 훈련들도 한국군 일부 부대와 미군 1군단 정도가 참여하는 기동훈련 정도였으니, 엄밀히 말해 지금과 같은 공격적인 한미연합군사훈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전쟁 직후, 30만명에 달하던 주한미군 상당수를 본국으로 철수해야 하는 혼란한 상황속에 군사준비태세를 유지하기 위한 훈련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병력규모와 참전국 철수 추이 [자료 : 동맹안보문화와 동맹결속력 변화-한미동맹 사례연구, 1968-2005 (지효근 연세대 2006)]
주한미군 병력규모와 참전국 철수 추이 [자료 : 동맹안보문화와 동맹결속력 변화-한미동맹 사례연구, 1968-2005 (지효근 연세대 2006)]

대신, 미국은 주한미군 숫자를 줄이면서, 핵무기에 손을 뻗쳤다. 1957년에 일본에 있던 전술핵무기를 남한 땅에 들여왔고, 서울 북부지역 비롯한 곳곳에 배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적어도 10차례 이상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던 미국은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핵무기를 주된 공격방법으로 제압하겠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주한미군을 줄이더라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도는 마련해 둔 것이다.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는 공식적으로 1992년에 한반도에서 철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열화우라늄탄 180만발이 경기도 오산미군공군기지, 수원 군공항에 존재한다는 폭로를 봤을 때, 한반도에서 전술핵무기가 정말 없는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최초의 한미연합군사훈련은 1969년 3월의 <포커스레티나>훈련

연합군사훈련이라는 틀을 갖춰 진행한 공격성을 띤 최초의 한미연합전쟁연습은 1969년 3월에 진행된 <포커스 레티나>라는 이름의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훈련을 주관한 미 전략타격사령부의 당시 작전 시나리오는 “가상공산국가인 ‘하타칼’이 민주독립국가인 ‘차랑’을 침공하면, 한국과 미국이 즉각 공수작전을 펴 ‘하타칼’국가를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특수부대 2,500여명이 1만3600km를 곧장 날아와 가상적국의 후방에 낙하했고, 한국 공수부대 600여명도 함께 작전을 펼쳤다. 이 연습에는 가상적국의 최고지도자를 직접 생포해 이송하는 훈련까지 할 정도로 매우 구체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이 방식은 현재의 한미훈련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소위 ‘참수부대’와 ‘참수작전’이 그것이다. 한국형 참수부대는 특수임무여단이라는 이름으로 2017년 12월 1일에 창설됐다.)

한국정부는 포커스레티나 훈련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이 모두 이를 참관하기 위해 경기도 여주 훈련장에 모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훈련 당시 공수부대 낙하 장면(왼쪽), 공수부대 낙하를 참관 있는 박정희(오른쪽)
훈련 당시 공수부대 낙하 장면(왼쪽), 공수부대 낙하를 참관 있는 박정희(오른쪽)

한미당국은 왜 당시 대통령까지 참관하는 공격적이고 공개적인 대규모 전쟁연습판을 벌인 것일까?

이 비밀을 알려면 1968년의 ‘푸에블로호 사건’을 알아야 한다

1968년 1월 23일, 미국의 ‘푸에플로호’라는 정탐선이 북한 영해를 침범해 정탐활동을 벌이다 80여명의 승조원과 함께 북한에 나포됐다. 미국은 공해상이었다고 주장하며 핵 항공모함과 군함 30여척을 동원해 무력시위에 들어갔고, 예비역 14,787명을 현역으로 소집하는 등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 때 미국은 구체적인 핵폭격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공개적인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들의 영해침범과 정탐활동을 인정하게 되자, 더 이상 명분을 세우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결국, 크리스마스 전에 반드시 승무원들과 배를 돌려받겠다는 목표로 협상에 들어갔고, 북한이 집요하게 요구한 ‘3A’가 포함된 사죄문을 북한에 보내고 승무원을 돌려받는 것에 합의하게 된다. 여기서 3A는 ‘정탐행위의 인정(Acknowledge), 정탐행위에 대한 사죄(Apologize), 향후 재발방지의 확약(Assure)’이라는 단어들이었는데, 이를 편지에 박아 넣는 것은 미국으로써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통상 외교문서에는 사과의 의미로, 유감을 뜻하는 Regret정도가 많이 쓰였고, 좀 더 나아가면 Sorry정도가 쓰였는데, Apologize는 무릎꿇고 사과한다는 의미로 거의 외교가에서는 쓰이기 힘든 단어였던 것이다.

당시 미국이 북한에 보낸 사죄문 내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앞

미합중국 정부는 1968년 1월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함정들의 자위적 조치에 의하여 나포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 여러 차례 불법 침입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요한 군사적 및 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행위를 하였다는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제시한 해당 증거 문건들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이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과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실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이와 아울러 미합중국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 의해서 압수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의 승무원들이 자기들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청원한 사실을 고려하여 이들 승무원들을 관대히 처분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미 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합중국 육군소장 길버트 H. 우드웓

1968년 12월 23일

본래 <포커스레티나> 훈련은 협상이 한창이던 1968년 11월에 실시하려 했다. ‘푸에블로호’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목적으로 당시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하며, 여차하면 바로 전쟁으로 돌입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기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 대선에서 집권 민주당이 공화당에 패하고, 협상에 대한 기대가 맞물리면서 보류되었다. 당시 존슨정부는 궁지에 몰려 있었고, 승무원 가족들의 강한 반발시위도 이어지자 사죄편지를 쓰고 협상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존한 승무원 80여명은 돌려받게 됐지만, 자신들이 원했던 ‘푸에블로호’ 선체는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북한은 이 배를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푸에블로호는 1998년까지 원산앞바다에 있다가 평양 대동강 ‘제너럴셔먼호(1866년)’가 격침된 장소에 2012년까지 전시됐다, 현재는 보통강 조국해방전쟁기념관 내에 전시되어 있다.)

한국전쟁을 ‘(베트남전 이전까지)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유일한 전쟁’, ‘잊혀진 전쟁’이라 부르며 기억에서 떠올리기조차 싫어 한 미국은 전쟁이 끝난 지 15년 만에 또 한 번의 굴욕을 맛봤다. 그리고 분노와 상처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미국은 보류했던 <포커스레티나> 훈련을 강행하기로 결정한다. 이 훈련을 통해 자신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북한에게 강력한 위협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한미연합군사훈련 직후 이어지는 충돌 : EC-121기, OH-23헬기 격추사건

1969년 3월9일부터 20일까지 <포커스 레티나>훈련을 강도 높게 진행한 미국은 북한에게 충분한 위협과 신호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4월 15일,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이번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공중정찰기인 EC-121비행기가 북한 미그-21기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승무원 31명이 전원 사망한 것이다.

당시 북한의 주장은 그동안 EC-121기가 동해안을 따라 북한 영공까지 침범해 정탐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는데, 이를 미그-21전투기로 격추시켰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번에도 이 비행기가 북한 영공이 아닌 공해상에 있었다고 주장했고, 핵항모 4척을 포함한 40척의 군함을 동해로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 행정부 내에서는 북한에 대해 보복이나 배상요구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력히 제기했다.

판문점에서는 정전협정 위반 여부를 두고 290차 정전위원회가 소집됐다. 여기서 북한측이 미국에 물었다고 한다.

“EC-121기 소속이 어디요?”

이 물음에 미국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는데, EC-121기는 주한미군기지가 아니라 일본 아스카기지에서 발진한 미 태평양사령부 소속이었던 것이다. 미국이 만약 이 사실을 인정하면, 정전협정은 유엔군사령부 즉, 미8군사령부와 체결한 것이기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토의할 내용이 아니라 북미 간 담판을 지어야 할 문제가 되어버리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니 난감했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미국의 강경한 기세는 뚝 떨어진 모양새가 됐고, 그 어떤 무력계획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출범 3개월차였던 닉슨 행정부는 전술 핵무기로 함흥과 원산비행장을 공격할 계획까지 검토했지만 역시 실행하지 못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사건해결에 무능한 존슨정부를 비난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도 정작 자신에게 일이 닥치자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헌데 충격적인 사건은 또 발생했다. EC-121기가 격추된 지 4개월이 흐른 8월, 이번에는 한강 하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북측 영공을 침범한 미군 헬리콥터(OH-23)가 격추당한 것이다. 타고 있던 미군 병사 세 명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고 말았다. 결국 닉슨정부는 ‘푸에블로호’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1969년 12월 3일,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 미군 병사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한미당국이 ‘포커스레티나’라는 자국 최고지도부를 제거하는 대규모 훈련까지 한 상황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무력들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초강력 대응으로 맞섰고, 결국 북미 간 충돌로 귀결됐다. 당시 북한은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에는 전면전으로”라는 구호를 꺼내 들었었는데, 이런 상황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북한에서 ‘강대강 선대선’ 원칙을 내세웠는데, 대북적대정책을 포기하면 선의의 대화에 응하겠지만,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강행하면 그에 응당한 대응을 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응당한 대응이란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같은 핵무력 과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최초의 한미연합군사훈련 <포커스레티나>는 북한에게 전쟁위협을 줄 목적으로 강행됐지만, 미국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도 못하고 굴욕만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미국은 그냥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후 한미연합군사훈련을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1971년 <프리덤볼트>라는 이름의 훈련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 수렁에 빠져 국내외 비난여론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닉슨대통령은 "아시아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방위의 1차적 책임은 당사국이 져야 하고, 미국은 선택적이고 제한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해 여론을 잠재우려 했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 7사단 2만명도 철수시켜 베트남전에 투입했다. <프리덤볼트>라는 한미훈련은 이런 정책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북한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1976년부터 세계최대규모 합동훈련 : <팀스피리트> 한미연합군사훈련

흔히 한미연합군사훈련이라고 하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게 팀스피리트 훈련이다. 1976년부터 1993년까지 지속되면서 많은 뉴스에 오르내린 덕이다. 팀스피리트 훈련은 세계최대 연합훈련이있으며, 30만명까지 참가한 적도 있다. 미국은 이 엄청난 훈련을 왜 1976년부터 시작했을까?

미국이 중국과 소위 ‘데탕트’라는 분위기속에 수교 협상을 시작한 게 1972년, 배트남전쟁에서 패한 것이 1975년이다. 유럽국가들의 반대로 미군들이 유럽땅에서 제대로 된 훈련을 하기 힘들어 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했지만, 베트남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이 풍부한 부대들이 있었다. 더군다나 중국과 미국이 수교까지 한 마당에 북한을 더욱 고립시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또한 유럽에서 더 이상 미군이 훈련하기 힘든 상황도 조성됐으니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훈련을 할 수 있는 곳으로 한국이 급속히 떠올랐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행정협정으로 미군의 천국처럼 되어 있는 한국 땅은 대규모 한미연합군사훈련을 하기에 매우 적합했던 것이다. 미국은 북한을 강하게 위협하면서도 자국 군대의 훈련을 손쉽게 하는 ‘꿩먹고 알먹고’의 이익을 누렸다.

멈추지 않고 세밀화 된 한미연합군사훈련

팀스피리트 훈련은 1992년 대화국면에서 잠시 중단됐다가 이후 한·미연합 ‘전시증원연습(RSOI)’으로 명칭을 변경해 진행됐다. 그러다 노무현 정부가 평시작전통제권 환수를 결정해 연합사 해체가 기정사실화된 2002년에 독수리연습으로 바꿨다. 그러면서 추가한 것이 잘 알려진 ‘키리졸브((Key Resolve)’였다. 그때는 워게임이 발전해 있었기에 키리졸브는 지휘소 훈련이 되었다. 독수리연습(Foal Eagle)은 실기동을 하고, 키리졸브는 워게임으로 더 큰 전쟁을 해보는 것으로 나뉜 것이다. 이런 전쟁연습은 언제든지 실전으로 바로 넘어 갈 수도 있다. 이것이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위험성인 것이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은 3월과 8월에만 있는 게 아니다. 3월과 8월에는 전면전을 상정해 미국의 증원전력을 포함한 전구급 훈련의 성격이 짙은데, 이외에도 한미공중훈련인 '맥스 선더'와 '비질런트 에이스', 한미연합해병대훈련, 한미 미사일방어통합 훈련도 존재한다. 남북미 대화가 한창이던 2018년에는 91회였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2019년에는 186회로, 2020년 상반기에만도 100회 이상으로 늘어났었다.

더욱 공격적으로 변모한 한미연합군사훈련

내용도 더욱 위협적으로 변모했다. 2019년 8월에 실시된 한미 연합지휘소훈련에는 '수복지역에 대한 치안·질서 유지'와 '안정화 작전'까지 포함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유사시 북한 점령을 의미한다. 이걸 두고 "방어적"이라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주목할 것은 박근혜정권 시절이던 2015년에 한미당국이 합의한 ‘작전계획 5015’다. 핵심적인 내용은 북한의 핵무기 사용 징후 포착 시 선제타격,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 한미연합군 투입 등이다.

(징후를 포착한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북한이 인공위성발사를 위해 발사대에 물체만 얹어도 이를 미사일 발사 징후라고 오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한미연합군사훈련의 공격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5년 8월 27일 국방부의 조상호 군구조개혁추진관은 북한의 핵무기 사용 징후가 보이면 승인권자를 제거한다는 내용의 '참수작전'을 언급했고, 이듬해 3월에 한미 양국은 역대 최대 규모의 연합훈련에 돌입했다. 양국군 34만명과 전략 자산 및 첨단 무기들이 대거 동원된 훈련의 주된 목적은 작계 5015를 적용하는 데 두었고, 이에 따라 참수작전, 북핵과 미사일 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 '탐지-교란-파괴-방어', 평양진격작전 등이 망라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훈련의 내용과 폭이 많이 완화됐다는 말들이 떠돌지만, 작전계획 5015를 포기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참수부대로 알려진 제13특수임무여단이 2017년 12월 1일, 창설됐고, 최근 훈련 중 특수작전용 초소형 드론을 분실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을 봤을 때,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 지금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결단해야 할 마지막 시기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역사와 전개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봤지만, 대규모 한미연합군사훈련은 그 첫 시작부터 통상적이거나 방어적이지 않았다. 해당 정세에서 북한을 위협하거나 전쟁을 염두에 두며 진행된 것이다. 지금은 더욱 공격성을 띄고 있는 이런 전쟁연습을 매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한미연합군사훈련 기간에는 어떤 돌발사건이나 우연한 충돌로 전쟁으로 바로 넘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실제 2010년 연평도 포격사태도 한미연합군사훈련 기간에 NLL인근에서 포사격훈련을 하다 일어났고, 천안함 사건 역시 한미연합군사훈련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한미연합군사훈련이 계속되면 이런 일들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특히, 2021년은 한반도 평화대화냐 긴장대결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한미연합군사훈련, 대북제재와 같은 대북적대행위와 정책이 계속되면 대화는 내년 대선까지 완전히 물 건너 갈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는 얼마 남지 않았고, 분단적폐와 수구집단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결단’이다.

전쟁광 조지W부시 대통령 시절에도 개성공단과 남북화해정책을 밀어붙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말이다.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으로 새로운 전환을 결단해야 한다. 이방인 트럼프도 결단했던 일을 세차례나 남북정상회담을 한 문재인정부가 왜 못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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